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상대방이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면 그녀도 곱게 맞받아쳐 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무리 방자하게 군다고 해도 카트린느가 결국 자신의 편에 설 것임을 레베카는 알고 있었다.
카트린느는 지금 큰 충격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래서 살롱 사업을 방해하셨습니까.”
“내가 그런 하찮은 짓을 왜 하겠나.”
“페튜니아 혼자서 그 모든 일을 꾸몄다고 하실 작정입니까. 이미 그녀의 입으로 당신이 지시했노라는 말을 받아냈습니다.”
사실 페튜니아는 카트린느의 뒷공작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티파티에서 페튜니아가 흘린 카트린느의 이름을 듣고 레베카가 추론한 내용에 불과했다.
레베카의 결혼식 이후로 라본느 살롱은 사교계 최고의 관심사였다.
그런데도 대여 살롱에는 파리만 휘날리고 기웃거리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었다.
페튜니아가 아무리 영향력이 지대한다고 한들 그녀 혼자서 들불처럼 번지는 사교계의 호기심을 잠재울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레베카는 페튜니아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트린느의 한숨이 그녀의 추론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하아……. 페튜니아의 혀가 가볍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밀고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카트린느는 계략을 들킨 사람답지 않게 뻔뻔한 태도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방금도 말했듯이 난 자네가 싫어. 싫은 사람의 사업을 방해하는 게 그리 나쁜 일인가. 나는 앞으로도 쭉 자네의 행복을 방해할 생각이네.”
카트린느의 말에 레베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카트린느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웃어? 지금 내 말을 비웃는 건가?”
“웃긴 것을 어찌합니까.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시는 황녀님의 모습이 꼭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철없는 투정 같지 않습니까.”
“뭐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황녀님께선 정말로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에게 연심을 품은 적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추잡한 짓을 벌일 만큼?”
“그런 얼굴의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단순한 호감과 연심은 구분하셔야지요. 당신은 공작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이젠 내 순정마저 조롱하는구나. 아주 발칙하기 그지없군 그래. 내 어머니의 면을 봐서 한 번 만나주었는데 이렇게 기고만장하다니. 난 이 나라의 황녀야. 레베카.”
“그 자리가 좋으십니까?”
“좋다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인데.”
“그런가요? 그럼 앞으로 당신에게 일어날 미래를 제가 한번 예견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한때 성녀가 될 뻔했던 사람이거든요.”
카트린느는 레베카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말을 멍하니 들었다.
“당신은 황제의 명에 따라 카리바나 왕국의 늙은 왕자와 결혼하게 될 겁니다. 카리바나 왕국은 부유한 나라이지만 수많은 왕자 때문에 권력구조가 불안정한 곳이지요. 당신이 그곳으로 간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큰 내전이 터질 겁니다.”
레베카는 차로 입을 잠시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전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결국 로탄더스 제국으로 피난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기나긴 항해 속에 당신은 그만 병에 걸리고 말겠지요. 고국의 땅을 밟지도 못한 채 망망대해 위에서 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은 가여운 일생이었노라고 짧은 한 줄로 역사책에 기록되겠죠.”
“말조심해!”
카트린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엄연히 황실 모독죄야!”
“왜 그러십니까? 너무 그럴싸한 미래라 소름이 돋으십니까? 황제께서 당신의 혼처를 두고 여러 나라와 흥정하고 있다는 건 저기 부엌의 쥐새끼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중에서 카리바나 왕국이 가장 많은 돈을 낼 수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뭐…… 뭐라고…….”
“당신의 분노는 나를 향한 게 아니라, 가축처럼 길러져 팔아넘겨지는 당신의 무기력함에 분노한 겁니다. 공작이 안 되면 왕자를, 그마저도 안 되면 또 이익이 되는 어느 사내에게 넘어갈 당신의 인생에 화가 나서 제게 화풀이를 하고 계신 겁니다.”
카트린느는 할 말을 잃고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레베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쉴 틈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고작 춤 한 번 췄던 사내에게 연심을 품을 만큼 황녀께선 순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부황이 그렇게 가르쳤을 리가 없으니까요. 당신의 분노를 애먼 곳에 쏟아붓지 마십시오. 당신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주저앉아 있는 당신의 처지입니다. 당신을 가둬둔 황제와 이 나라입니다.”
카트린느에게 읊었던 그녀의 미래는 이전 생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
타국에서 비명횡사한 젊은 황녀를 위한 장례식이 며칠이나 이어졌다.
몇 년이나 지속되던 카리바나의 내전이 끝난 뒤 새로 등극한 왕은 상당한 위로금과 함께 카트린느의 유품을 로탄더스 제국으로 보내왔다.
유품이 공개된 뒤 제국은 한바탕 뒤집혔다.
카트린느의 유품 대다수가 연금술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황녀가 연금술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마 카리바나 왕국에서 지내는 무료한 시간동안 카트린느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연금술로 만든 것들은 대부분이 살상 무기였다.
아마 내전 때 남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만든 것일 거라고 학자들은 추측했다.
연금술은 엄연한 노동이었다.
혼삿길을 막는 취미나 다름없었기에 카트린느는 로탄더스에 있는 동안 자신의 재능을 줄곧 숨겨왔다.
카트린느가 연금술로 만들어낸 물건들은 여태껏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뛰어난 업적이었다.
그녀의 연금술은 제국을 뒤흔들었다.
죽은 황녀의 연구 업적을 통해 제국의 연금술이 한층 더 발전한 것은 물론이고, 이는 여성들이 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되었다.
‘그럼 뭐하나. 그녀가 추앙된 건 이미 죽은 뒤인 걸.’
레베카는 카트린느가 살아서 그 영광을 누리게 할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면 살롱 사업은 알아서 번창할 것이고.
레베카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카트린느가 손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게…… 쉬운 일이라 생각해? 내가 분노하면 뭐라도 달라질 줄 알아?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지껄이는 건가?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소나 돼지처럼 부황이 길러온 소중한 이 나라의 가축이야. 가축이 발버둥 쳐 봤자, 도축될 뿐이지 않겠어?”
“가축이 아님을 증명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
카트린느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레베카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듯 카트린느는 경계심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허리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는 들어 보셨겠지요.”
“어린아이나 읽는 동화가 아니더냐.”
“이왕 가축이 되실 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십시오. 그러면 누구에게 팔리지도, 한낱 점심거리가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내겐 낳을 황금이 없다. 나는 2황녀처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황자도 아니다. 내가 가진 건 오로지 어릴 때부터 갈고닦아온 기품과 이 외모뿐이야.”
“아닐 텐데요. 한 가지 더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그 목걸이가 될 수도 있겠군요. 밤에 아주 유용할 그 목걸이 말입니다.”
레베카는 손가락을 들어 카트린느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카트린느의 머리색과 비슷한 붉은 산호 목걸이였다.
얼핏 보면 세공이 잘된 값비싼 목걸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산호 목걸이에는 어두운 곳을 환히 밝힐 수 있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전 생에서 황실은 카트린느의 유품 중 일부를 경매에 내놓았다.
그중 제플린이 손에 넣은 것이 바로 저 산호 목걸이였다.
목걸이 뒷면의 버튼을 누르면 태양처럼 환한 빛이 새어 나와 어둠을 밝혔다.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안다고?”
카트린느는 무심코 목걸이를 움켜잡았다.
그녀의 경악한 얼굴 위로 얼핏 두려움이 서렸다.
아마 레베카가 자신이 연금술을 한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고하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레베카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제께선 모르시는 일입니다. 일러바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럼 뭘 원해? 이걸로 날 협박이라도 할 셈이야?”
“그럴 리가요. 저는 황녀님의 재능을 키워드릴 작정입니다.”
“키운다고?”
“네. 연금술사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판국입니다. 그런 마당에 황녀님의 재능은 취미 따위로 썩히기에는 무척 아깝지요.”
잔뜩 날이 서 있던 카트린느의 눈매가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연금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재능이라 칭해주는 사람은 레베카가 처음이었다.
벨로나에게 연금술을 하는 걸 들키던 날 그녀는 호되게 혼이 났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부황의 눈에 드는 수밖에 없다. 황녀가 연금술이라니. 당장 내쳐질 수도 있어.’
언니들도 득달같이 달려와 카트린느를 말렸다.
‘우리의 쓸모는 결혼뿐이야. 그러니 흠이 될 만한 취미는 관두도록 하렴.’
어린 카트린느는 가족들의 만류를 극복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녀는 순종적인 황녀로 자라났다.
하지만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씨는 도무지 꺼지지 않았다.
카트린느는 몰래 연금술 서적을 뒤적거리며 혼자 독학했다.
그리고 처음 만든 것이 바로 이 목걸이였다.
칼리스타도 모르게 은밀히 가져온 취미였다.
그런데 그걸 레베카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레베카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과정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어지는 레베카의 말에 카트린느는 입을 쩍 벌렸다.
“요하네스 공작 소속의 연금술탑에서 연구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곳은 모든 연금술사의 꿈의 궁전 같은 곳이라 들었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보고서들과 천장까지 맞닿은 책들, 그리고 뛰어난 연금술사들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걸 상상하기만 해도 카트린느의 가슴이 뛰었다.
카트린느는 잠시 밝은 미래를 그려보았지만 이내 낯을 흐렸다.
“하지만 내가 자유로이 그곳에 출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친구가 되시면 그만입니다.”
“지금 나더러 당신과 친구를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