124.
“이번에 황제께서 사치 금지령을 내리시지 않으셨습니까. 철마다 다른 장식을 마련하려면 그만큼 돈도 많이 들겠지요. 약간의 돈만 주면 취향에 맞게 방을 꾸며준다는 데 뭐가 문제입니까? 격이라고 하셨지요? 평민 중에서도 충분히 교육을 받은 이들이 많습니다. 부인, 세상이 변하고 있어요. 페튜니아 부인께선 가끔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게 미쳤나!’
페튜니아가 도끼눈을 뜨고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레베카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알리시아까지 자신을 물어뜯고 있었다.
티파티가 점점 페튜니아가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원이 참 아름답네요. 페튜니아. 연못의 금색 천사상은 못 보던 것인데, 이번에 새로 들어온 건가요? 참 호화롭네요.”
데보라 부인이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설핏 보면 알리시아와 페튜니아 사이에서 중재를 나선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다.
페튜니아의 정원은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싫증도 잘 내는 편이라 시시때때로 정원의 테마가 바뀌었다.
황제가 사치를 경계하라는 칙령을 내린 가운데,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는 페튜니아를 저격한 말이었다.
페튜니아는 잠시 주변 부인들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들 예전보다는 치장을 덜 한 모양새였다. 그 알리시아마저 오늘은 얌전한 장신구를 차고 있었다.
황제의 사치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랭스터 후작은 어겨도 별 탈 없을 거라며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돈을 페튜니아에게 주었다.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황제의 칙령을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레베카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다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페튜니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레베카에게 말을 붙이는 데보라를 노려봤다.
‘제 아들 때문에 앙심을 품은 모양인데……. 데보라. 가만 두지 않겠어.’
페튜니아는 데보라를 필두로 레베카 쪽으로 붙기 시작한 부인들을 씹어먹을 듯이 머릿속에 새겼다.
몇몇 부인들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자 알리시아는 내심 우쭐한 기분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백작 부인으로 있는 동안 알리시아가 마냥 먹고 논 것만은 아니었다.
평민 출신 정부라는 소리가 지긋지긋했다.
때문에 알리시아는 이를 악물고 교양 공부를 했다.
그리고 페튜니아가 평민의 격을 입에 올리는 순간 알리시아는 깨달았다.
저 여자는 자신을 결코 무리에 끼워줄 생각이 없다는 걸.
오르지 못할 나무에 발을 디디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나무를 심는 게 나았다.
‘격이라…….’
레베카는 이 호화로운 정원 한가운데에 펼쳐지는 신경전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방금 페튜니아의 발언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본느 살롱의 개업에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부인들도 생계에 뛰어드는 일이 왕왕 있어 대여 살롱이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직은 대여 살롱이란 개념이 자리 잡기에는 힘든 시기였다.
그러니 라본느 살롱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격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요하네스 공작가의 지위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페튜니아의 발언을 곰곰이 되짚어 보던 레베카는 이윽고 그 격을 해결해줄 사람을 떠올렸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제 보니 페튜니아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레베카는 문득 여기서 허비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레베카는 급한 일이 생각난 척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의자를 끌었다.
그 순간 페튜니아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데보라 부인을 보기 좋게 무시한 채 알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알리시아는 저희와 출신이 달라서 그런지 견해가 특이하시군요.”
“무슨 의미신가요?”
“귀족은 말입니다. 핏줄로 결정되는 거랍니다. 그저 돈과 이름만 얻었다고 결정되는 게 아니라요. 핏줄은 속이지 못하죠. 짐승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미의 혈통이 좋지 못하면 필시 새끼도 어딘가 하자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페튜니아!”
알리시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페튜니아가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체통 없게 왜 소리를 지르시고 그러세요. 저는 큰 소리 나는 게 너무나 질색입니다. 격조 높으신 데본셔 백작 부인께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알리시아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렸다.
‘또 나왔군. 애먼 데 화풀이하는 악취미가.’
레베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릴 때부터 페튜니아는 일이 안 풀리면 제 옆에 서 있던 다른 이에게 화를 풀곤 했다.
그것도 약자만 골라서.
‘자, 반격해. 알리시아. 여기서 무너지면 내가 호적수라고 인정한 게 우스워지잖니.’
레베카는 나서서 그녀를 도울 생각은 없었지만 알리시아의 성장을 보는 게 퍽 흥미로웠다.
악만 지를 줄 알던 소녀가 제 것을 지킬 줄 아는 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알리시아가 똑똑해질수록 레베카는 좋았다.
제플린이 어떤 인간인지, 제가 딛고 있는 자리가 어떤 지옥인지 깨달을 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알리시아의 칼날이 어디를 향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알리시아?”
알리시아의 반격을 천천히 기다리고 있던 레베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리시아가 숨을 헐떡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배, 배가…….”
그리고 배를 움켜쥐더니 이내 의자 밑으로 추락했다.
“알리시아!”
“세상에! 정신 차리세요!”
부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레베카가 망설임 없이 알리시아에게 뛰어갔다.
알리시아는 꺽꺽거리며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야, 양수예요! 양수가 터졌습니다!”
데보라 부인이 젖은 알리시아의 치맛자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레베카는 알리시아의 모습을 살펴보더니 곧바로 그녀의 드레스를 찢었다.
“레베카! 이게 무슨……!”
“가위! 가위를 가져와요! 아니지. 그럴 시간이 없어.”
레베카는 테이블 위에 있던 나이프를 들어 코르셋의 리본을 뜯어냈다.
코르셋이 풀리자 반쯤 눈을 까뒤집던 알리시아가 다시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온 건 아니었다.
“거기, 당신! 내 마부에게 마차를 대기하라 일러! 그리고 가운을 가지고 와.”
레베카가 멍하니 사태를 방관하던 하녀에게 윽박지르듯 명령했다.
그녀의 외침에 하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레베카는 쓰러진 알리시아를 깨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알리시아! 알리시아, 정신 차려. 아이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안 돼.”
“나…… 난 아무 짓도…….”
페튜니아가 공황에 빠진 채로 눈을 껌뻑거렸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혹여나 데본셔 백작의 핏줄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자신이 그 죄를 덮어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쩔 줄 모른 채 입술을 뜯고 있는 페튜니아에게 데보라가 다가왔다.
“말이 너무 심하셨습니다. 페튜니아 후작 부인. 그러게 평소에 마음을 곱게 쓰셨어야죠. 아무래도 파티는 끝난 것 같네요. 여러모로.”
‘여러모로’라는 말이 날카로웠다.
데보라는 잔뜩 조롱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곤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레베카가 있는 곳으로 얼른 달려가 알리시아에게 가운을 입히는 걸 도왔다.
곧이어 건장한 하인 하나가 알리시아를 들고서 레베카의 마차를 향해 달렸다.
마침 마석 마차를 타고 와서 다행이었다.
“데본셔 백작가로!”
마부가 처음엔 어리둥절하며 행선지를 다시 되물었다.
“빨리 가라니까!”
하지만 레베카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에 그는 얼른 말을 몰기 시작했다.
마차가 출발하자 레베카는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정신을 조금 차린 알리시아가 눈을 가물가물 떴다.
“레, 레베카 님……?”
처음 그녀를 본 날처럼 레베카가 자신을 향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까마득한 예전 일이었지만 알리시아는 문득 그때가 그리워져 눈물을 흘렸다.
레베카는 알리시아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달랬다.
“알리시아. 숨을 깊게 쉬어.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아이와 너만 생각해.”
레베카는 방금까지도 저를 사로잡고 있던 복수심을 잠시 잊었다.
그저 아무 죄도 없는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바랐다.
“넌 할 수 있어. 무섭겠지만 할 수 있을 거야. 이런 거 별거 아니야. 그러니 알리시아, 힘을 내자. 응?”
“대체 왜……. 당신은 대체 왜 나를…….”
알리시아는 다음 말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진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전에 겪어 본 적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 알리시아를 붙든 건 제플린도 백작 부인이라는 지위도 아니었다.
레베카였다.
* * *
“당장 더운물과 깨끗한 수건을 준비하라 이르고, 산파를 데려오도록 해!”
창문 너머로 손을 뻗은 레베카는 그대로 문지기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공작 부인! 그러다가 다치십니다!”
반쯤 몸을 밖으로 내놓고 문지기를 겁박하는 레베카를 보고 마부가 질겁하며 소리쳤다.
마부가 기절하든 말든 레베카는 멍하니 있는 문지기의 뺨을 찰싹 때렸다.
“뇌가 없는 거야? 당장 문 열어서 그레이스부터 불러! 네 마님이 지금 애를 낳는다고!”
“아, 알겠습니다!”
감정이라곤 없을 것 같던 이들은 이혼한 전 백작 부인과 쓰러진 현 백작 부인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문지기가 허둥지둥 투구를 고쳐 쓰고 얼른 문을 열었다.
“아악!”
하인이 알리시아를 번쩍 들자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다.
알리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온 그레이스가 레베카와 알리시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 이게 대체…….”
“양수가 터졌어요. 지금 당장 방으로 옮겨요!”
“아! 알겠습니다. 너, 얼른 산파에게 연통을 넣어. 그리고 너는 백작님을 모셔오고. 그리고 나머지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한 그레이스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알리시아가 침대에 눕는 걸 확인한 레베카는 긴장이 풀린 다리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베카 님!”
그레이스가 얼른 레베카를 부축하려 했지만 레베카는 지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하아……. 산파는 아직입니까?”
“지금 오고 있다고 하니 몇 분 안에는 올 겁니다. 근데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보다시피 티파티 중에 양수가 터졌고, 제가 데리고 온 겁니다.”
레베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아이는 살리고 봐야지요.”
“아아…….”
어쩜 이렇게 성품까지 고귀할까.
그레이스는 레베카가 자신을 납치해서 협박한 일을 깡그리 잊고 감탄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차차 이성이 돌아오자 레베카는 조금 머쓱해졌다.
익숙하지만 차마 친근하게 굴 수는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