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1화 (141/232)

141.

그는 일전에 피로연장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는 레베카를 구하겠다고 호언장담하다가 제플린에게 배를 얻어맞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플린이 레오를 가격한 것이었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었다.

‘그 정도도 참지 못하고…….’

이전과는 결이 다른 자기혐오가 율리안을 괴롭게 했다.

그때 칸나가 없었더라면 레베카를 지키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숲속에서 살을 태우던 자신에게 레베카가 달려왔던 그날.

그녀가 긴박하게 자신을 찾고 있었다고 들었다.

레베카는 그 연유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율리안은 대강의 상황을 짐작했다.

그날 레베카는 갑작스런 알리시아의 출산을 도우려 데본셔 저택에 갔다고 들었다.

분명 거기서 제플린을 만났겠지.

그에게 상처 입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그녀를 상상하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개 같은 자식.’

그를 직접 죽이지 않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하루빨리 그의 사지를 잘라내서라도 레베카 앞에 바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머릿결에 내려앉은 햇살에 눈이 부신 듯 잠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요즘 들어 그는 일상의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레베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눈으로 쓸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릴리를 위한 아침을 손수 준비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게 이토록 즐거운 일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이후로 바쁜 일이 있으면 잠깐 서로 일을 하다가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먹었다.

식사를 함께하지 못한 날에는 적어도 하루 한 번 이상 산책은 꼭 같이했다.

레베카는 웃다가도 돌연 쓸쓸한 표정을 짓곤 했다.

율리안은 발작처럼 그녀를 괴롭히는 고독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나 웃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레베카가 침울해지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녀를 서둘러 밖으로 이끌었다.

말을 타고 영지를 돌아보거나 숲을 거닐었다.

새끼 고양이들을 그녀의 품에 안겨 주기도 하고, 새롭고 신기한 것이 생기면 그녀를 먼저 찾았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에는 그녀와 함께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거나 릴리와 함께 뛰어 놀았다.

그리고 레베카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드는 일은 평생 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비슷하게 흘러가는 일상이었지만 율리안은 매분 매초가 소중했다.

‘나만큼 너도 행복할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건 계약 결혼이었고, 레베카는 어쩌면 자신을 남편이 아니라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지 몰랐다.

모든 걸 이루고 나면 그가 언제나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녀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속으로 이 공작 성이 지긋지긋하다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 그 한 가지뿐이었다.

레베카를 향한 맹목적인 제 마음의 정체를 율리안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소용돌이가 깊은 곳에서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추악한 복수극을 얼른 끝내버리고 레베카를 완전히 자신의 가족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레베카. 내가 할게.”

냅킨으로 입을 닦던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율리안을 바라봤다.

“더럽고 추잡한 일은 내가 다 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 인간을 네 눈에 담을 생각 따위 하지 마.”

율리안은 절박하게 레베카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를 끈적한 눈으로 훑던 제플린의 눈빛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레베카가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제플린에게 충분히 고통받았다.

레베카는 제 어깨를 붙잡는 율리안의 후들거리는 손을 흘깃 바라보았다.

파리하게 질린 그의 얼굴색이 낯설었다.

가족 이외에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레베카는 그의 다정함이 점점 무서워졌다. 익숙해져 버릴까 봐.

어느새 떨쳐내질 못할 정도로 스며들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레베카는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약조는 못하겠지만 이번에는 당신 말 들을게. 나도 제플린의 얼굴은 보기 싫어.”

율리안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이렇게 될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지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입을 벌리고선 그의 세밀한 계획을 들었다.

“처음부터 당신이 갈 생각이었잖아. 완전 준비 만반이었네.”

“그러니까 내가 한다고 그저께부터 이야기했잖아. 귓등으로 들은 사람이 누군데. 그나저나…….”

율리안은 무릎에 올려진 쟁반을 보고서 눈을 찌푸렸다.

접시 위에 구운 아스파라거스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또 채소를 남겼군.”

레베카는 애써 그의 눈빛을 피하면서 얼버무렸다.

“맛이 없단 말이야……. 그래도 방울토마토는 다 먹었어.”

율리안은 단호하게 포크로 아스파라거스를 집더니 레베카 앞에 들이밀었다.

“안 돼. 먹어.”

“오늘만 안 먹으면 안 될까?”

“응. 안 돼.”

율리안은 사람 좋게 웃으며 포크를 레베카의 입 앞까지 가져다 댔다.

레베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걸로 반항해봤지만 의미 없는 몸짓일 뿐이었다.

결국 레베카는 마지못해 아스파라거스를 입에 넣었다.

겨우 입 안의 것을 삼키고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율리안은 여기 왔을 때보다 훨씬 단단해진 그녀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유스타프가 완전히 돌팔이는 아니었는지, 그의 처방대로 식단을 구성하자 레베카는 몰라볼 정도로 튼튼해졌다.

레베카는 공작 성으로 왔을 때만 하더라도 오랜 산책조차 버거워했다.

하지만 이젠 연무장 다섯 바퀴는 무리 없이 뛸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아직도 부러질 것처럼 팔다리가 가느다란 건 여전했지만 이 기세라면 근육도 금방 붙을 것 같았다.

이제 간단한 호신술 정도는 가르쳐줘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을 하며 그는 흘러내린 레베카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드러난 레베카의 둥근 귓바퀴가 아찔할 정도로 귀여웠다.

조각상처럼 새하얀 그녀의 귀를 깨물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치밀었다.

그녀의 귀를 잘근잘근 물고 핥다가 레베카가 간지럽다고 신음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내면 그대로…….

뒤이어 펼쳐지는 상상에 율리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전신으로 퍼지는 열기에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율리안……?”

레베카가 그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는 레베카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기 전에 서둘러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식사를 다 한 걸 봤으니 이제 나는 내 일을 하러 가겠어.”

그는 흘깃 뒤돌아보며 여전히 열감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레베카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의 무구하게 깜빡이는 눈만 바라봐도 애써 가라앉힌 열이 다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율리안은 서둘러 문을 열어 그녀의 체취가 가득한 침실을 벗어났다.

‘미친놈…….’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며 율리안은 제 머리를 문질렀다.

애써 손질한 머리가 형편없이 망가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요즘 들어 자꾸만 불쑥 고개를 내미는 레베카를 향한 욕망에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이 아이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인지한 뒤로 율리안은 줄곧 자신의 욕구를 억압해 왔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자신에게 죄악이었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고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레베카에게 처음 입을 맞췄던 그 순간부터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던 그의 신념이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짧은 입맞춤 정도는 괜찮겠지, 키스는 괜찮겠지 하던 게 점점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다.

이젠 그가 인지하기도 전에 스스로 레베카를 끌어안거나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두려웠다.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책 때문이야.’

크로아가 병명이 적혀 있을 거라 했던 조세핀의 책들은 난잡한 연애 소설이었다.

이에 대해 그가 항의하자 크로아는 찬찬히 읽다 보면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법을 알 수 있을 거란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였다.

율리안은 일단 죽고 싶지 않았기에 속는 셈 치고 소설들을 읽어보기로 했다.

책 속에는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온갖 운우지락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상상력만 더해져 율리안은 더욱 괴로워졌다.

게다가 그가 읽은 책의 결론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이딴 게…… 사랑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한 사랑은 깨끗하고 숭고한, 어느 역경도 이겨내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래서 평생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읽은 책들이 떠드는 사랑이란 그저 온갖 집착과 쾌락으로 버무려진 관계일 뿐이었다.

‘웃기지 마.’

율리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세간에 떠도는 질 낮은 소설들에 불과했다.

그딴 책에 진실이나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는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욕망만을 추구하는 짐승 같은 본능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레베카에게 품는 마음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책 속의 사내들처럼 그녀를 안고 싶었고, 그녀의 곁에 다가오는 남자들은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 비틀린 감정이 사랑일 리가 없다고 율리안은 다시 한번 더 못을 박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두고 이런 상상을 한다는 자체에 죄책감을 느꼈다.

이래서야 제플린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공작님! 준비 다 되었습니다. 환복만 하시면 됩니다.”

복잡한 머리를 싸매고 어찌할 바 모르고 있던 율리안에게 때마침 크로아가 다가왔다.

그에겐 이목을 집중시킬 다른 일이 필요했다.

“그래. 당장 준비하도록 하지.”

율리안은 크로아가 내미는 검은색 마석과 흰색 마석 한 쌍을 받아들었다.

손 안에서 돌을 굴리는 율리안은 황금색으로 변한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크로아는 그의 예리한 눈빛을 보며 뭔가 크게 귀찮은 일이 있을 거란 예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흠. 몰라보겠군.”

율리안은 카지노로 들어서기 전에 쇼윈도를 보며 제 모습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그는 신문 배달부나 쓸 법한 팔각 베레모를 눌러쓰고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약간 허름한 연한 갈색 재킷까지 입고 있으니 누가 봐도 평민 같았다.

하지만 크로아는 못 미덥다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보름 전에 쟀던 치수대로 옷을 지었는데도 재킷이 그의 근육에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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