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38화 (138/232)

138.

카트린느는 황당하기 그지없어 혀를 찼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은 레베카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사업을 방해했으니 레베카도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친구를 하자고 다정히 말하다니 제정신인가?

“진짜 친밀한 사이가 되자고 하는 건 아닙니다. 척만 하셔도 좋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해를 풀고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소문을 내십시오. 그리고 저를 만난다는 핑계로 공작 성에 자주 방문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성에 방문하신 뒤엔 친히 연금술탑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연금술사를 성으로 모셔도 되는 일이고요.”

카트린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그럴싸한 계획이었다.

요즘 들어 황제는 카느린느를 찾아올 때마다 레베카의 반만큼만 닮았으면 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런 황제의 발언은 레베카를 향한 그녀의 미움을 더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러니 카트린느가 자존심을 꺾고 레베카에게 한 수 배우겠다고 하면 황제는 쌍수를 들고 반길 것이다.

매일같이 공작 성을 드나들어도 될 정도의 구실이었다.

게다가 그 핑계로 자신은 그토록 원했던 연금술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것도 요하네스가의 연금술탑에서!

카트린느는 지나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자꾸만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하지만 들킨다면? 폐하의 정보력을 무시하면 안 돼. 금방 들통 날 수도 있어.”

“그것 또한 괜찮습니다. 오히려 들켰을 때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 만들어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황제께서 원하시는…… 것?”

“무기를 만드십시오.”

“무기라고? 연금술로 살상 무기를 만드는 건 허락받은 자 이외엔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어.”

“맞습니다. 그러니 황제께서 대놓고 원하시는 걸 만들지 못하는 것이지요.”

레베카는 얼마 전 율리안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율리안은 요즘 들어 황궁 출입이 잦았다.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그를 황제가 본격적으로 써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는 율리안이 잔뜩 지친 기색으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율리안, 제대로 씻고 누워야지.’

‘조금만 봐줘……. 오늘 완전 녹초가 됐다고.’

레베카는 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엎드린 율리안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었다. 그가 기분 좋은 신음을 내었다.

‘또 황제가 당신을 못살게 굴었나 보구나.’

‘말도 마. 무기를 만들라고 하더군.’

‘무기를……?’

‘그래. 신의 군대를 쓸어버릴 강력한 무기를 말이야. 그동안 신전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만들지 못한데다 연금술사 인력까지 부족해서 실행을 못한 모양이야. 그러니 내 연금술탑이 줄곧 탐이 났던 거지.”

‘이때다 싶어 당신의 연금술탑에 침을 바른 거네.’

‘법적인 절차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 거액의 투자금까지 주더군. 나도 무기를 만들어 볼까 하던 찰나에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야. 그런데…….’

‘그런데?’

‘무기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연금술사가 있을지 모르겠어. 있다하더라도 많이 없을 거야. 이래봬도 그들은 평화주의자거든.’

말을 마친 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레베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가…….

“레베카!”

꿈같던 시간을 멍하니 회상하는 레베카를 카트린느가 불러세웠다. 고개를 쳐든 레베카의 뺨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디까지 말했죠?”

“무기를 만드는 걸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거라 했어.”

“맞습니다. 이건 기밀이지만…… 폐하께서 은밀하게 연금술탑에 무기 제작 의뢰를 하셨습니다. 다만 인력이 모자라 조금 난항을 겪고 있지만요.”

“그래서 나더러 그 인력이 되라고?”

“그렇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무기 제작자가 되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황제께선 당신을 타국으로 보내지도, 엄한 사내의 것이 되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트린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최고의 무기 제작자가 되라니.

지금의 자신은 고작 장신구 따위를 개조할 정도의 능력밖에 없었다.

백만 년은 이른 소리였다.

하지만 도저히 떨칠 수 없는 미래였다.

연금술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지만 무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연금술사는 아직 없었다.

만약 자신이 뛰어난 업적을 세운다면 레베카의 말대로 황제가 놓칠 수 없는 인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트린느는 총이나 화포를 좋아했다.

의심을 사지 않게 예쁜 무늬의 무기만 수집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 번쯤 진짜 무기를 가지고 싶었다.

투박하고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진정한 무기를.

제 취향의 물건을 자신의 손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니 설렜다. 게다가 그 무기에 연금술까지 융합할 수 있다니.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연금술 공식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카트린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한층 상냥하게 레베카에게 물었다.

“내가 자네에게 뭘 해주면 되겠어?”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몇 가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말해 보게.”

“먼저 제 살롱 사업을 홍보해 주십시오. 황녀님께서 사교계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지. 또 다른 건?”

“제 편이 되어 주십시오.”

“이 계약이 성사된다면 우린 같은 편이나 다름없는 걸.”

“이익에 따른 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일이 닥쳐도, 당신이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저를 도와주는 제 사람이 되어달란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황제께 대들어야 한다거나…….”

“조금 어려운 부탁인 것 같구나.”

“이 정도의 각오도 없으시다면 저는 당신과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레베카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눈을 치켜떴다.

카트린느의 눈이 갈팡질팡하며 흔들렸다.

그녀의 앞에 놓인 선택지는 원래 하나였다.

황제의 손에 이끌려 먼 타국으로 팔려나가는 것.

비극적이긴 해도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제국의 황녀 출신이니 감히 자신을 하대할 수 있는 이도 없을뿐더러, 황제가 고른 신랑감은 외모는 별로일지라도 성품은 괜찮을 것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감시 아래 놓여 있지 않으니 이곳보다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레베카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카트린느는 반은 체념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베카가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를 내밀었다.

험난하고 수고스럽지만 가슴이 뛰는 길.

황녀나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카트린느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이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카트린느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완전히 믿게 되는 건 좀 더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나로선 이보다 좋은 제안이 없군.”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황녀님.”

둘은 계획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레베카는 도자기로 만든 탁상시계를 흘깃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요.”

남편이란 말에 카트린느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뭐가 말입니까?”

“나의 우둔한 투기심으로 곤란하게 한 것 말이야. 사실 자네의 말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어. 요하네스 공작에게 사심은 없었네. 답답한 마음을 화풀이한 것뿐이야. 부끄럽고 미안해.”

“괘념치 마십시오. 그 덕에 좋은 걸 얻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 다행이다만…….”

카트린느는 머쓱했는지 어깨 위로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았다.

그리고 살뜰하게 레베카를 배웅했다.

레베카가 문을 나서기 직전 카트린느가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레베카.”

레베카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고마워.”

진심이 가득 느껴지는 말투였다.

레베카는 들어올 때와 달리 따뜻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카트린느의 눈빛을 가만히 보았다.

오늘 자신의 행동으로 카트린느의 운명이 어떻게 뒤바뀔지는 레베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생보다 그녀가 행복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레베카는 카트린느의 말에 화답하듯 싱긋 웃어 보였다.

“사소한 실수쯤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이지요. 전 그걸 눈감아 드렸을 뿐입니다.”

카트린느는 멍하니 레베카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가녀린 그녀의 어깨가 순간 태산처럼 크게 보였다.

황녀로 사는 동안 그녀는 수많은 스승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레베카만큼 세상을 통달한 것 같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카트린느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었다. 연금술 말고도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카트린느를 만나고 난 뒤 보름이 지났다.

황궁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레베카와 카트린느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카트린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레베카를 찾았다.

황녀가 여전히 율리안을 잊지 못해 공작 성을 찾는다는 가십이 퍼지기도 했다.

세간의 눈이 어떻든 카트린느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카린’이라는 이름으로 연금술탑의 말단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연금술탑에서 하루하루를 기쁨에 젖은 나날을 보낸 카트린느는 레베카와의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

그녀 덕에 라본느 살롱은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기쁨의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카트린느가 황후와 함께 라본느 살롱을 찾았던 게 폭발적인 유행의 시작이었다.

황후와 황녀는 라본느 살롱을 검소한데 기품까지 있는 장소라 극찬을 표했고, 이 소식은 전국에 널리 퍼졌다.

특히 카트린느는 모든 사교 모임을 라본느 살롱에서 열었다.

갑작스런 황녀의 태도 변화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들도 곧 라본느 살롱에 마음을 빼앗겼다.

모임의 주제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살롱의 편의성에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그저 요구사항을 말한 뒤 돈만 내면 되는 아주 편리한 구조였다.

엇비슷한 소품들을 재활용할 때가 많았지만 적절하게 배치한 덕에 매번 새로웠다.

무엇보다 의뢰인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한 완벽한 내부 장식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생일 파티부터 시작해서 가벼운 티파티까지, 언제나 의뢰인의 마음에 쏙 드는 장소가 준비되었다.

다들 공간 디자이너를 알고 싶어 안달이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자신의 저택을 꾸미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살롱 측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가렛의 뛰어난 파티셰 기술도 살롱의 인기에 한몫했다.

마가렛이 만드는 디저트는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황궁에서나 볼 법한 고급스런 외양에 풍부한 맛까지 더해졌다.

어떤 케이크는 하루 한정 수량을 내걸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집보다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처음에는 여자들만 살롱을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가족들 몰래 은밀한 취미를 즐기려는 남성들도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