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세상에나 너무 바빠서 숨 쉴 틈도 없어!’
레베카는 다나에의 기분 좋은 외침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살롱이 유행하기엔 시기가 이르다 생각해 걱정했었다.
하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이었다.
불안할 정도로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율리안이 가진 행운이 자신에게 옮겨오기라도 했던 걸까.
레베카는 적막이 내려앉은 성의 복도를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그녀의 조용한 발걸음은 늦은 밤까지도 빛이 새어 나오는 집무실 앞에서 멈춰 섰다.
레베카는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머리를 싸매고서 도안을 그리는데 열의를 다하는 율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레베카는 자신이 온 것도 모른 채 한껏 열중해 있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탓에 그의 팔목이 훤히 내보였다.
율리안이 연필을 쥔 손을 움직일 때마다 굵은 힘줄이 불끈거렸다.
자를 대고 시원하게 연필을 긋는 소리가 레베카의 귀를 긁었다.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하고 율리안의 힘줄을 따라 아랫배가 불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레베카는 잔뜩 구겨진 그의 깊은 미간 사이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베카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눈을 뜨는 율리안의 모습이 가장 매력적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에 집중하는 그도 만만치 않게 유혹적이었다.
“하아…….”
일이 잠시 안 풀리는지 율리안이 긴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지개를 켜던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레베카를 발견했다.
그는 순간 자신이 헛것을 보나 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레베카가 그곳에 서 있는 걸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레베카! 언제 왔어?”
방금까지도 피곤에 찌든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태양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니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해롭다, 해로워. 심장에 아주 해로워.’
레베카는 입술을 질끈 악물고는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일은…… 할 만해?”
“양이 많아서 그렇지, 견딜 만해. 나름 보람도 있고.”
“지금 건 조금 고민하는 것 같은데, 어떤 건지 봐도 될까?”
율리안은 마음에 들 만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제 작업물이 쓰레기라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슬쩍 도안을 제 앞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레베카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보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다시 원래대로 옮겨두었다.
“봐도 좋긴 한데 아직 스케치 단계라는 건 염두에 둬.”
“알겠어!”
레베카는 냉큼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와 팔이 맞닿자 율리안은 몸을 움찔 떨었다.
“이건…… 카트린느 황녀를 위한 방이네?”
“그래. 당신이 부탁했던 첫 VIP룸이지. 방 이름을 아예 카트린느 룸이라고 지을까 생각 중이야.”
“도안만 봐도 얼마나 예쁠지 상상이 가.”
“황녀의 머리색에 맞춰서 붉은색을 중심으로 해서 꾸밀 생각이야. 그리고 이곳에는…….”
레베카는 다시금 열정적인 공간 디자이너로 돌아온 율리안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부탁한 일이었지만 그가 다른 여자를 위해 방을 꾸민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와 황녀는 이어질 뻔한 사이였지 않는가.
레베카는 머릿속에서 카트린느와 율리안을 나란히 세워봤다.
카트린느도 손에 꼽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차가운 얼굴의 자신과 달리 카트린느에게선 불같은 생명력이 느껴졌다.
둘이 썩 잘 어울릴지도…….
‘대체 무슨 멍청한 생각을!’
자신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게 헛된 망상일 뿐이란 걸 레베카는 알고 있었지만 심기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율리안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장미 문양을 새긴 화병을 놓을까 생각해. 어떤 것 같아?”
레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말투로 투덜거렸다.
“카트린느 황녀의 취향을 어떻게 그리 잘 알아? 내가 알던 것보다 친분이 있었나 보네.”
“그녀를 만난 건 연회장이 처음이야. 의뢰인의 취향은 살롱 측에서 조사해서 내게 보내주고 있어. 그런데 당신…….”
율리안은 주름진 레베카의 콧잔등을 유심히 살피다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내가? 아니야!”
레베카가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되레 버럭 화를 냈다.
“그딴 헛소리할 거면 난 이만 자러 갈게.”
“어딜.”
문 쪽으로 달아나려는 레베카의 허리를 율리안이 잡아챘다.
그의 손가락이 옆구리에 닿자 레베카는 간지러움을 못 참고 웃어버렸다.
율리안은 레베카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레베카의 머리를 잡고선 그녀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에 대었다.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눈을 마주쳐왔다.
“난 이렇게 어여쁜 아내를 두고 눈길을 돌리는 그런 못난 사내가 아니야.”
레베카는 나무 덩굴처럼 진득하게 감겨 들어오는 그의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율리안은 능글맞게 레베카를 더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밑에서부터 열기가 확 하고 솟구쳤다.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하고 나서 율리안의 스킨십이 점점 농밀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랑비를 내리듯 스킨십의 강도를 조금씩 늘려갔다.
그리고 레베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반쯤은 흠뻑 젖은 상태였다.
‘알고 보면 연애 천재가 아닐까.’
저주가 아니었다면 그는 여러 영애들을 홀리고 다닐 희대의 바람둥이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는 잘 익은 체리 같은 율리안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입술에서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게 손을 대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율리안의 눈매가 아치처럼 휘어졌다.
‘그만…… 해야겠지.’
그가 이렇게 나오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없던 두근거림에 이성을 놓칠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매번 예쁘게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레베카는 마음을 다시 잡았다.
쪽-
레베카는 율리안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하고는 얼른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율리안이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게 끝이야?”
마치 눈앞에서 흔들던 먹이를 빼앗긴 표정이었다.
레베카는 그의 코끝을 살짝 치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됐지 뭘.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이만 자러 가자.”
“자러 가면…… 하던 거 마저 할 거야?”
율리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레베카는 하마터면 응, 이라고 대답할 뻔했으나 그럭저럭 위기를 넘겼다.
그녀는 집무실의 입구까지 쪼르르 뛰어간 뒤 문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엄포를 놓았다.
“자꾸 그러면 각방 쓰자고 할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이 부인 말을 듣도록 해야겠네.”
익숙한 일인 듯 율리안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 빠르게 체념했다.
그는 집무실을 대충 정리하고는 레베카의 뒤를 따라나섰다.
마석 전등이 은은하게 복도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와중 율리안이 집요하게 레베카에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그래도 팔베개 정도는 허락해 줄 거지?”
본성을 억누르느라 단단히 다물고 있던 레베카의 잇새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레베카는 짐짓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허락해 줄게.”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냄새가 나는 물씬 나는 밤이었다.
공작 내외의 침실에선 밤공기에도 식지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율리안과 레베카의 다정한 말들로 차가운 새벽이 달아올랐다.
* * *
샬럿은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탕수수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꾼 몇몇이 물을 뿌리며 불이 옆으로 번지는 걸 막고 있었다.
불이 다 타면 평민 인질과 원주민으로 구성된 일꾼들이 사탕수수 줄기를 긴 칼로 베어낼 것이었다.
낮은 계급의 귀족 인질들은 사탕수수를 추출기에 넣는 일을 주로 했다.
여기에서조차 출신에 따라 노동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샬럿은 치를 떨었다.
“아가씨께서는 일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 자꾸만 나오시네.”
허리에 묵직한 총을 달그락거리며 총감독관 테디가 샬럿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고하게 서 있는 샬럿을 아래위로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로 데려왔던 게 꼬꼬마 시절이었는데 정말 근사하게 자라셨단 말이지.”
테디는 능글맞게 웃으며 한쪽으로 땋아 내린 데본셔가 특유의 금발에 손을 뻗었다.
샬럿은 그의 손을 매섭게 쳐내며 총명함이 감도는 녹안을 치켜떴다.
“비록 잡혀 있는 몸이지만 내가 뭘 하든 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닐 텐데. 어차피 죽기 전에는 이 섬에서 나갈 수 없을 거니까.”
샬럿은 귀족적인 턱을 쳐들고선 마체테를 위협적으로 쥐었다.
그러자 테디가 한 발짝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뭐. 본인이 고생하겠다는데 맘대로 하쇼. 대신 백작저에서 보낸 사람이 아가씨 손이 엉망인 걸 질책한다면 제 탓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샬럿은 백작저에서 사람이 와도 자신이 그를 결코 만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그런데도 테디는 샬럿을 특별 취급하곤 했다,
그는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섬을 떴을 때 샬럿이 제 출셋길을 열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모양이었다.
“퉷!”
샬럿은 일꾼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테디의 뒤를 향해 신랄하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마체테를 들고는 진압이 끝난 사탕수수밭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제플린의 사촌이었기에 모든 노동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샬럿은 가장 고된 일을 자발적으로 도맡았다. 손을 놀리는 동안에는 잡념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샬럿은 숯검댕을 볼에 묻혀가며 사탕수수를 베어냈다.
서걱서걱 썰려 나가는 사탕수수대가 제플린의 목이라 생각하며 샬럿은 사정없이 마체테를 휘둘렀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흐르기 시작하자 샬럿은 잠시 허리를 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리조트의 첨탑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첨탑을 여러 개 지어서 멀리서 볼 때 리조트가 왕관처럼 보이게끔 건축했다고 들었다.
리조트의 모양 자체만으로도 큰 홍보가 돼서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였다고 했지만 샬럿이 보기에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샬럿은 강한 햇볕에 번쩍거리는 금빛 첨탑을 가만히 노려봤다.
언제 보아도 자신의 처지를 조롱하는 듯한 눈부심이었다.
샬럿은 다시 시선을 땅으로 돌려 묵묵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