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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26화 (126/232)

126.

그녀가 살아온 기나긴 시간 중에 율리안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레베카의 삶에 뿌리를 내렸다.

가장 깊고 약한 곳까지 침투한 그는 어느새 그녀의 심장까지 침범했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아려왔다.

그는 자신을 치료했고, 동시에 아프게 했다.

마지막에 그를 놓지 못하는 게 어쩌면 자신일지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어 레베카는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윽고 비장한 얼굴을 쳐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율리안을 만나고 싶었다.

레베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침대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모르니까…….”

침대 매트리스를 들자 이전에 숨겨놨던 상자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레베카는 상자를 열어 종이에 싸여 있는 눈부신 금색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종이봉투를 단단히 봉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칸나가 그의 머리카락을 자른 다음 날 저택에 울려 퍼지던 제플린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떠올랐다.

이건 복수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훗날 수가 틀어진다면 이걸 이용해 제플린에게 저주를 걸 수 있을지도 모르지.’

레베카는 매트리스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문을 빼꼼히 열었다.

인기척이 사라질 때를 노리다가 얼른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로비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어갔다.

저 멀리서 마부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율리안에게 자신을 데려다 줄 마부가.

* * *

레베카는 성큼성큼 정원의 샛길을 따라가다 세콰이어 나무 길로 접어들었다.

데본셔가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정문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줄지은 나무들이 불에 타듯이 붉게 물들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그녀의 발에 힘차게 지르밟히는 낙엽들이 비명처럼 바스락 소리를 내질렀다.

요란한 낙엽 소리를 뚫고서 나지막이 레베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

레베카는 목소리의 주인이 제플린인 걸 단숨에 알아차렸지만 애써 못 들은 척하며 더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를 뒤따라오는 넓은 보폭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레베카는 안간힘을 쓰며 달렸지만 제플린이 더 빨랐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레베카의 손목을 낚아채 그녀를 돌려세웠다.

“레베카! 나 좀 봐.”

“이거 놔.”

레베카는 그가 세게 쥐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올려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레베카의 눈빛에 제플린이 움찔하더니 순순히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일전 결혼식장에서 그는 깨달은 바가 많았다.

확실히 레베카는 예전과 달라졌다. 이제 협박이나 완력으론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

제플린은 피로연장에서 꿀이 떨어지듯 레베카를 바라보던 율리안을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그녀를 살살 꼬드겼을 것이다. 율리안의 달콤한 말에 길들었을 테니 그녀가 냉철한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생각해 보면, 노력하긴 했으나 평균적으로 볼 때 자신은 엄격한 남편이었지 그리 상냥한 남편은 아니었다.

이게 다 아버지 자킴 때문이었다.

파비올라에게 애정을 보였던 적이 없었으니 다정한 남편에 대해 자신이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제플린은 그의 무덤까지 찾아가 원망 섞인 발길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회가 밀려오자 제플린은 초조해졌다.

조금 더 상냥하게 굴 것을. 그랬다면 그녀가 율리안 따위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을 텐데.

제플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문 앞에 요하네스가의 마차가 와 있는 걸 보고 네가 온 줄 알았어. 알리시아를 구해줬다면서. 감사를 표하지.”

그는 우아하게 예를 지켜 인사를 건넸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왔다.

레베카는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감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노골적으로 그에게 면박을 줬다.

“그게 정말 감사한 일이라면 당신은 여기서 내게 말을 걸면 안 되지. 당신 아내가 지금 당신의 아이를 낳고 있어. 그런데 냉큼 전 부인을 쫓아와? 부디 이 사실을 알리시아가 모르길 바라.”

“어차피 내가 알리시아의 곁에 있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건 없잖아.”

“넌 정말…….”

레베카는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제플린이 심드렁한 태도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알리시아는 부인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내가 할 일은 그녀가 의무를 다했을 때 제대로 된 상을 주는 것이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시간 낭비야. 출산이 언제 끝날지 알고. 난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마치 하인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무감해 보였다.

새삼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레베카는 질린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제플린은 그녀의 화난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당신이었다면 말이 다르지.”

그는 가을처럼 무르익은 레베카를 찬찬히 살펴봤다.

갓 수확한 꿀처럼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윤기가 흘러내렸다.

보기 좋게 살이 차오른 두 뺨은 인위적이지 않은 그녀 본연의 장밋빛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제플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지금 레베카의 모습은 자신의 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제플린은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제플린은 낮게 속삭이며 레베카에게 바투 다가갔다.

레베카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는 뒷걸음질 쳤다.

제플린은 도망치는 토끼를 발견한 사냥꾼처럼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와 자신 사이의 벌어진 거리를 바라봤다.

“당신이 내 아이를 낳고 있었다면 난 당신의 손을 맞잡고 있었을 거야.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손수 식은땀을 닦아주고 있었겠지. 피비린내도 기꺼이 감수한 채로. 난 아직도 그만큼이나 당신을 아껴.”

“내가 그 말을 듣고 환호성이라도 질러야 하나? 애초에 애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로 날 쫓아낸 건 당신이야.”

“그땐!”

제플린이 높아지려는 언성을 애써 억눌렀다.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잖아.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당신이 꾸며낸 일 아니었나?”

“내가 아픈 건 사실이었어. 도돌이표 같은 이 대화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마지막으로 말할게. 난 당신이 싫어. 당신의 아내였던 세월이 아주 끔찍해! 증오해! 혐오해!”

흩날리는 낙엽 사이로 레베카는 그의 고막을 찢어버릴 듯이 소리쳤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쏘아붙였다.

“당신이 그랬잖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지 그래. 내 인내심이 바닥나서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여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을 마친 레베카는 마지막으로 그를 노려보고 쌀쌀맞게 등을 돌렸다.

상냥한 미소를 꾸미고 있던 제플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어째서 한 번도 가르친 적 없는 말을 자꾸만 내뱉는 걸까.

저건 분명히 진심이 아닐 것이다.

진심일 리가 없다고 제플린은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뇌까렸다.

“어떻게 하면!”

제플린의 고통에 찬 목소리에도 레베카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문득 기억을 잃었던 그때, 심연 속에서 자신을 외면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제플린은 멀어지는 레베카를 향해 다시금 소리쳤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와 줄 거야!”

그의 간절한 마음이 닿았던 걸까.

레베카가 드디어 멈춰 섰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겨우 보이는 정도의 거리까지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단호한 외침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의 귀에 제대로 박혀 들었다.

“절대 그럴 리 없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제플린은 정문을 통과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새끼가 모든 걸 잃었을 때도 그런 소리를 하는지 두고 보지.”

제플린은 레베카를 실은 마차가 떠나는 것까지 부득불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둘러보았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완벽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 달라졌다.

한참 부족했다.

그는 예전에 요하네스 공작 성에 방문했던 때를 떠올렸다.

차원이 다른 웅장함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 레베카가 지금 거머쥐고 있는 것은 그런 황홀한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이 하찮은 데본셔 백작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다 뒤엎자. 공작 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훌륭한 곳으로 다시 만들자.

그래서 레베카가 자신의 품으로 뛰어 들어올 수 있도록.

제플린은 레베카가 후회하며 자신의 발아래 매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거지꼴이 된 율리안이 망연하게 자신과 레베카의 다정한 한때를 바라보는 모습까지 그려봤다.

그의 입꼬리가 찬찬히 올라갔다.

그는 백작저를 재건할 계획을 잡으며 저택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 * *

율리안이 숨을 죽이며 레베카의 머리맡에 핫케이크 접시를 두었다.

부드러운 버터와 달짝지근한 메이플 시럽 냄새가 그녀의 단잠을 깨울까 봐 접시 위에 은색 돔 커버를 덮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방장에게 일일이 자신의 입맛을 설명하는 게 귀찮아 한두 번씩 음식을 만들던 게 어느새 취미가 되었다.

그리 쓸모 있는 취미라 여긴 적은 없었는데 자신의 요리를 기쁘게 먹는 레베카를 보니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레베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으음…….”

입맞춤에 레베카가 뒤척이자 그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율리안은 최근 유모가 모아둔 소설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제 컬렉션을요?’

처음에 유모는 한정판이다, 절판된 책이다, 라는 핑계를 대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크로아가 뭐라고 속삭이자 꺼림칙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에게 책을 빌려줬다.

‘이건 한정판이에요. 책을 완전히 펼치시면 안 됩니다!’

‘공작님! 장갑을 끼고 보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그건! 읽지 마세요! 세상에나, 크로아 체니스터 씨에게 이 빚은 톡톡히 받을 거라 전해주세요.’

책 한 권에 유난인 것 같다 싶다가도, 이게 조세핀의 유일한 낙이라는 소리에 그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최근 들어 그는 고용인들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도 새겨듣기 시작했다.

그는 레베카가 공작 성의 고용인을 대하는 모습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봤다.

그녀는 강압적이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러자 고용인들이 삽시간에 그녀를 따랐다.

율리안은 고용인들은 태생부터 지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본연의 모습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레베카가 온 뒤로 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릴리도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성안을 쏘다니곤 했다.

분명히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공작 성의 작은 먼지까지 그대로였다.

하지만 레베카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냉기가 흐르던 공작 성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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