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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34화 (134/232)

134.

레베카는 카디건을 릴리에게 입혀주었다.

릴리는 발을 동동 굴리며 레베카가 카디건의 단추를 하나씩 잠그는 것을 성마르게 지켜봤다.

처음에 릴리는 레베카의 다정한 손길에 넋이 나갔었다. 하지만 어색하다 느꼈던 다정함은 이젠 당연한 일인 듯 익숙해졌다.

“자, 다 됐어. 이제 뛰어놀아도 돼.”

레베카의 말에 릴리는 강아지처럼 쏜살같이 바닷가를 향해 달려갔다.

한적한 모래사장 위에 릴리의 자그마한 발자국이 총총히 찍혔다.

릴리는 맨발에 감겨드는 모래알의 감촉을 느껴보다가 정신없이 조개껍데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율리안은 죄책감으로 짓눌린 가슴을 부여잡고 행복한 릴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퍽 안쓰러운 표정이었으나 레베카는 딱히 그를 위로하진 않았다.

이것도 그가 갚아나가야 할 빚이기 때문이었다.

“베키 언니!”

하인들이 파라솔을 설치하고 있을 즈음 멀리서 헤레나와 리비아가 레베카를 향해 뛰어왔다.

소라 껍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릴리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릴리도 있네! 잘 지냈어?”

“응응! 언니들도 잘 있었어?”

세 명의 소녀들은 어제 만난 사이처럼 금세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서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아이들을 보며 레베카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헤레나, 리비아. 릴리는 너희보다 어리니까 평소에 노는 것처럼 놀면 다칠 수도 있어.”

“언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릴리가 우리보다 더 엄청나다고. 저번에는 물구나무를 선 채로 정원을 한 바퀴 돌았어.”

헤레나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진짜 대단했어.”

“그런데 오늘은 뭘 하고 놀아야 하지? 릴리, 뭐하고 싶어?”

릴리는 미리 생각해둔 게 있는 듯 몸을 배배 꼬다가 말했다.

“공놀이…….”

“공놀이?”

“동화책에서 보면 모래 위에서 공을 던지고 놀더라고. 그걸 하고 싶었어!”

“하지만 우린 공이 없는데…….”

“걱정 마! 우리가 다 가져왔어!”

릴리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율리안이 장난감 한 보따리를 모래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다람쥐 같은 소녀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취향대로 고르도록.”

헤레나와 리비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정신없이 장난감을 살펴봤다.

해변에서 쓸 수 있는 장난감이란 장난감은 죄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오빠가 준비해 준 거야. 이것 봐. 물에 닿으면 색이 변하는 구슬인데…….”

릴리가 뿌듯한 얼굴로 땀까지 흘려가며 장난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심각한 얼굴로 장난감을 고르는 아이들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레베카는 릴리에게 또래의 귀족 아이들을 소개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릴리는 그런 재미없는 애들하고 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고민하던 찰나 리비아와 헤레나가 릴리와 만났고, 활발한 소녀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친해졌다.

“베키! 나 물에 들어가도 돼?”

릴리가 오리 모양 장난감을 흔들며 레베카에게 물었다.

“물이 차가워서 오늘은 안 돼. 날이 풀리면 그때 다시 오자.”

“다시……?”

레베카의 말이 다소 생소한 듯 릴리가 잠시 멈춘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말을 곱씹던 릴리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래. 또 오면 되는구나! 그럼 오늘은 물에 안 들어갈게!”

릴리의 짧은 고민이 안쓰러웠다.

레베카의 씁쓸한 시선이 백사장으로 뛰어가는 릴리의 뒷모습을 좇았다.

“애가 활발해서 보기 좋구나.”

다나에가 웃으며 레베카의 옆에 앉았다.

“그러게요. 풍파에도 정말 잘 커 줘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풍파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아버지는요?”

“아, 테오는 저기 공작님과 함께 있어.”

다나에의 눈짓에 레베카는 눈을 들어 율리안을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는 대번 심각한 얼굴로 테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긴장이라도 했는지 율리안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그는 얼핏 보면 테오에게 혼이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나에가 그런 둘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은근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테오가 공작님께 무례하게 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사이가 좋아 보여요? 저게……?”

“그래. 테오가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잖니. 저건 기분이 좋다는 의미거든.”

다나에는 테오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부모의 로맨스 따위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요즘 살롱 사업은 어떤가요?”

사업 이야기가 나오자 테오를 향하던 다나에의 따뜻한 눈빛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행사장 대여는 잘 된다만, 살롱 방은 여전히 인기가 없구나. 아직 시기가 이른 것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머니, 적절한 시기란 건 영원히 오지 않아요.”

“무슨 방도가 있구나?”

다나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레베카의 눈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레베카가 저런 눈을 할 때는 어떤 일이든 이루어졌다.

“네. 하지만 어머니께는 괴로운 부탁이 될 수도 있어요,”

“뭔데 그러니.”

“황후 폐하와…… 만나실 수 있겠어요?”

레베카의 말에 다나에가 움찔 몸을 떨었다.

다나에는 현 황후 벨로나의 시녀 시절을 떠올렸다.

다른 시녀들에 비해 지위가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벨로나는 다나에의 고상한 취미와 번뜩이는 기지를 아꼈다.

다나에 또한 인자한 윗사람의 표상인 벨로나를 따랐다.

하지만 다나에의 결혼을 계기로 둘의 사이는 틀어졌다.

‘네가 뭐가 아쉬워 그런 덜떨어진 사내랑 결혼한단 말이냐.’

이미 다나에의 좋은 혼처를 생각해두고 있던 벨로나는 테오를 탐탁지 않아 했다.

‘다나에, 사내는 얼굴이 다가 아니야. 그렇게 성품이 유약한 자와 결혼하면 너만 고생해. 그래도 혼인을 꼭 해야겠다면 난 네 얼굴을 다시 보지 않겠다.’

하지만 다나에는 이미 테오와 사랑에 빠진 뒤였다. 그녀는 도망치듯 테오와 결혼했고, 그길로 벨로나와의 인연은 끊겼다.

몇 해는 꿈결같이 행복했다.

테오는 좋은 아빠였고 다정한 남편이었다. 다나에의 집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벨로나의 예언대로 다나에는 불행해졌다.

잘 살았더라면 벨로나에게 면이라도 섰을 것이다. 훗날 사과라도 하며 다시 벗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다나에의 눈이 슬픔에 잠겼다.

“난 그분을 볼 낯이 없어. 내게 실망을…… 많이 하셨거든.”

“그래도 황후 폐하가 보고 싶으신 거죠?”

“네가 그걸 어떻게…….”

“집에 있는 동안 엄마가 황후 폐하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종종 꺼내는 걸 봤어요. 그때가 그리운 거죠?”

다나에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젊었을 적의 우정은 결혼 후에 조금씩 빛이 바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여유가 생겨 끊긴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너진 집안을 살리느라 다나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사이를 돌이킬 시기를 놓쳐 제 손을 떠나버린 아까운 친구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사람은 벨로나 황후였다.

그녀만큼 자신에게 조건 없는 애정을 베푼 이는 몇 없었다.

레베카가 다정하게 바닷바람에 차가워진 다나에의 손을 문질렀다.

“명분은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카트린느 황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언급만 하시면 돼요.”

“카트린느 황녀……? 그분은 공작님과 혼담이 오고 갔던 분이 아니냐. 무례한 일이지 않을까?”

“혼담이 오고 갔다고 할 수는 없죠. 황제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시던 혼사였어요. 그게 수포로 돌아갔으니 카트린느 황녀가 황제의 눈 밖에 난 건 당연한 일. 어머니도 황제 폐하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그래……. 잘 알다마다.”

벨로나와 자히드라는 어릴 적부터 정략혼을 했던 사이였다.

때문에 다나에는 자히드라를 오랫동안 지척에서 지켜봐왔다.

자히드라와 벨로나는 상성이 좋은 부부였다.

불같은 성격의 자히드라가 냉정하고 실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벨로나의 공이 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둘 사이엔 사랑이 없었다.

슬하에 자녀를 여섯이나 두고도 둘 사이엔 냉기가 흘렀다.

서로 그어놓은 선이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황후와 황제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다나에는 황후의 결혼 생활을 보고 테오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가 생각한 부부란, 뿌리는 다르나 그 줄기가 합쳐져 성장하는 연리지 같은 관계였다.

반면에 벨로나와 자히드라는 같은 뿌리에서 돋아났지만 각기 다른 나무로 갈라진 사이였다.

서로 바라는 이상은 같지만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다.

벨로나는 대체적으로 자히드라에게 맞춰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자식들 문제에 관해선 자히드라와 척을 졌다. 그녀는 자히드라의 학대에 가까운 교육에 치를 떨었다.

다나에는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달리는 황녀와 황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벨로나를 떠올렸

다.

레베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후께선 이미 제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을 겁니다. 카트린느 황녀는 화려한 외모와 달리 성정이 유약하신 편이지요. 나름 연적이나 다름없던 황녀께 제가 직접 뵙고자 청을 하는 건 보기가 좋지 않아요. 어머니께서 황후 폐하, 그리고 황녀님과의 자리를 마련해주세요.”

“네가 말한 살롱을 살릴 방도가 카트린느 황녀였구나.”

“누군가의 아내로 갇혀 살기에 좀 아까운 인물이거든요.”

카트린느를 편으로 들이고자 하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다나에와 황후가 예전처럼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레베카는 이전 생의 벨로나를 떠올렸다.

오벨리아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려는 순간마다 익명으로 후원금을 보내던 사람이 바로 벨로나였다.

‘황후께서 옛정에 휩쓸려 쓸데없는 짓을 하신단 말이지. 참 바퀴벌레처럼 명줄이 긴 가문이야. 오벨리아는.’

이전 생에 제플린이 옥타비오에게 투덜거리던 걸 엿듣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마 벨로나도 다나에 못지않게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의 다나에는 불행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직접 사업을 한다는 게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다나에의 모습을 벨로나가 더 마음에 들어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다나에의 시선이 레베카의 얼굴에 닿았다.

레베카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소 과격하게 공을 주고받는 쌍둥이와 릴리는 그들의 머리채에 내리쬐는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레베카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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