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사실 벨로나는 다나에의 생각보다 훨씬 더 그녀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벨로나의 배신감은 컸다.
다나에라는 넓은 바다를 담기에 테오는 그릇이 작은 남자였다.
벨로나는 테오의 팔랑귀를 일찍이 알아차렸다.
저런 남자는 필시 가족을 구렁텅이에 빠트릴 유형이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다나에가 아까웠다.
제 경고에도 뻔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그녀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오벨리아 저택이 있는 이렌시아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두 해가 지나고, 그녀가 어여쁜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굳은 땅 같던 그녀의 분노에 조금씩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나에와 꼭 닮은 레베카가 데뷔탕트에서 자신에게 인사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마치 다나에의 처녀 시절을 보는 것처럼 레베카는 영특했고 아름다웠다.
이렇게만 간다면 자신도 다나에를 향한 분노를 거두고 그녀와 예전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조금씩 샘솟았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을 비웃듯이 곧이어 오벨리아가에 풍파가 닥쳤다.
벨로나가 자신이 저주를 내린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로 끔찍한 재앙이 다나에를 덮쳤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레베카와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는 다나에를 보며 벨로나는 남몰래 울음을 삼켰다.
질책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도와줬더라면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하는 죄책감이 벨로나를 줄곧 괴롭혔다.
벨로나는 항상 옛 기억을 헤집으며 다나에를 그리워했다. 다나에만큼 자신을 잘 알고 진심으로 아끼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다나에와의 감정의 골도 깊어져만 갔다.
분노와 후회 사이에서 벨로나는 갈팡질팡했다.
그러던 와중에 레베카가 데본셔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벨로나는 자신의 두 눈으로 요하네스 공작 옆에서 생기 가득히 피어나는 레베카를 똑똑히 보았다.
동시에 다나에가 사업을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귀부인이 돈을 번다는 건 모양이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벨로나는 그녀를 두고 쑥덕거리는 여자들의 내면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몰래 자그마한 부업을 시작한 부인들이 생겨났다.
다나에의 자그마한 날갯짓에 제국 전체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나에는 사업을 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한층 더 성장해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미 그 지점부터 벨로나의 미움은 사라졌는지도 몰랐다.
다나에는 누군가가 담을 필요조차 없는 사람인 걸 벨로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다나에.”
“예. 황후 폐하.”
“사업을 한다 들었다. 혹여 살림이 궁핍해서 테오 대신 네가 억지로 돈을 버는 것이냐?”
“살림에 보탬이 되려는 건 맞지만 억지로 하는 건 아닙니다. 전 예전부터 제 사업을 꾸리고 싶었습니다. 그리 보기 좋은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전 지금 행복합니다.”
다나에가 떨리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벨로나는 시야가 잠시 흐려지는 것 같아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눈물은 진작에 다 마른 줄 알았는데 주책이었다.
“네가 행복하다면…….”
흐려진 벨로나의 말꼬리에 다나에와 레베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벨로나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널 그만 용서하마. 애초에 내가 화가 났던 이유가 사라져 버렸으니.”
“폐하!”
“그런 딱딱한 호칭은 이제 되었다. 예전처럼 나를 불러다오.”
다나에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사람이 없을 때마다 벨로나를 부르던 호칭을 더듬더듬 입에 올렸다.
“베, 벨로나 언니…….”
“언니라…….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구나.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단다. 다나에.”
레베카는 물론이고 주위에 서 있던 시녀들이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다나에가 황후와 각별한 사이인 건 알았지만 언니 동생이라니.
벨로나는 좋게 말해서도 상냥한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상벌에 엄격했고 제 감정을 쉽게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은 벽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 같았다.
그런 벨로나가 진심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녀들은 얼굴에 떠오르는 놀라움을 숨기느라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벨로나는 다나에의 손을 잡고 한동안 회포를 풀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애꿎은 찻잔만 매만지고 있는 레베카를 발견했다.
벨로나가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이런, 내가 옛 추억에 잠겨 잠시 너를 잊었구나.”
“아닙니다. 두 분의 사이가 좋아진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그래. 카트린느를 보게 해달라고 청했지? 내가 마련해줄 수 있는 자리는 그 아이의 방 앞까지만이다. 그 아이를 밖으로 이끌어 내는 건 온전한 네 몫이야.”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레베카가 예의에 맞게 감사 인사를 했다.
벨로나는 흐뭇하게 레베카를 바라봤다.
“내 너를 처음 본 게 데뷔탕트 때였지. 다나에가 딸을 낳았다곤 들었지만 내 마음이 옹졸해 들여다보지도 않았거든. 그게 참 후회가 되는구나. 네 성장을 지켜보지 못한 게 아쉬워.”
“마음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벨로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등나무꽃에 매달린 나비가 막 날개를 접고 있었다.
“정말…… 훌륭하게 컸어. 넌 스스로 고치를 찢고 나오는 아이구나. 부디 카트린느에게도 그 방도를 알려주기 바란다. 널 보니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내 딸이 현재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나비가 날갯짓을 다시 시작했다. 벨로나의 시선이 레베카를 향했다.
다나에를 바라보는 것과 다름없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이었으나 레베카는 그 다정함이 무거웠다.
그녀는 레베카가 카트린느에게 어떤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막중한 임무를 받은 기사처럼 레베카가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다나에와 벨로나가 오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동안 레베카는 온실 정원을 박차고 나왔다.
벨로나의 명을 받은 하녀가 레베카를 카트린느의 응접실까지 안내했다.
하지만 차가 다 식어갈 동안에도 카트린느는 응접실로 나오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은 문을 노려보기를 수십 분, 드디어 문이 열렸다.
하지만 순간 화색이 떠오르던 레베카의 얼굴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녀 한 명이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고선 등장했다.
카트린느의 절친으로 알려진 칼리스타 백작 영애였다.
레베카는 목을 빼 들고 그녀의 뒤를 살폈지만 여전히 카트린느 황녀는 보이지 않았다.
“황녀님께선 오늘 몸이 편찮으십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청을 한 번 더 넣어주십시오.”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후 폐하의 입장을 고려해 응접실까지 모신 것입니다. 애초에 얼마나 살가운 사이였다고…….”
쌀쌀맞은 축객령이었다.
레베카는 칼리스타의 냉담한 태도를 이해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은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가던 남자를 채간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것 때문에 자히드라의 눈 밖에 난 참이었다.
카트린느는 가을 무도회 이후로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들었다.
자히드라가 카트린느의 혼담을 두고 외국의 어느 노귀족과 흥정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니 자신이 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레베카가 아니었다.
레베카는 응접실과 연결된 침실 문을 바라봤다.
“저곳에 황녀님께서 계시는 건가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이만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요하네스 공작 부인.”
칼리스타의 단호한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베카는 성큼성큼 침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직접 이야기를 드려야겠습니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경비병! 법도를 모르는 부인을 정중히 모시세요!”
경비병이 저지하는 것보다 레베카의 손이 더 빨랐다.
레베카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카트린느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레베카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카트린느의 공격적인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황녀님께선 제가 미우십니까.”
“다짜고짜 찾아와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지만 황녀님은 제가 미우신 게 아닙니다.”
카트린느의 도톰한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당장 부인을 모시겠습니다. 뭐하십니까! 어서 가세요!”
칼리스타가 레베카의 팔을 잡아끌었다. 레베카는 그녀의 팔을 떨쳐내며 계속해서 말했다.
“황녀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미우신 겁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제게 화풀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레베카의 말에 카트린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칼리스타는 거의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가 의연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카트린느가 잠시 레베카를 찬찬히 살펴보다 말했다.
“칼리스타.”
“예! 황녀님!”
칼리스타는 카트린느가 레베카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생각하며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요하네스 공작 부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의 무례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카트린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다과상을 내오게.”
“예……?”
“여기 계신 부인과 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으니.”
레베카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 * *
“대체 얼마나 오만해야 남의 아픔을 이렇게 제멋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겐가.”
주위 사람들이 응접실에서 물러나자마자 카트린느는 독설을 쏟아내었다.
그녀는 딱히 레베카에게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부인의 말처럼 난 자네를 미워하는 게 맞네. 세상 어느 여자가 제 약혼자를 빼앗아간 여우를 좋아하냔 말인가. 그것도 무도회에서 이상한 쇼까지 하면서 등장한 여자를 말이야.”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만. 황녀님께선 공작과 약혼한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황제께서 혼담을 청하셨으니 약혼이나 다름없지.”
레베카는 고집스럽게 치켜뜬 카트린느의 눈매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