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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0화 (140/232)

140.

이곳에 끌려 온 지 어언 10년이 지났다. 이젠 어머니 아버지의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했다.

처음에 제플린은 사람들을 한 군데에 가둬두기만 했다.

하지만 인질이 점점 늘어나자 그들을 관리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플린은 섬 안에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고는 인질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자본을 꽤 모은 것 같았다. 제플린은 그 돈으로 인질들을 잡아둔 섬에 커다란 온천 리조트를 지었다.

처음 리조트가 들어섰을 때 샬럿은 미약한 희망을 가졌다.

리조트엔 분명 돈 많은 귀족들이 바글거릴 테고, 그중 한 명만 잡고 하소연해도 이곳의 정체를 알릴 수 있었다.

사탕수수 농장과 관광지 사이에는 경계선처럼 커다란 밀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샬럿은 그곳을 통해 리조트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밀림 곳곳에는 경비병들이 숨어 있었고, 그녀의 탈출극은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테디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들 노곤한 허리를 매만지며 어느새 내려앉은 땅거미를 밟았다.

농장으로 왔을 때처럼 인질들은 일렬로 늘어서 경비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과연 그곳을 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용암 동굴을 개조하여 만든 이곳은 자연이 만든 거대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경비병들이 거대한 돌문을 열자 차갑고 축축한 습기가 마중 나오듯 안에서 흘러나왔다.

동굴 안으로 모든 사람이 들어가자 경비병들은 다시 돌문을 닫았다.

돌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쿠웅-

육중한 문이 완전히 닫혔다. 횃불만이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주었다.

“오늘도 나갔다 오셨나 봅니다.”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샬럿은 부드러운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한 샬럿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이노텐 님!”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이노텐의 미간 정중앙에는 부엉이의 눈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카디르 교인들의 것보다 월등히 큰 크기의 문신이었다.

“매번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몸을 움직여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왜 이노텐 님께서 제게 감사 인사를 하세요. 동굴에만 있으면 속이 답답해서 움직인 거예요.”

“맞습니다. 감기에 걸린 제 딸아이를 위해 아가씨께서 대신 나서신 거니 감사 인사는 제가 해야 하지요.”

하리샤가 스튜와 빵이 담긴 쟁반을 샬럿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시장하실 것 같아 음식을 좀 만들어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대신 일을 가주신 덕분에 딸아이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크로울리 부인의 스튜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샬럿은 얼른 쟁반 위의 스튜 그릇을 들어 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뜨끈한 야채 스튜가 빈속에 들어가자 하루의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다.

게 눈 감추듯 빠르게 빵까지 입에 욱여넣은 샬럿은 탁 소리를 내며 쟁반 위에 빈 그릇을 올려두었다.

“역시 맛있네요. 나중에 이곳에서 나가면 부인의 이름을 걸고 가게 하나 차려도 되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곳에서 나간다면…….”

하리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누구보다 밝게 지내던 그녀는 요즘 들어 부쩍 침울해진 모습을 보이곤 했다.

샬럿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도 아드님 걱정에 잠을 못 주무시는 건가요?”

“소식이 끊긴 지 벌써 몇 달째예요. 제 가족은 좋아하지 않더라도 편지는 꼬박꼬박 부치던 아이인데…….”

하리샤가 낯빛을 흐렸다.

샬럿은 살갑게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무슨 바쁜 일이 생긴 거겠지요. 그리고 백작이 아드님을 무척 신뢰한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아마 무사할 거예요.”

“그러겠죠? 믿음을 좀 더 가져봐야겠어요.”

하리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이만 제 자리로 돌아가겠어요. 아가씨께서 푹 쉴 수 있게요.”

하리샤가 발을 돌리는 순간 동굴 전체에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약한 진동이라 휘청거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진은 몇 분간 지속되어서야 멈췄다.

동굴 벽면을 만져보던 이노텐이 나긋하게 말했다.

“땅 속의 불씨가 동면을 끝내려나 봅니다.”

“그럼 큰일이 아닌가요?”

“글쎄요. 그 또한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샬럿은 인자하게 웃어 보이는 이노텐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이 있는 섬은 죽은 화산섬이었다.

인접한 섬들이 활화산이긴 했으나 지난 몇백 년간 이곳에서 분출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작은 지진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어지간한 일에 조바심을 내는 일이 없는 샬럿도 슬그머니 걱정이 되던 찰나였다.

만약 화산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동굴 안에 있는 인질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부모님의 손을 다시 맞잡아 보지도 못한 채 죽을 수는 없었다.

샬럿의 두 눈에 근심이 내려앉자 이노텐이 더욱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인간은 신의 원대한 뜻을 견디기엔 나약한 존재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예배를 드리는 게 어떨는지요. 다 같이 마음을 공고히 합시다.”

이노텐의 말에 하리샤가 단번에 얼굴을 폈다.

“예.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럼 불을 예배당으로 옮겨 주십시오.”

이노텐은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도록 들고선 그 위에 훅하고 숨결을 뱉어냈다.

곧이어 푸른 불꽃이 그의 손 위로 둥둥 떠올랐다.

그는 하리샤가 들고 있는 쟁반에 불꽃을 내려놓았다.

불꽃은 순식간에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답게 일렁였다.

언제 보아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샬럿이 처음 이노텐이 불을 만들어내는 걸 보았을 땐 속임수를 부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며 이것저것 살펴봤지만 수상한 점은 찾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불을 만들어내는 사내였다.

하지만 이렇게 불꽃을 뱉어낸 다음이면 이노텐은 어김없이 기침을 토하며 괴로워했다.

불꽃을 바라보던 샬럿의 시선이 곧바로 이노텐을 향했다.

“쿨럭…….”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벽을 짚고서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샬럿이 그를 부축하려 하자 이노텐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요즘 들어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요. 보십시오. 이제 기침도 몇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도 무슨 징조일까요?”

하리샤가 기대에 찬 눈으로 이노텐을 올려다봤다.

“한낱 인간이 어찌 앞날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뜻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것뿐입니다.”

‘사람 좋은 소리…….’

샬럿은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어 억지로 웃는 시늉만 했다.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평생 이 섬에 갇혀 살아야 할 노릇이었다.

재수 없으면 화산이라도 폭발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뭐든지 해야 해.’

아직 카디르식 예배가 준비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샬럿은 딱히 신앙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뒤숭숭한 날에는 예배에 종종 참석하곤 했다.

원래라면 이곳에선 예배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경비병들도 큰 소란이 아니라면 동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딱히 참견을 하지 않았다.

인질들보다 자유롭다는 점을 제외하면 경비병들 또한 이곳에 갇혀 있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인질들을 조금은 측은하게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덕분에 동굴 안에서만큼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리샤와 이노텐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넨 뒤 샬럿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이라기엔 가림막 천으로 문을 만들어 두고 책상과 침대 하나가 덜렁 있을 뿐이었다.

이마저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좋은 여건이었다.

샬럿은 초에 불을 붙이고는 어젯밤에 쓰다 만 편지를 이어서 썼다.

이 편지가 정말로 부모님에게 전달되고 있는 건지, 부모님이 보내오는 답장이 정말 그들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뭐라도 해야 살 것만 같았다.

부디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며 살럿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어딜 가려는 거야?”

레베카가 조심스럽게 방을 벗어나 복도에 섰을 때 날 선 음성이 날아들었다.

레베카는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침 식사를 담은 쟁반을 든 율리안이 그녀의 로브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자, 잠시 산책을 좀…….”

“레베카.”

율리안의 굳은 얼굴을 본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알겠어. 다시 들어가면 되잖아.”

그녀는 툴툴거리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플린이 오늘 카지노에 온다는 정보를 들었다. 레베카는 그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곳을 들락거리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웬만한 일은 다 뜻대로 하라 했던 율리안이 이번에는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 탓에 실랑이를 하느라 어젯밤은 제게 등을 돌리고 자기까지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뒤를 따라오며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당분간은 제플린 그 인간을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피로연 때 일을 잊은 거야?”

“이번에는 직접 만나지 않을 거야. 그냥 염탐을 하겠다는 거지.”

레베카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율리안은 말없이 은색 돔 커버를 열었다.

신선한 버터에 노릇하게 익힌 토스트, 반숙 계란프라이와 소시지, 그리고 갓 짜낸 우유 한 컵이 먹음직스럽게 그릇 위에 올려져 있었다.

방울토마토와 구운 아스파라거스가 그 주변을 정갈스럽게 장식해 눈마저 즐거웠다.

없던 식욕이 돌아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포크를 들었다.

율리안이 매일 만들어주는 아침 식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식사였다.

그는 레베카가 간식까지 포함해 하루 다섯 끼를 제대로 챙겨 먹는지 항상 검사했다.

그리고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날이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떠 먹여주기까지 했다.

마치 아기 새의 먹이를 챙기는 어미 새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도 그런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율리안은 쟁반을 제 무릎 위에다 올려두고 버터나이프를 들어 토스트에 사과잼을 슥슥 발랐다.

레베카가 사과잼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뒤로 이곳의 식탁에는 언제나 사과잼이 올라왔다.

율리안이 지시하지 않아도 고용인들이 알아서 대량의 사과잼을 만들어뒀다.

레베카는 바삭한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으음…….”

혀를 감듯이 퍼지는 버터의 풍미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평범한 토스트를 황궁 정찬에 내도 좋을 만큼 맛있게 구워낸 비법이 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레베카의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입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율리안의 낯빛이 차차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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