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무수한 시선이 레베카에게 내리꽂혔다.
‘좀 더 말끔한 모습으로 오고 싶었는데…….’
레베카는 화장대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기분이 착잡해졌다.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레베카는 대충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태연하게 말했다.
“최소한의 도리는 다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도록 하죠. 남의 집안일에 더 이상 끼어들고 싶진 않군요.”
“잠시 차, 차라도…….”
그레이스가 다급하게 레베카의 옷자락을 잡았다.
레베카는 제 치마를 꽉 쥐고 있는 그레이스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들어 그레이스를 바라봤다.
제정신이냐고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악!”
알리시아가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는 걸로 보아 출산이 임박한 것 같았다.
알리시아의 비명에 레베카가 눈을 한층 더 치켜떴다.
그레이스는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에 주춤하더니 마지못해 손을 놓았다.
“그럼 배웅이라도 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리 살가운 사이였다고. 제 걱정은 마시고 당신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말을 마친 레베카는 유유히 문을 열었다.
하녀들이 멍하니 레베카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레베카는 고요하나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가을의 호숫가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레베카는 거친 파도처럼 이곳에 들이닥쳤다. 격정적으로 화를 내고 쌀쌀한 말투로 그레이스를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고독해 보이지는 않았다.
‘소문처럼 요하네스 공작이 정말 잘해주나 봐.’
몰골이 조금 그렇긴 했지만 레베카가 걸친 건 전부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되짚어보니 레베카는 후한 주인이었다.
매질을 하지 않았고, 알리시아처럼 폭언을 퍼붓지도 않았다.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걸 잘도 나눠주곤 했다.
물론 제플린에게 걸리는 날에는 꼼짝없이 반납해야 했다.
요하네스 공작은 그 정도로 깐깐한 주인은 아닐 것이니 부수입이 쏠쏠할지 몰랐다.
문득 레베카를 따라갔다던 칸나가 부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레베카에게 좀 더 붙어 있을 걸 그랬다.
하녀들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자 그레이스의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들 멍하니 서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마님께서 괴로워하시는 거 안 보이니?”
그레이스의 외침에 하녀들은 그제야 고통을 호소하는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레이스는 당장이라도 하녀의 등을 내리칠 기세로 손을 휘둘렀다.
‘자기도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붙잡았으면서.’
하녀 몇 명이 입을 비쭉거리며 제 할 일을 찾아서 하기 시작했다.
“흐윽……. 아파…… 너무 아파…….”
알리시아는 밀려오는 진통에 허리를 들썩였다.
그녀는 이불보가 찢어질 정도로 이불을 손에 꽉 쥐었다. 눈물 줄기가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출산이 고통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제플린이 옆에서 손이라도 잡아준다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그레이스라도 말을 붙여 준다면 조금 나아졌을지도 몰랐다.
이 순간만큼은 사정없이 밀려오는 고통보다 아무도 옆에 없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 * *
답답한 방 안을 나서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데본셔 저택은 변한 게 없었다. 기둥의 나뭇결 하나하나에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잊고 싶던 과거가 날카롭게 찔러왔다.
레베카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알리시아의 방과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것이었던 방이 보였다.
제플린의 침실 다음으로 큰 방이었다. 알리시아가 그곳으로 방을 옮기지 않은 게 의외였다.
황금빛 손잡이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레베카의 숨이 거칠어졌다.
레베카는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쉽지 않았다.
레베카는 몸서리치며 방문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아래층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옥타비오와 제플린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아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레베카는 얼른 다시 계단을 올라가 황금빛 손잡이를 돌렸다.
방문을 닫는 찰나, 문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는 숨을 죽이고 옥타비오와 제플린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래서 지금 계속해서 카지노에 출입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언제는 내 마음대로 살라고 그러지 않았나. 이제 와서 이렇게 날 구속하다니 웃기는군.”
“그건 가문에 해를 끼치지 않을 때의 이야기이지요. 폐하께서 사치 금지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상황에 도박이라니요!”
“랭스터 후작이 이번에 성대한 파티를 연다는 걸 듣지 않았어? 폐하의 금지령은 그저 이번 사태를 잠재우기 위한 단순한 계책일세. 굳이 따를 필요 없지.”
“랭스터 후작과 백작님은 입장이 다르시지 않으십니까! 데본셔 가문은 대대로 황제 폐하의 측근이었습니다. 전대 백작께서도…….”
“그만. 그만해! 안 그래도 알리시아의 비명 때문에 골이 아파 죽겠어. 자네까지 이렇게 시끄럽게 굴지 말게나.”
“백작님, 마님께선 지금 당신의 아들을 낳고 있습니다. 꼭 다른 사람의 일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요즘 들어 마님께 쌀쌀맞게 대하시고……. 고용인들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게다가 제가 백작님의 행선지를 알지 못하도록 손까지 쓰셨더군요. 혹시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하셨습니까?”
“난 백작이야. 이 데본셔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누구에게도 허락받을 필요가 없지. 하지만 자네의 태도를 보면 대체 누가 주인인지 헷갈릴 정도야. 그리고 알리시아에게 쌀쌀맞은 게 왜 이상하다는 거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식을 수도 있지 않겠나?”
“그래도 이건 너무하십니다.”
제플린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마치 옥타비오를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이상한 의문이 들더군. 알리시아를 볼 때마다 자네가 주장하는 것만큼 애정이 넘쳐흐르는 것 같지 않아. 가끔은 혐오스럽기까지 해. 그녀가 내 연인이라는 증거는 오직 주변인들의 증언밖에 없지. 한데 만약 그게 거짓이라면? 혹시 날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전 백작님께 한 치의 거짓도 고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러시겠지. 자네는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말한 적이 없으니 말이야.”
“무슨 뜻입니까?”
“별뜻 아닐세.”
분위기가 꽤 험악해 보였다.
옥타비오와 제플린이 저렇게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는 건 처음 봤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금이 가고 있는 건 기정사실인 듯했다.
자신이 추측이 맞아떨어진 걸 기뻐하며 레베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좀 더 정보를 얻기 위해 문에 귀를 바짝 대었다.
“아아아악! 제플린!”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알리시아의 고함에 둘의 이야기가 멈추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웬만한 여자들은 다 겪는 건데 알리시아답게 유난이군.”
“유난이 아니라 정말 아픈 게 맞을 겁니다. 그리고 초산이라 더더욱 힘들 것이고요. 레베카 님께서 아이를 낳는다고 하셔도 그러실 겁니까?”
레베카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제플린이 움찔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과연 그가 기억을 되찾은 걸 털어놓을까?
그렇게 된다면 둘의 사이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곧이어 들려오는 건 제플린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였다.
“레베카? 그 악독한 내 전처 말인가? 재혼까지 한 마당에 그녀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아닙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이제 진짜로 가보시지요. 산파가 도착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레베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에 기대었다.
둘의 관계는 점점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제플린은 기억을 잃은 척하며 계속해서 옥타비오를 떠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맙게도 제플린은 그게 제 살을 도려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레베카는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대로네.”
방은 마치 주인이 돌아오길 바라는 듯 그녀가 집을 나올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옷장과 장식장은 텅 비어 있었지만 나머지 가구는 그대로였다.
오랜 세월 수족처럼 부리던 물건들이었지만 레베카는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곳을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꼭 남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어색했다.
레베카는 제 심경의 변화가 신기해서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이곳은 내 집이 아니야.’
‘집’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꽉 조여들곤 했다.
그녀에게 ‘집’은 언제나 답답한 곳이었다. 감옥이었고, 탈출해야 할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 ‘집’은 안식처였다.
율리안과 칸나, 그리고 릴리가 있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마음을 놓을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강력한 힘이었다.
때문에 괴로운 기억이 엄습해도 레베카는 이곳에 두 발로 단단히 서 있을 수 있었다.
방 안을 둘러보던 레베카는 무심코 창틀을 손으로 쓸었다.
이곳에 유채꽃 화병을 올려둔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어느덧 그때의 유채꽃처럼 화사했던 봄은 져버리고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이 왔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할 예정이었다.
이번 가을에 베어내고 부숴버린 것들을 장작 삼아 겨울을 불태울 테니.
창틀을 쓸던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먼지가 한 톨도 묻어나지 않았다.
쓰는 사람도 없건만 이곳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아직도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나 보지?”
어이가 없었다. 가구마다 레베카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어 원래라면 다 버리고도 남았어야 할 것들이었다.
“알리시아와 옥타비오가 용케 허락했네.”
그녀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문득 이곳에 율리안이 찾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백작저에서 있었던 일 중 가장 좋은 기억이었다.
호박처럼 빛나던 그의 눈동자와 머리 위로 내리쬐던 달빛.
귓불까지 달아오르던 율리안의 얼굴이 생각나서 레베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최근 율리안은 무척이나 바빴다.
보고받은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황제까지 그를 마구잡이로 불러냈다.
마치 요하네스 공작이 자신의 편이 된 걸 과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는 일정이 아무리 빡빡하더라도 아침 식사는 꼭 레베카와 함께 했다.
때문에 크로아는 아침마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녀가 일어났을 때 이미 율리안은 없었다.
레베카를 반긴 건 율리안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아니라 그가 직접 구운 핫케이크뿐이었다.
레베카는 내심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왜 이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