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마치…… 오벨리아가 같군.’
완벽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멀리서 보면 화목한 집안이란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어설프게나마 레베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자신이 친절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고용인들이 더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다 보면 적어도 두려워하진 않겠지 하는 미약한 희망이 샘솟았다.
그는 콧수염을 붙이고 원통형의 검은색 모자를 꾹 눌러썼다.
모노클까지 착용하자 그는 나이가 지긋한 중장년의 남성처럼 보였다.
율리안은 조용히 침실 문을 닫고 나갔다.
문 앞에는 그와 비슷하게 변장한 크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아침의 경매장은 오후에 비해 비교적 한산했다.
관심을 끌 만한 경매는 오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아침에 내놓는 상품은 대부분 인기가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른 아침부터 경매장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경매사는 입찰자들의 열기에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야만 했다.
“1,200골드.”
“1,300골드!”
파블로 자작이 여유롭게 상한가를 외치자, 타니샤가 도끼눈을 쳐들고 그를 노려봤다.
둘 사이에서 마치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타니샤와 파블로 이외에 폐광산을 사러 온 두 명의 사내들은 어느새 입찰 따위는 잊어버렸다.
그 대신 타니샤와 파블로의 공방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앳돼 보이는 소녀와 노련한 자작의 싸움이 꽤 볼만했다.
“계속 그렇게 나오신단 말씀이시죠? 그럼 1,800골드를 외칠 수밖에 없군요. 경매사님, 1,800골드입니다!”
“예. 1,800골드 나왔습니다. 1,800골드 이상 없으십니까?”
갑작스런 그녀의 선언에 파블로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한 신음을 냈다.
파블로는 타니샤에게 된통 당한 이유로 타니샤 상회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봤다.
상회는 타마라 무당벌레처럼 가치도 없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처음에 파블로는 그녀의 어이없는 투자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사들인 물건의 가격이 어김없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타니샤 상회가 엄청난 이윤을 남긴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파블로 자작은 배가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뒷배가 요하네스 공작이니 그 정도는 한다는 건가…….’
타니샤 체니스터의 정보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체니스터는 오랜 세월 요하네스 공작가의 가신으로 자리 잡았던 가문이었다.
그녀가 요하네스 공작가에서 독립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파블로는 완전히 믿지 않았다.
요하네스 공작이 뒤에 있지 않았다면 자그마한 상회가 그런 엄청난 자금을 유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플린의 가신으로 살면서 그는 여태껏 자신이 줄을 잘 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타니샤를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가을 무도회 사건 이후로 데본셔가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았다.
새로운 휴양 섬 개발로 돈이 천문학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가을 무도회 때 투자자를 얻지 못해 현재 데본셔 백작가는 심각한 적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플린은 저택을 다 뜯어고치는 대공사를 감행하기까지 했다.
그 여파는 여러 사업체를 맡은 가신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데본셔가의 과한 착복에 가신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블로도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데본셔가가 무너졌다고 보기에는 조금 일렀지만 머지않아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너지고 있는 성안에 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는 얼른 발을 빼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깊게 들어온 탓에 쉽지 않았다.
그리고 배신했을 때 제플린의 보복도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악착같이 타니샤 상회를 따라다녔다.
먼저 정보를 얻어 그들이 사려는 물품을 발 빠르게 낚아챈 적도 있었다.
덕분에 그는 요즘 쏠쏠하게 이익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타니샤가 직접 경매장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파블로는 오늘 경매에 나올 물품이 대단한 물건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맥 빠지게도 타니샤가 관심을 보인 물건은 100골드도 아까운 폐광산이었다.
원래는 석탄 광산이었는데 그 씨가 말라 몇십 년간 방치되다시피 한 곳이었다.
“1,800골드가 없으시면 이걸로…….”
경매사가 의사봉을 내리치려는 순간 파블로가 외쳤다.
“2,000골드!”
파블로는 그의 비상금을 탈탈 털어낸 액수를 불렀다.
속이 쓰리긴 했으나 타니샤가 저렇게 열을 올리는 걸 보니 분명 폐광산엔 어마어마한 값어치의 물건이 묻혀 있는 게 분명했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와. 저 아저씨 아주 미쳐버린 거 아니야?’
타니샤가 예상한 폐광산의 가격은 끽해야 200골드 안팎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파블로 자작이 등장하고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수월할 거라 생각했던 경매가 예상보다 치열해진 것이다.
파블로 자작이 아무리 성공한 사업가라 해도 그는 데본셔가의 하수인일 뿐.
그의 주머니 사정이야 빤했다.
그런데 그는 중소 사업체의 한 달 예산을 웃도는 금액을 냅다 불렀다.
‘어디 숨겨둔 돈이라도 있나.’
하기야 사사건건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용돈을 좀 벌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이건 레베카가 꼭 사라고 한 광산이었다.
혹시나 싶어 은밀히 조사해 본 결과, 놀라울 만큼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최근 카리바나 왕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여기저기서 무기를 사들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2,000골드는 좀 센데…….’
타니샤는 지금 당장 굴릴 수 있는 현금을 셈해봤다.
3,000골드 언저리는 됐지만 내일 매입할 물건값을 치르려면 조금 빠듯했다.
요하네스 공작에게 손을 벌리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건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다.
타니샤는 끙끙거리다가 결국 마지못해 자신의 금고를 털기로 했다.
“2,100…….”
타니샤가 호기롭게 외치려는 순간, 파블로가 먼저 선수를 쳤다.
“2,500!”
그의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제 다음 달 생활비까지 끌어다 썼다. 정말 모든 걸 바친 셈이었다.
저 광산에 대박이 날 만한 게 묻혀 있지 않다면 자신은 파산이나 다름없었다.
억지인 걸 알았으나 마치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 판돈을 올리는 것처럼 파블로는 멈출 수 없었다.
제가 부른 금액에 얼굴이 뻣뻣해지는 타니샤를 보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가 승리를 예감하고 있을 무렵,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3,000골드.”
느닷없는 신사가 등장해 있을 수 없는 금액을 불렀다.
놀란 경매사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간 의사봉이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졌다.
“더 부르실 사람이 있으신가?”
신사가 콧수염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웃었다.
장대한 기골의 그는 신흥 졸부라도 되는지 발이 넓은 파블로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또 무슨 똥파리가 들러붙어서…….’
타니샤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획 돌려 신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신사보다 그 뒤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그의 동행자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동행자는 아무도 모르게 타니샤에게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옛날부터 변장하는 일이 잦았던 남매가 서로를 확인하는 표식이었다.
그렇다면 저 거대한 사람은…….
“더 부를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얼른 낙찰해 주시게.”
율리안이 대뜸 소리쳤다.
파블로는 얼른 타니샤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한 게 그녀도 이 정도의 자금은 없는 성싶었다.
혼자 깊은 오해를 하곤 파블로는 입을 다물었다.
타니샤에게 넘어갈 바에 저 이름 모를 신사가 가져가는 게 나았다.
게다가 경쟁심에 가출해 있던 그의 이성이 차차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2,500골드를 저깟 폐광산에 가져다 부으려고 하다니 자신이 잠시 미쳤던 게 틀림없었다.
“아…… 예, 예! 그럼 아우젠의 폐광산은 3,000골드를 불러주신 신사분께 낙찰되었습니다!”
경매사가 얼른 바닥에서 의사봉을 주워들고 세 번 내리쳤다.
땅- 땅- 땅-
경쾌한 나무망치 소리가 경매장 안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다음 물품을 준비하기 위해 경매장 안이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율리안은 쇼케이스에 담겨 들어오는 은색 권총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그런 그를 흘깃 훔쳐본 파블로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잔뜩 비웃음을 머금고 타니샤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마음대로 안 됐군? 세상만사가 그리 편히 흘러가는 건 아니란다. 꼬맹아.”
“꺼져.”
살기 어린 타니샤의 말투에 파블로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꼬마라고 부르기에 그녀는 다소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블로는 제가 그녀의 기세에 잠시 겁을 먹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이내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파블로가 나가는 걸 확인한 타니샤는 율리안과 크로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왜 참견하셨습니까?”
크로아는 감히 공작님께 눈을 홉뜨고 있는 여동생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어릴 때부터 수재 소리만 듣고 자란 그녀는 지는 것과 참견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이유는 짐작할 수 없겠지만 옛날부터 그녀는 율리안을 매우 싫어했다.
크로아가 이를 앙다문 채로 말했다.
“타, 타니샤. 공작님께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어투를 좀 더 공손하게 해야지?”
타니샤는 율리안 옆에 찰싹 붙어서 쩔쩔매고 있는 크로아를 흘깃 바라봤다.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타니샤가 가족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던 어린 시절, 그 사랑은 전부 율리안이 독식했다.
분명 자신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물론이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오빠까지 고아가 된 율리안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때문에 타니샤는 모든 걸 혼자 헤쳐나가야 했다.
기저귀를 떼는 것부터 시작해 글자를 익히고 말을 구사하는 것까지 타니샤는 홀로 해냈다.
가족들은 마치 자신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율리안의 생일과 아카데미 졸업식이 겹쳐지면 가족들은 당연하다는 듯 공작저로 몰려갔다.
그리고 타니샤의 졸업식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고용인이 참석했다.
그래도 타니샤는 백번 정도 양보해서 가족의 행동을 이해하기로 했다.
요하네스 공작가를 섬기는 건 가문의 업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건 율리안의 태도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건 불쌍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가족을 막 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리 주인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타니샤는 제 부모의 호의를 가볍게 무시하는 율리안에게 분개했다.
그리고 그녀가 공작의 수행원으로 일을 시작한 후에도 율리안을 향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구박받는 크로아를 볼 때마다 그를 향한 분노가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