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35화 (135/232)

135.

다나에는 제 딸들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 이건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야. 내 아이들의 미소를 지키는 일이기도 해.’

다나에가 결심이 선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그래, 조만간 황후께 편지를 넣어보마. 허락하실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야.”

“용기 내어 주셔서 감사해요. 황녀님과 독대할 기회만 있으면 어떤 것이든 좋아요.”

“테오가 그랬잖니. 네 행복을 위해 뭐든지 다 할 거라고. 또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렴.”

따뜻한 그녀의 말에 레베카의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코가 빨개졌구나. 추운 거니?”

다나에가 레베카의 콧잔등을 가볍게 치면서 말했다.

그녀는 레베카의 어깨에 담요를 단단히 둘러주었다. 그리고 찬찬히 딸을 살펴봤다.

다나에의 세세한 눈길에 자신의 치부를 들키기라도 할까 봐 레베카는 담요 속으로 몸을 깊숙이 숨겼다.

“이런, 머리가 엉망이 되었구나. 이리 오렴.”

옆에 앉아 잠자코 책을 읽던 칸나가 얼른 다나에에게 빗을 내밀었다.

다나에는 칸나에게 고마움이 담긴 눈인사를 하곤 레베카의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너는 한시도 머리를 예쁘게 하고 있는 법이 없었지.”

레베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그래서 어머니께선 항상 여러 종류의 빗과 핀을 가지고 다니셔야 했죠.”

“많이 혼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난 네 머리를 정돈하는 이 시간이 참 좋았단다.”

엉킨 머리를 능숙하게 풀어낸 다나에는 레베카의 머리를 한데 모아 땋았다.

그리고 핀으로 잔머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다 되었다. 역시 어여쁘구나. 우리 딸.”

다나에의 한없이 다정한 눈빛이 꿈결 같아 레베카는 눈을 몽롱하게 떴다.

아이들의 꽃봉오리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와 뒤엉켜 들려왔다.

믿을 수 없이 행복한 전경에 레베카는 다시 살아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레베카, 이제 밥 먹을 시간이야.”

커다란 바구니를 든 율리안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테오가 두 딸과 릴리를 큰 소리로 불렀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아버님께서 도시락을 싸 오신 모양이야.”

레베카는 율리안이 들고 있는 바구니 속을 구경했다.

율리안이 멋쩍게 목을 쓸어내렸다.

“나도 근사한 걸 준비했는데 이것보단 별로인 것 같아.”

레베카는 율리안의 눈짓에 따라 시선을 돌렸다.

백사장 위에 세워진 커다란 간이 천막 안에 휘황찬란한 정찬이 차려져 있었다.

“발라리아의 특산물로 요리한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싶었거든. 그런데 도시락도 맛있어 보여서 아주 난감해. 그래도 다 남김없이 먹을 거지? 레베카?”

식고문을 예견하는 듯한 율리안의 섬뜩한 웃음에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배를 문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기우였다.

테오가 싸 온 도시락은 릴리가 게 눈 감추듯 다 먹어치웠고, 발라리아 특제 요리는 쌍둥이가 그릇까지 핥아 먹을 기세로 싹 비웠다.

“너무 맛있어!”

세 명의 소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감탄을 내뱉으며 볼록 튀어나온 자신들의 배를 두들겼다.

덕분에 레베카는 평소보다 널널한 위장을 유지하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모두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디저트를 먹는 와중 율리안만이 후회 속에서 중얼거렸다.

“내…… 불찰이야. 당신이 배불러 죽겠다는 소릴 하지 않다니. 음식 양을 너무 모자라게 준비했어.”

레베카는 그의 절망을 짐짓 모른 척하며 릴리의 수다에 귀를 기울였다.

* * *

벨로나의 답장은 다나에가 세 번째 편지를 보낸 뒤에 날아왔다.

‘내 딸 카트린느를 위한 것뿐이다.’

다소 쌀쌀맞은 어투였지만 허락은 허락이었다.

답신을 읽은 다나에는 기쁨보다 앞서 걱정이 먼저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벨로나가 좋아하는 색상부터 시작해 드레스 취향과 선호하는 차 온도 따위를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않은 세월이 너무 오래되었다.

그동안 벨로나의 성격이나 취향이 얼마나 변했을지 알 수 없었다.

다나에는 그녀가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했던 드레스를 떠올렸다.

벨로나가 친히 자신에게 선물했던 장신구들도 보석함에서 꺼내 늘어놓았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걸치는 게 옳은 결정일지 몰라 망설이는 찰나, 테오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께서 당신을 초대했나 봐?”

“응. 잘된 일이지? 그런데 당최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할지 모르겠네. 또 선물은 뭘 들고 가야 할까?”

다나에는 데뷔탕트를 앞둔 소녀처럼 허둥지둥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테오가 옷장을 뒤져서 하늘빛이 감도는 회색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이번 가을에 유행하는, 팔꿈치까지 오는 퍼프소매가 단정한 느낌을 자아내는 드레스였다.

“여기에 황후께서 선물하신 진주 목걸이를 하면 딱이겠어. 이 목걸이는 흔한 디자인이지만 질 좋은 진주라 황후께선 분명히 알아보실 거야.”

테오가 들고 갈 구두와 머리 모양까지 정해주자 다나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신 안목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니까.”

테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황후 폐하와 당신 사이가 멀어진 게 다 나 때문이잖아.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고 싶었어.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나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네.”

“그런 말 하지 마.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결과야. 우리 지난날은 있고 현재만 집중하자. 테오. 지금 난 무척 행복해.”

다나에는 울적하게 눈썹을 늘어뜨린 테오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테오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곧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지.”

“좋아. 그럼 이제 황후께 드릴 선물을 골라줄래?”

다나에가 눈웃음을 짓자 테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곧이어 그는 생각해둔 선물 리스트를 읊기 시작했다.

* * *

“당신 혼자 그곳에 보내려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율리안이 불퉁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탄 레베카의 손을 꼭 붙들었다.

레베카가 그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황제가 아니라 황후께 연통을 넣었잖아. 벨로나 황후는 황제만큼 계산적인 인물이 아니야. 게다가 나는 황후가 아니라 카트린느 황녀와 만나는 거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율리안은 뭉그적거리며 레베카의 손을 매만졌다.

머리를 내리고 간단한 셔츠 차림을 한 탓에 그는 평소보다 더 온순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자신을 보내는 걸 싫어하는 그가 꼭 주인의 출근길을 막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레베카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려 흑단 같은 머리칼을 흩트려놓았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당신이 이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는걸?”

짓궂은 레베카의 웃음에 율리안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손은 꼭 잡고 있었다.

“누, 누가 걱정했다고 그래. 그냥 일이 잘 안 풀릴지도 모른다는 거지. 미리 안 좋은 상황을 예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보통 그걸 걱정이라고는 한다만……. 어쨌든 이제 보내주지 않을래? 어머니가 기다리시겠어.”

다나에가 기다린다는 말에 율리안은 마지못해 그녀의 손을 놓았다.

레베카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마부에게 여러 가지 주의를 줬다.

그리고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레베카를 오도카니 쳐다봤다.

그가 어색하게 팔을 흔들자 레베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율리안이 잠시 멍하니 있는 틈을 타 그의 볼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 것처럼 가벼운 키스였지만 율리안의 귓불이 화르륵 타오르기엔 충분했다.

“그럼 조심히 갔다 올게.”

갔다 온다는 말이 이토록 달콤한 말이었을까.

율리안은 그녀가 돌아올 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레베카의 입술이 맞닿았던 볼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벨로나의 온실 정원은 자히드라의 것과 분위기가 퍽 달랐다.

자히드라의 정원이 온갖 화려한 식물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곳이라면, 벨로나의 정원은 절제미가 흐르는 곳이었다.

순백의 꽃들 사이로 보랏빛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등나무꽃은 작은 폭포처럼 흐드러졌다.

각양각색의 꽃이 한데 얽혀 은은한 향기를 뿜어댔다.

레베카는 분수대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꽃잎 무리를 바라보며 애써 긴장을 삭였다.

이곳에 도착한 지 10분째, 다나에와 벨로나는 말없이 차만 들이켜고 있었다.

자신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황후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대화의 물꼬를 트는 건 무례한 짓이었다.

레베카는 파르르 떨리는 다나에의 입가를 바라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머니에게 잔인한 부탁이었을까.

레베카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할 때 즈음, 줄곧 찻잔을 향해 있던 벨로나가 눈을 천천히 들었다.

곧 그녀의 시선은 다나에의 진주 목걸이 언저리에서 멈추었다.

벨로나의 입가에 미소가 옅게 퍼져나갔다.

“그건…… 내가 선물한 목걸이구나.”

갑작스런 말에 다나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벨로나는 예전처럼 한없이 따뜻한 얼굴로 다나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나에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알아…… 보시는군요.”

“시답잖은 선물이었는데 지금껏 간직한 게냐.”

“누가 주신 선물인데 시답잖다고 하십니까. 황후께서 제게 주신 것은 작은 만년필 하나까지 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 나는 너의 작은 걸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감동하곤 했었지.”

“폐하…….”

“그러고 보니 오늘 옷이 참 예쁘구나. 내 정원과 잘 어울려. 오벨리아 자작이 골라준 것이겠지?”

“그게…….”

테오의 이름이 나오자 다나에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맞습니다…….”

“이런. 질책하려던 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 아니더냐. 테오 그자는 옛날부터 감각이 좋은 편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라 말한 것이야. 고개를 들 거라. 다나에.”

“면목이…… 없습니다.”

벨로나는 다나에의 세 통의 편지로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떠는 다나에를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