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율리안이 멋쩍게 제 목을 쓸어내렸다. 그의 볼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몸을…… 태우고 있었어.”
“몸을 태운다고? 왜?”
레베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는 로탄더스 제국에서 선호하는 피부색이었다.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노동계급을 상징했기에 다들 천하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몸을 태운다는 건 상식 이외의 것이었다.
때문에 레베카는 율리안의 초콜릿 같은 피부색이 타고난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고 보니 율리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초상화에서 그는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몸을 태운 게 맞다는 건데…….
레베카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율리안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신성해 보일까 봐.”
율리안은 발치에 있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발로 툭툭 찼다.
“천사처럼 굽실거리던 아버지와 달리 위협적으로 굴면 날 요하네스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의 기다란 속눈썹 밑으로 드리워진 그늘에 레베카는 숨을 삼켰다.
“사람들이 날 질책하기 시작하면 신전도 두 손 두 발 들고 날 버릴 줄 알았거든. 하지만…….”
율리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오히려 신선한 이미지라고 좋아하더군. 역효과만 났어. 이젠 까만 피부가 익숙해져서 습관처럼 여길 찾고는 해. 우스운 이야기지?”
그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슬퍼보였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아니. 하나도 안 우스워. 살려고 발버둥 친 거잖아.”
율리안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반달로 휘어졌다.
그의 눈빛에 어려 있던 슬픈 기색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는 제 뺨을 감싸고 있는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군.”
뜨끈한 찻물을 부은 것처럼 뭉근하게 가슴이 따스해졌다.
위로를 받았다는 건 율리안인데 레베카는 어쩐지 자신이 위로받은 느낌이 들었다.
제플린의 칼날 같던 말들은 레베카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역시 그를 찾아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아침에 안 보이던데 어딜 갔다 온 거야?”
“아. 조금 성가신 놈을 처리하려고 갔다 왔어.”
율리안은 경매장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레베카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파블로 자작이라니. 꽤 거물이 우리 쪽으로 붙었구나. 그가 셈에 밝은 인간이라서 다행이야. 물론 그가 가신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 도구를 얻은 셈이야.”
“당신이 그렇다니 좋은 일인 거겠지. 그래도 일단 당장은 지켜보려고 해.”
“좋은 생각이야. 이리저리 붙어먹는 자를 쉽게 믿을 수는 없지.”
“아. 그렇지. 간 김에 선물을 가져왔어.”
“선물?”
“응.”
율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긴 다리에 레베카는 한참 고개를 올려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선물을 빨리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로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연무장으로 가자.”
레베카는 망설임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 * *
레베카는 기사들이 훈련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갔다.
아무리 바지를 여러 번 입었어도 아직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했다.
레베카는 어기적거리며 연무장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레베카가 단련을 요청한 이후로 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연무장에서 훈련을 했다.
아직 실전에 쓸 만한 기술보다는 체력 증진에 가까운 활동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거 말고 좀 더 쓸 만한 걸 가르쳐 주면 안 돼? 주먹질이라든가 발차기 같은…….’
연무장을 열 바퀴 정도 뛰고 난 뒤 레베카가 볼멘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율리안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불만을 일축했다.
‘이 정도 뛰고 헥헥거리면서 무슨 소리야. 당신은 근육부터 만들 필요가 있어. 섣부르게 주먹질을 해대다가 그 나뭇가지 같은 팔목이 똑하고 부러져 버릴걸.’
“오늘도 달리기나 시키려나.”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며 신나게 검을 휘두르는 릴리를 잠시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초보자인 자신이 보아도 릴리의 실력은 엄청났다.
그녀는 저보다 몇 배는 더 큰 기사와 대등하게 겨루고 있었다.
릴리는 레베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대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릴리의 동그란 이마를 정신없이 구경하는 레베카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았다.
“여기 있었군.”
율리안은 릴리를 잠시 흐뭇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러곤 이내 레베카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나도 릴리를 지켜보고 싶지만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율리안이 레베카를 이끌고 간 곳은 사격장이었다.
레베카가 줄지어 서 있는 나무 과녁판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사격장? 여기는 왜?”
“그걸 가져와.”
율리안이 하인에게 손짓하자 그가 고풍스런 나무 상자를 가지고 왔다.
“이게 내 선물이야.”
하인이 레베카를 향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화려한 장미꽃이 음각된 은색 총이 레베카를 향해 빛을 뿜었다.
레베카는 서투르게 총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꽤 묵직한 무게감에 손목이 휘청였다.
“예쁘긴 한데……. 내가 이걸 쓸 수 있을까? 많이 무거워.”
“거기 튀어나온 꽃잎 보이지? 그걸 눌러 봐.”
율리안이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가리켰다. 레베카가 그의 말대로 버튼을 누르자 총의 무게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가벼워졌어!”
레베카는 신이 나서 총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 같아 율리안은 얼결에 웃음을 흘렸다.
“무거울 때보다는 위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이 편이 당신에겐 더 좋을 거야. 버튼을 한 번 더 눌러봐.”
레베카가 또다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총이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줄어들었다.
“귀엽다!”
“다시 한번 더 누르면 원래 크기대로 돌아와.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되고 허벅지에 홀스터를 달아서 치마 안에 숨기고 다닐 수도 있어. 아, 오해는 하지 마, 내 취향이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엄청 살벌한 선물이네.”
“당신이 누군가를 제압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말이지. 나는 그대를 잃는 것보다 차라리 누구 하나 죽는 게 났다고 생각하거든.”
다소 섬뜩한 어투였다.
그의 서늘한 말투에 레베카는 흠칫하며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당신이 누굴 죽이는 걸 반길 것 같진 않군. 그래서 여기엔 마비 독을 넣은 탄환을 넣을 거야. 그럼 눈앞의 위험은 피할 수 있겠지.”
레베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그가 다시 예리하게 눈매를 치켜올렸다.
“하지만 약실의 세 번째 칸부터는 실탄을 넣어 둘 거야. 당신이 두 번이나 그 총을 쐈다는 건 죽어 마땅한 악질이라는 뜻이니까.”
“알았어. 최대한 두 번 이상 쏘는 일은 없도록 할게.”
“아니. 레베카.”
율리안은 총을 다시 원래의 크기로 되돌리는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뒷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면 망설이지 말고 쏴. 당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은 없어.”
‘아니. 그런 사람이 있어.’
레베카는 단호하게 굳어 있는 율리안의 눈매를 보며 낯빛을 흐렸다.
“그럼 이제 연습을 해볼까.”
하인이 눈치껏 연습용 총을 가져왔다. 율리안이 선물해준 총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자, 여기를 이렇게 쥐고…….”
율리안은 레베카의 등 뒤에서 총을 들고 있는 그녀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졸지에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등 뒤에 밀착된 탄탄한 몸에 불현듯 아까 보았던 그의 조각 같은 나신이 떠올랐다.
아랫배가 홧홧하게 타오르는 느낌이 들어 레베카는 최대한 그와 닿지 않기 위해 몸을 앞으로 뺐다.
“허리를 그렇게 구부리면 안 돼.”
하지만 율리안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허리에 붙였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레베카에게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미치겠네.’
율리안과 맞닿은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레베카와 달리 율리안은 딱히 불편한 기색조차 없어 보였다.
오히려 레베카의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며 질책하기까지 했다.
‘자제력이 타고난 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율리안의 말대로 자신이 조금 밝히는 편일지도.
“레베카, 집중해야지. 좋아. 그 자세로 방아쇠를 당겨봐.”
탕-!
대기하던 하인이 종종걸음으로 과녁판을 가지고 율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총알은 과녁을 보기 좋게 벗어나 밋밋한 여백에 박혀 있었다.
과녁을 유심히 살펴보는 율리안에게 레베카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형편없지? 역시. 그만두는 게…….”
“아니. 처음 치고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야. 다시 한번 해보자. 이번에도 내가 자세를 잡아주지.”
빠져나갈 틈도 없이 율리안은 다시 그녀를 제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덕에 레베카는 가족의 이름을 되뇌며 사정없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율리안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정말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아?”
“뭐가? 설마 벌써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레베카는 율리안의 말간 눈을 들여다보곤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됐다. 됐어. 연습이나 계속해.”
레베카는 체념하고는 과녁의 정중앙으로 시선을 향했다.
심통이 느껴지는 레베카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율리안의 왼쪽 광대뼈가 씰룩였다.
그는 귓바퀴가 발그레해진 채로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 * *
“바리니카가 도주하는 것에 요하네스 공작이 관여했다……?”
“예. 맞습니다. 항구에서 바리니카를 배웅하는 공작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확실한 정보인가?”
“예. 로브로 얼굴을 가렸다고는 했으나 쉽게 볼 수 없는 몸집이라 유심히 봤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두 명 정도의 목격자가 더 있었습니다.”
“아주 쓸 만한 정보군. 수고했어, 베이츠. 바리니카의 행방을 계속 찾아봐.”
“예. 알겠습니다.”
베이츠가 말없이 제플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플린은 그의 무감한 얼굴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베이츠는 제플린의 첫 번째 사냥개였다.
제플린이 아홉 살이 되던 해, 그는 자신의 돈주머니를 소매치기하는 베이츠를 붙잡았다.
‘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었어. 그러니 이제부터 내게 충성하도록 해.’
그는 베이츠를 죽이는 대신 그를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