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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32화 (132/232)

132.

“기억이 돌아오셨나 보군요.”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당신과 알리시아가 벌였던 그 가증스러운 쇼까지 기억나지 뭐야.”

“쇼라니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에게 끔찍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진실을 알려드렸더라면 백작님은 분명 기절하시고 말았을 겁니다.”

제플린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옥타비오는 물 흘러가듯 혀를 놀렸다.

“요즘 제법 기억을 찾으신 것 같아 진실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리 먼저 기억을 되찾으셨다니 역시 영특하십니다.”

“푸핫.”

“왜…… 웃으십니까?”

“내가 그동안 그딴 말에 놀아났다는 게 웃겨서 말이야. 정말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군.”

“그게 무슨…….”

제플린이 종이 꾸러미 하나를 책상 위로 내던졌다.

“그 안에 든 건 잘 알겠지?”

옥타비오는 의아한 얼굴로 책상 앞으로 다가와 종이 꾸러미를 펼쳤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무슨 약초 같은데…….”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럼 내가 직접 읊어줘야겠지.”

제플린은 단도를 치켜들더니 종이 꾸러미 위로 내다 꽂았다.

날카로운 칼날에 종이가 찢기며 단단한 책상에 흠집이 났다.

그는 말린 식물들을 하나하나 칼로 내리찍으며 이름을 읊었다.

“이건 등살이 풀, 그리고 이건 귀머거리 풀, 이건 망령의 속삭임이라는 꽃이었지, 아마?”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당신이 내 방에서 매일 밤 피웠던 향초에 들어 있던 것들이야. 이걸 조합하면 서서히 기억을 잃고 제 이름도 쓸 수 없는 백치가 된다고 하더군.”

“억측입니다. 아니면 모함이거나요. 저는 좋은 것만 당신에게 드리는 걸 알잖습니까!”

“닥쳐! 나를 위해 그랬다고? 웃기지 마. 그 결과가 고작 이거야? 당신이 내게 한 짓을 봐. 레베카가 나를 떠났어. 알리시아가 딸이 아니라 아들을 낳았고. 내 왕국이…… 내 꿈이 무너져 버렸잖아!”

책상을 박차고 뛰쳐나간 제플린이 곧바로 옥타비오의 목에 단검을 겨누었다.

옥타비오는 미동도 없이 제 목에 닿는 날붙이를 서늘하게 노려봤다.

제플린이 증오로 범벅된 눈을 치켜들며 그에게 말했다.

“네 이름이 뭐지?”

“그건 왜 물으십니까.”

“이제 이런 간단한 질문에도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옥타비오입니다.”

“아니지. 제대로 말해.”

“옥타비오…… 리멘.”

“그래. 너는 리멘이야.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왔는지 모를 하찮은 리멘. 그동안 내가 유하게 군 탓에 당신의 위치를 잊어버린 것 같아 친히 알려줄게. 넌 내 아버지가 사들인 발닦개일 뿐이야. 데본셔의 주인이 아니라 비천한 하인이라고.”

평정을 유지하던 옥타비오의 이성의 끈이 끊어질 듯 요동쳤다.

그의 귓가에 환청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타비오. 우린 함께 할 수 없어.’

자신이 파비올라를 잃었던,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던 그날.

제플린은 그때의 그녀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드높은 창공 같던 하늘빛 눈동자.

무감하게 자신을 떠나던, 쓰레기처럼 자신을 버렸던 그때의 그 눈빛.

옥타비오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피로 물든 천을 발견한 황소처럼 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옥타비오는 제플린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만 가지의 방법을 떠올렸다.

그는 손톱을 바짝 세우며 끔찍한 상상을 이어갔다.

그를 죽이고 자신도 단두대에 목을 내걸면 파비올라가 절망할까.

그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암사슴의 목처럼 뽀얗게 빛나는 제플린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플린의 완력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 하더라도 그처럼 마른 녀석 하나쯤은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일 수도 있었다.

“이제야 내가 겁이 나나?”

하지만 옥타비오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제플린은 어른을 이겨 먹으려는 영악한 꼬마처럼 웃고 있었다.

그래, 그는 꼬마일 뿐이다.

‘옛날과 지금은 다르다.’

힘이 있는데 자신이 왜 죽는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을 회자하곤 마음을 다잡았다.

‘너무 오랫동안 보모 역할을 하긴 했지.’

옥타비오는 드러냈던 발톱을 다시 숨겼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충직한 하인입니다. 사냥개의 수장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셨지요? 백작님의 명이시니 따르겠습니다.”

말은 마친 그는 순순히 사냥개의 수장을 의미하는 브로치를 떼어냈다.

제플린은 그에게 겨누었던 칼을 거둬들이고 그의 손에 들린 브로치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그가 쉽게 제 명을 따를 것이란 건 제플린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제게 또 다른 볼일은 없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옥타비오는 인사를 꾸벅하고는 서재의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마다 진득한 암흑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문고리를 돌리기 전 옥타비오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제플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알리시아 마님께 한번은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후계자를 낳으셨습니다.”

“누가 후계자야. 난 인정한 적 없어.”

“당신을 아주 빼다 박은 아들입니다. 아이들은 금방 크지요. 나중에 후회하셔도 늦습니다.”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긴 뒤 문을 열고 나갔다.

* * *

오랜 산고 끝에 아이가 첫 울음을 터뜨렸다. 혼절할 것 같은 정신을 겨우 붙들고 알리시아가 물었다.

“따…… 딸이야?”

산파가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백작 부인! 건강한 아드님이셔요.”

“아아…….”

그리고 알리시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을 때 커다란 손이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몽롱한 정신에도 제플린인가 싶어 잠시 기뻤지만 이내 그의 손이 지나치게 거칠다는 사실에 그녀는 실망했다.

눈을 떠서 그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꺼풀이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듯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끌어 올리고 베개를 똑바로 놓았다.

마치 아이의 잠자리를 살피는 것 같은 다정한 손길에 알리시아는 긴장을 놓았다.

꿈이 분명했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 저택에서 자신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천사…… 일까.’

알리시아는 어릴 적 읽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사랑스러운 아기가 태어나면 주변의 천사들이 몰려와 아기를 구경한다는 내용이었다.

구경하러 온 천사들은 아기에게 온갖 축복을 내린다고 했다.

알리시아는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천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닮은 아기라면 분명 사랑스러울 테니.

그녀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천사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알리시아가 누워 있는 침대를 떠나 요람이 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간의 침묵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서…….”

천사의 목소리치곤 지나치게 굵었다.

알리시아는 몽롱한 정신으로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 이름이 아서였으면 좋겠어. 희망이라는 뜻의 좋은 이름이야.”

이윽고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단 한층 더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난 뒤 알리시아는 다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 * *

몇 시간 뒤 깨어난 알리시아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천사가 다녀간 방답지 않게 이곳엔 지독한 암흑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다.

잠기운이 서서히 가시자 잔인한 현실이 시리게 와 닿았다.

“어째서…….”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제플린은 딸을 원했다.

특이하다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분명 의사들이 전부 딸일 것이라 했다. 하녀장도 배 모양이 분명 딸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두 틀렸다.

요람에 곤히 잠들어 있는 연약한 생명체는 제플린이 바라던 딸이 아니었다.

꿈이길 바랐다. 그동안 자신이 소중히 품어 왔던 게 희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누가 칼로 아랫도리를 찢었다가 다시 꿰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보다 지금 자신을 누르고 있는 현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제플린은 아기가 아들이라는 소식을 듣고선 아기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기억이…… 돌아왔나 보구나.”

알리시아는 곧바로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렸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제플린은 아이가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이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이었다.

기억을 잃은 제플린은 좋은 남편이었다.

“얼마 못 갈 거란 거 너도 잘 알았잖아.”

알리시아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제플린이 결국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누리던 행복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나 달콤해서, 꿈이라도 좋으니 깨고 싶지 않아서 그만 현실이라 착각하고 살았다.

이렇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지나친 욕심의 대가일까.

“이제 나는…… 어떻게…….”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제가 속인 걸 알았으니 제플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겨울이 찾아오는 이 계절에 저 갓난아이와 함께 내쫓길지도 몰랐다.

제가 책임져야 할 미래가 너무나 버거웠다.

그리고 이 절망 속에서 알리시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우습게도 레베카였다.

‘알리시아, 숨을 깊게 쉬어.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아이와 너만 생각해.’

자신은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독을 바른 칼을 내리꽂으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을 빼앗았고, 그녀의 옷과 보석을 훔쳤다.

그런데 레베카는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이 겨우 한 칸을 올라갔을 때 레베카는 열 배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레베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레베카라면…….”

레베카는 버려지듯 이혼한 후에 보란 듯이 공작 부인이 되었다.

그녀를 깎아내리려는 함정인 게 분명한 페튜니아의 티파티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편을 만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넘어졌을 때 흙 한 줌이라도 쥐고 일어나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려 요람을 바라봤다.

솜털 같은 금발 머리가 달빛에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제게 절망만 안겨준 아이인데도 놀랍도록 사랑스러웠다.

이따금씩 움칫거리는 아이의 작은 코를 바라봤다.

저 자그마한 아이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알리시아는 욱신거리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켰다.

여기서 주저앉고 있을 수는 없다.

“정신이 드셨나 봅니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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