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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31화 (131/232)

131.

그 후, 베이츠는 제플린의 기대에 부응하듯 훌륭한 사냥개로 자라났다.

사람을 죽이라 하면 죽였고, 저택에 불을 지르라면 질렀다.

납치나 고문 그 어떤 악랄한 짓을 명해도 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을 수행했다.

그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기계 같았다.

제플린은 그런 베이츠에 흡족해하며, 그를 모든 사냥개의 귀감으로 삼았다.

제플린은 베이츠에게 한미한 귀족 자리를 사주곤 그를 데본셔가의 기사단장으로 임명했다.

신분 상승에도 불구하고 베이츠는 기뻐하는 구석조차 없었다.

제때 밥이 나오고 잠자리만 제공된다면 그는 어떤 상도 바라지 않았다.

‘제가 빚진 목숨값을 갚는 것뿐입니다.’

그는 우직하게 제플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대부분의 사냥개가 옥타비오의 수중에 떨어진 지금 베이츠는 제플린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플린은 손깍지를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내가 부탁한 건?”

“여기 있습니다.”

베이츠는 줄곧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제플린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제플린은 상자 안에서 목도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확실한 물건이겠지?”

“네. 인질들을 특정할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베이츠의 말에 제플린은 비릿하게 웃으며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지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목도리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갈기갈기 찢어진 목도리를 책상 위로 던져놓았다.

“이런 식으로 모든 물건을 망가뜨려 놔. 그리고 사냥개들에게 가져다주도록.”

베이츠는 순간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플린은 지칼의 날을 손으로 튕기면서 무감하게 말했다.

“누가 진짜 제 주인인지 알려줘야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나가서 옥타비오를 불러와.”

제플린의 명이 떨어지자 베이츠가 상자를 들고 순순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

“베이츠. 오랜만이야. 요즘 도통 얼굴을 볼 수 없던데,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로드리고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백작님의 명을 수행했다.”

베이츠는 딱딱하게 내뱉곤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금은 살갑게 대해도 되잖아.”

로드리고가 그의 어깨에 팔을 놀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베이츠는 대꾸 없이 그의 팔을 뿌리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로드리고는 그에 굴하지 않고 베이츠가 들고 있는 커다란 상자를 흘깃거리며 말을 붙였다.

“그건 뭐야? 새로운 지령인가?”

“신경 꺼, 로드리고.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지? 꼭 정보를 캐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날카로운 질문에 로드리고는 한 발짝 물러서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잖아. 나 참, 알겠어. 이제 관심 끌 테니 그만 노려봐.”

푸른 안광을 번뜩이던 베이츠는 그제야 그를 향한 눈길을 거두었다.

그대로 발을 돌리려던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상자를 뒤적였다. 그러고는 백작이 난도질한 빨간 목도리를 로드리고에게 던졌다.

“어차피 줘야 할 물건이니 만난 김에 가져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붉은 천을 들고 로드리고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뭔데?”

“제 어미의 물건도 못 알아보고. 불효자네.”

웃는 낯을 유지하던 로드리고의 얼굴이 단숨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천의 일부분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로드리고가 망설임 없이 베이츠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 개자식아!”

베이츠는 가볍게 그의 주먹을 피하며 코웃음을 쳤다.

“우린 개자식 맞잖아. 새삼스럽게.”

“웃어? 넌 지금 이게 재밌나 보지? 이 쓰레기 같은 놈.”

“재밌지는 않아. 다만 부모가 잡혀 있는 상황에서 능글맞게 웃음을 흘릴 틈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지.”

베이츠의 빈정거리는 말에 로드리고는 붉은 천을 손에 들고서 눈을 치켜떴다.

그는 한 번 더 그의 면상을 갈길까 생각하다가 이내 비뚜름하게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아아, 넌 부모가 없어서 이런 감정을 모르겠구나.”

제 갈 길을 가던 베이츠가 멈칫하며 로드리고를 돌아봤다.

로드리고가 주먹을 꽉 쥔 채로 히죽거렸다.

“가족 간의 사랑 같은 거 받은 적 없는 비렁뱅이가 우리들의 입장을 어떻게 알겠어. 내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지.”

이런 식은 비아냥은 줄곧 들어왔다.

베이츠는 귀를 털고서 로드리고를 향한 관심을 끊었다.

“그래. 몸도 팔고 마음도 팔고 다 팔아라. 혹시 알아? 네 부모도 너와 같은…….”

멀어져 가는 베이츠의 뒤통수에다 대고 마음껏 지껄이던 로드리고의 입이 돌아갔다.

베이츠의 묵직한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죽어서도 그 입을 나불거릴 수 있을지 궁금하군.”

베이츠는 차갑게 그를 내려다봤다.

로드리고는 입 안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뱉어냈다.

데본셔가의 기사단장인 그를 무력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드리고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저를 때려눕히고 앞으로 걸어가는 그를 다시 붙잡진 않았다.

‘대신 이걸 얻었지.’

로드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맞은 순간 낚아챘던 물건을 들어 올렸다.

베이츠가 어느 순간부터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로켓이었다.

“뭐가 들었기에 그렇게 소중히 여긴 거지?”

로드리고는 로켓을 열었다.

로켓 안에는 자그마한 나무 조각 위에 그려진 어느 여인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베이츠가 평범한 이였다면 연인의 초상화겠구나 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베이츠는 연정 따위를 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로드리고는 유심히 로켓을 살폈다.

초상화만 들어 있다고 하기엔 보통의 로켓보다 두께가 두꺼웠다.

로드리고는 직감적으로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로켓을 귀에다 대고서 초상화를 두들겼다. 귀를 기울이자 안이 텅 비어 있는 소리가 났다.

‘역시…….’

로드리고는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가 로켓을 분해했다.

곧이어 초상화 뒤편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드러났다.

비밀의 정체를 확인한 로드리고가 눈을 한껏 찌푸렸다.

“이건, 실인가? 아니야……. 머리카락이야.”

로켓 안쪽에 머리카락 한 뭉치가 자그맣게 말려 들어가 있었다.

“취향 한번 섬뜩하군. 누가 제플린의 충신 아니랄까 봐.”

머리카락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던 로드리고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흰색이 아니라 연보라색이잖아?”

초상화 속의 여인은 백발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의 주인 또한 그녀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로드리고가 알기론 연보라색 머리는 제국에서 흔한 머리색이 아니었다.

이국의 피가 섞여 있어야 하고, 유전적으로 전승될 확률이 적은 색이었다. 때문에 연보라색 머리를 가진 사람을 수집하는 변태도 있다고 들었는데…….

문득 기가 막힌 가설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로드리고는 환희에 가까운 너털웃음을 흘렀다.

“하! 이 새끼 이거…….”

로드리고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리고 로켓 안에 머리카락을 다시 넣고 로켓을 조립했다.

“레베카 님께서 참 좋아하시겠군.”

그는 처참하게 망가진 어머니의 목도리를 떠올리며 이를 아득 깨물었다.

‘뭐든지 좋아. 백작저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보를 가져다줘.’

처음 레베카의 편이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로드리고는 그녀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베카가 자력으로 이 지옥을 탈출하자 로드리고의 미약한 믿음은 강물처럼 불어났다.

짤막한 쪽지를 쓴 그는 로켓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로드리고는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늘어진 담쟁이넝쿨을 거둬내고 담장의 벽돌을 빼내었다.

그리고 그곳에 로켓과 쪽지를 넣었다.

사냥개들이 자신의 방을 쉽게 뒤질 수 있었기에 로드리고는 은밀한 물건을 이 비밀 장소에 보관하곤 했다.

때가 되면 레베카가 부탁한 물건들과 함께 이걸 공작 성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어머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로드리고는 시린 눈을 벅벅 문지르며 냉기가 흐르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 * *

베이츠의 전언을 받은 옥타비오는 서재로 향했다.

그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베이츠의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했다.

저 상자는 자신이 명령한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백작님께서 은밀히 원하신 겁니다.’

베이츠는 그 상자의 정체를 끝내 옥타비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냥개들과 달리 순수하게 제플린에게 충성하는 자였다.

지금까지 제플린과 자신의 의견이 다른 적이 없었기에 그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자신과 제플린의 사이가 조금씩 어그러지고 있었다.

제플린이 그렇게 혐오하던 카지노를 들락거리는 것과 자주 저택을 비우는 걸 보면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제플린은 여전히 기억을 잃은 척을 했고, 베이츠는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게다가 알리시아나 고용인들을 향하던 그의 발작 같은 신경질이 이제 자신을 향하기 시작했다.

제플린은 가끔 제멋대로 굴기는 했지만 항상 옥타비오의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제플린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모래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간 쌓아온 모래성이 무너질 것 같아 불안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사냥개 관리를 베이츠에게 맡기기로 했어.”

“지금 뭐라고……?”

옥타비오의 콧잔등에 짙게 주름이 졌다.

저 애송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이제 귀까지 제대로 안 들리나 보군.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해주지. 이제 사냥개에게서 손 떼.”

“하!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바람과 달리 나는 아주 멀쩡해.”

옥타비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뭔가 이상했다.

제플린은 지금껏 자신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감정을 분출해내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투정과 짜증을 넘어선 격렬한 감정이었다.

‘나를…… 적대해?’

옥타비오는 제플린을 잘 알았다.

그가 걸음마를 뗄 때부터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첫 살인을 저질렀을 때까지 옥타비오는 그의 곁에 있었다.

제플린이 어떤 걸 싫어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속속들이 알았다.

그의 길게 뻗은 속눈썹 한 올만 파르르거려도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옥타비오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제플린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거운 돌덩이가 제 머리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옥타비오는 여유롭게 웃었다.

어차피 제가 손수 입히고 먹이고 가르친 아이였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제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변수 정도는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옥타비오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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