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순간 시야가 흐려져 알리시아는 눈을 찌푸렸다.
눈앞에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남자의 실루엣만 겨우 분간이 갔다.
눈을 여러 차례 비비고 감았다 떠서야 알리시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답지 않게 옥타비오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평소였다면 그런 그의 태도에 질겁했을 알리시아였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반가웠다.
알리시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일으킨 몸을 힘겹게 벽에 기대었다.
“아니. 안 괜찮아. 그거 알아? 오늘 내 안부를 물은 게 당신이 처음이란 거.”
“그렇습니까. 그거 퍽 외로우셨겠습니다.”
옥타비오는 상냥한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요람으로 걸어갔다.
그는 데본셔에 불고 있는 칼바람 속에서 평온하게 잠든 아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참으로 어여쁜 아기입니다. 마치 제플린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군요.”
“닮았다니 천만다행이네. 내 아기가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야. 딸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니지요. 아들이 더 좋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제플린이 원한 건 딸이었어.”
“잊으셨습니까? 평민 출신의 당신이 정부가 아니라 백작 부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옥타비오는 아이의 보드라운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알리시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후계자를 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 데본셔가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옥타비오의 말에 알리시아의 얼굴에 기쁨이 피어오르다가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하지만 난 아직 정식 백작 부인이 아닌걸. 법적으로 이 아이는 아직 사생아에 불과해.”
“며칠 전에 당신을 데본셔 백작 부인으로 인정한다는 서류가 통과되었습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제가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전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옥타비오!”
알리시아가 감격에 겨워 그를 바라봤다.
꺼림칙하다고 여겼던 그의 목소리가 오늘만큼은 감미로운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아직 기뻐하시긴 이릅니다. 백작의 기억이 돌아왔으니 언제고 당신을 내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최대한 납작 엎드려 백작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 악착같이 붙어 있을 거야. 그런데 왜 갑자기 내게 존대를 하는 거지?”
알리시아의 물음에 옥타비오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제 주인의 어머니시니까요.”
“그럼 당신의 계획이란 게…….”
옥타비오는 놀라서 숨을 헐떡이는 알리시아를 못 본 척하며 난로에 손을 뻗었다.
“날이 많이 찬데 불이 약하군요. 당장 하녀를 불러다 장작을 더 넣으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는 요람에 누인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아니, 제플린이 아이를 보러 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수로 이름을 짓겠어.”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있어야지요. 훗날 데본셔 백작이 되실 몸입니다.”
“그럼…….”
알리시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홀쭉하게 여윈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고였다.
“아서가 좋겠어.”
“아서라……. 좋은 이름입니다.”
“제플린이 마음에 들어 할까……?”
옥타비오의 얼굴에 일순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꼭 겁먹은 양과 같았다.
제 목표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내던지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어깨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글쎄요. 제 마음에는 듭니다. 그럼 그만 아닙니까?”
옥타비오가 비릿하게 웃자 알리시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위기를 기회로.’
알리시아는 제 아들과 옥타비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 이건 기회였다. 그리고 그녀는 기회를 앞에 두고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알리시아는 기회를 잡았다.
“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
* * *
“오늘 날씨가 정말 좋구나!”
레베카는 창문을 활짝 열고 뭉게구름이 피어난 높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 아래 펼쳐진 단풍으로 물든 공작 성의 숲이 불꽃처럼 아름답게 타오르고 있었다.
레베카의 머리에 올릴 장신구를 점검하던 칸나가 창문 밖을 넌지시 보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릴리 아가씨께서도 무척 좋아하시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오늘은 오벨리아 가족과 요하네스 가족이 함께 피크닉을 가는 날이었다.
릴리가 이날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공작 성의 모든 사람이 알 정도였다.
신이 나서서 모래밭을 뛰어다니는 릴리를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화장대 앞에 앉은 레베카의 어깨를 잡고 칸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레베카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보니 백작저의 하녀들은 그녀를 인형 놀이하듯 꾸미는 걸 좋아했다.
다들 제멋대로 레베카를 꾸미고 싶어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칸나는 달랐다.
그녀는 레베카의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흠잡을 곳 없는 솜씨였지만 한 번도 칸나 마음대로 레베카를 꾸민 적은 없었다.
“그럼 오늘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예?”
“항상 내가 하자는 대로 했으니 이번엔 네 말을 들어 볼게. 괜찮지?”
칸나는 뜻밖의 제안에 머뭇거렸다. 그래도 될까 하는 표정이 그대로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레베카가 칸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마음대로 해도 돼. 난 너를 믿으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칸나는 마지못해 레베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두 뺨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화장하기 전에 칸나는 종종 레베카에게 얼굴 마사지를 해주곤 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얼굴의 부기가 가라앉고 피부가 하루 종일 투명했다.
레베카는 칸나의 익숙한 손놀림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간간이 들리는 칸나의 숨소리와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평화롭게 울려 퍼졌다.
아침잠이 부족했던 레베카는 평온한 분위기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다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다소 흥분한 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습니다.”
레베카는 천천히 눈을 떠서 거울을 바라봤다.
분명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는데 얼굴에선 어떤 답답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화장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처럼 편안했다.
하지만 혈색이 두드러지게 좋아 보였다.
평소와 같은 화려한 화장법은 아니었지만 퍽 자연스러운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레베카가 칸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뭘 한 거야? 엄청 자연스럽네.”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응……?”
레베카는 눈을 크게 뜨고선 거울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화장을 하지 않은 것치곤 얼굴이 화사했다.
칸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항상 무거운 화장에 짓눌러 있지 않으셨습니까. 오늘은 가족과의 시간이니 굳이 화려한 치장이 필요 없다 생각했습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칸나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레베카는 잠시 먹먹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귀걸이와 목걸이를 풀어서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칸나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이런 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구나. 고마워, 네 덕분에 오늘 정말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닙니다. 레베카 님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제가 더 행복합니다.”
“아니. 내가 더 행복할걸?”
레베카가 환히 웃었다.
그녀의 맑은 미소를 마주한 칸나의 가슴이 콩콩 두방망이질 쳤다.
그래, 저 미소를 원했다. 레베카의 저 얼굴을 원해서 여기까지 왔다.
칸나는 악착같이 살아남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 준비 다 됐어? 릴리가 빨리 오라고 성화야.”
“거의 다 됐어. 들어와도 돼.”
레베카의 허락에 율리안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레베카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맨 얼굴을 몇 번 보인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환한 대낮이었던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 긴장이 돼서 레베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칸나도 덩달아 손에 땀이 찼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율리안은 레베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반달로 접었다.
“예쁘다.”
레베카의 잇새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퍼져나갔다.
“그럼 가실까요.”
율리안이 팔뚝을 내밀었다. 레베카는 그의 듬직한 팔뚝 위에 손을 올리고 활짝 웃었다.
칸나는 멈춰 서서 율리안과 레베카의 다정한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문을 나서려던 레베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칸나? 너도 가야지.”
‘그래, 이거면 되었다.’
칸나는 레베카의 숄을 챙겨 들고 밖을 향했다.
율리안의 수다에 이따금씩 들려오는 레베카의 웃음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 * *
릴리의 성화에 레베카 일행은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발라리아 해안에 발을 디뎠다.
오늘은 가을치곤 따뜻한 날씨였지만 바닷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와아! 사방이 다 물이야!”
마차에서 내린 릴리는 바다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넘실거리는 물결에 햇빛이 부서져 내려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릴리는 손차양을 하고선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피크닉 철이라 발라리아 해안가는 그 어느 때보다 인파로 붐빌 때였지만 가족 간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율리안이 해안가를 통째로 비우게 했다.
“릴리! 겉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가야지!”
레베카가 서둘러 카디건을 들고 망설임 없이 모래사장으로 내달리는 릴리의 뒤를 쫓아갔다.
“잡았다!”
레베카의 품에 잡힌 릴리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날씨가 쌀쌀해졌어.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니.”
“하지만 뛰면 덥단 말이야.”
“땀이 식으면 금방 추워질 거야.”
“그래, 그러면 너 좋아하는 훈련도 마음대로 못해.”
율리안이 목도리를 손에 든 채로 다가오더니 레베카의 말을 거들었다.
“목도리도 해야 해……?”
릴리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그건 언제 가져온 거야.”
“이거 말고도 더 많이 가져왔어. 혹시 몰라서 두꺼운 외투랑 모자까지 챙겨왔지.”
“그렇게까진 할 필요 없어. 마음대로 뛰어 놀게 카디건 정도가 적당해.”
“하지만 여긴 추워 레베카. 당신 말대로 릴리가 감기라도 걸리면…….”
“애가 쪄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 땀이 너무 많이 나도 감기에 걸리기 쉬워.”
레베카의 말에 릴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은 끄응, 하며 못마땅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두 사람에게 지고 말았다.
율리안의 패배에 릴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