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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2화 (142/232)

142.

꽉 끼는 옷을 보며 크로아는 혀를 끌끌 찼다.

저 정도의 풍채를 가진 사내는 수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동으로 단련된 게 아닌 근육을 금방 알아볼 자가 한둘은 있을 법도 했다.

새삼 율리안은 변장하기에는 영 불리한 몸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 어째 몸집이 커지신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재킷이 좀 작은 것 같군.”

“무슨 약이라도 드시고 운동하신 겁니까? 최근에 부쩍 훈련에 열을 올리시는 것 같기는 했다만 단기간에 이 정도로…….”

율리안이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고선 대꾸했다.

“뭐라는 거야. 날 그런 얄팍한 수에 의지하는 사람처럼 보는 거야? 정석으로 먹고 운동했어. 그리고 빨리 힘을 키워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

“예? 그게 뭡니까?”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 데본셔 그 자식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또다시 제게 비밀스럽게 구는 율리안 때문에 크로아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레베카가 온 뒤로 율리안은 가장 먼저 레베카에게 조언을 구한 뒤 자신에게 되묻곤 했다.

그 탓에 크로아는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밀리는 서러움을 톡톡하게 느끼고 있었다.

“예상은 했다만 다들 너무하시네.”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카지노 안으로 들어선 율리안이 혀를 끌끌 찼다.

카지노 안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늘어난 것 같았다.

황제의 사치 금지령이 이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든 것 같았다.

자고로 사람이란 하지 말라는 걸 할 때 더 짜릿한 법이었다.

게다가 도박은 황제의 명령 따위로 쉬이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길 사람이 이곳에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황제가 내린 사치 금지령은 거의 훈령에 가까운 정도의 벌금형에 그쳤다.

황제파 귀족이 아닌 이상 제국 내에서 이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몇 없었다.

당연했다.

사치 금지령은 데프리아교의 교리에 명백히 어긋나는 명령이었다.

만약 자히드라가 강력한 형벌을 내리겠다고 선포했다면 신의 기사단이 황궁으로 쳐들어 왔을 수도 있었다.

황제가 사치 금지령을 입 밖에 낸 것만 해도 커다란 성과였다.

율리안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선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카지노를 휙 훑어봤다.

돔형의 높다란 천장에는 창문 하나 없이 데프리아 여신의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여신의 발아래에는 연초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슬롯머신의 쨍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와 잃은 자와 딴 자의 고함이 한데 섞여 어지러웠다.

율리안은 새벽부터, 아니 언제부터 카지노에 머물렀는지 모를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찼다.

“신권이 강력하긴 한가 보군. 다들 황제 무서운 걸 모르는 걸 보니.”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 금지령을 내렸어도 저들은 꾸역꾸역 카지노로 기어 나왔을 위인들입니다.”

크로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환전소로 가 소량의 칩을 교환해 왔다.

칩의 개수를 확인한 율리안이 말했다.

“이렇게 적게 가져왔어?”

“어차피 이 정도만 있어도 온종일 계실 수 있잖아요.”

율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신전의 카지노야말로 신의 축복을 증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율리안이 손을 대는 숫자마다 대박이 났고, 연금술로 만든 슬롯머신에선 잭팟이 터졌다.

교황과 다툼이 있던 날, 복수심에 불탄 율리안은 하루 종일 카지노에 머물렀고, 그날 신전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의 돈을 땄다.

결국 신전은 그에게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율리안은 일주일에 한 번 신전을 방문해야 한다는 규칙을 한 달의 한 번으로 고친 후에야 카지노에서 돈을 따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그래도 적당히 잃어줘야 의심을 받지 않겠지. 더 바꿔 와. 그리고 술도 좀 가져오고.”

“이런 데 돈을 쓰시겠다고요?”

“손해 보겠다는 말은 안 했어.”

율리안이 장난스럽게 입매를 끌어올리자 크로아는 더는 군말하지 않고 그의 말에 따랐다.

율리안은 입구가 잘 보이는 구석 자리의 게임판에 앉아 소다를 탄 위스키를 홀짝였다.

그는 레베카와 같이 살게 된 뒤로 거의 술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악마의 소굴 같은 곳에서 오래 버티고 있으려면 온전한 맨 정신으론 힘들었다.

오늘 제플린이 카지노에 들른다는 콜린의 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언제 방문하는 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 탓에 율리안은 이곳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야만 했다.

수행원을 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신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의 눈이 더 정확했다.

빠짐없이 전부 봐야 했다.

들어왔을 때 그를 반기는 직원부터 시작해, 그가 환전하는 칩의 양, 그리고 나갈 때 누가 배웅하는지도.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딜러가 친절하게 율리안에게 물어왔다.

율리안은 숫자판을 아무렇게나 훑어본 뒤 무심하게 말했다.

“13”

율리안이 선택한 게임판의 룰은 단순했다.

구슬을 돌려서 구슬의 숫자를 맞춘 사람이 판돈을 다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오랫동안 돈을 따간 사람이 별로 없었는지 딜러 앞엔 칩이 가득 쌓여 있었다.

대충 세어보니 번듯한 저택 하나쯤은 살 만큼의 돈이었다.

“그럼 돌리겠습니다.”

도르륵-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게임판에 모인 사람들의 눈도 함께 굴러갔다.

이미 잃은 게 많은 듯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율리안은 구슬의 궤도가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붙박인 듯 입구를 응시하던 율리안이 입으로 술잔을 가져가려던 손을 멈추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환한 금발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의 비열한 눈매만은 숨길 수 없었다.

제플린이었다.

이윽고 흰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부리나케 달려 나와 제플린을 맞이했다.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가 제플린을 서둘러 안으로 안내했다.

“이건 사기야! 너, 저 새끼랑 짜고 친 거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가 있어!”

다른 게임판에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도박꾼 한 명이 딜러의 멱살을 잡으며 소동을 벌였다.

도박꾼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그 옆을 지나가던 흰색 로브의 남자가 휘청거렸다.

그 탓에 그의 로브가 훌렁 벗겨졌다.

그는 허둥지둥 로브를 다시 썼으나 율리안의 매와 같은 눈길은 피하지 못했다.

흰색 로브의 사내를 확인한 율리안의 눈이 잠시간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그는 데스라치노 교황의 수발을 드는 사제였다.

율리안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거, 잭팟이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딜러가 외쳤다.

“13……13입니다! 4번 손님께서 따셨습니다.”

딜러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원래라면 방금 신전에서 주사위를 굴려 높은 숫자를 얻은 2번 손님이 돈을 따갈 차례였다.

그래서 그 2번 손님이 걸었던 25번으로 구슬이 흘러가는 게 맞았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방금 여신님의 축복을 받고 온 참인데!”

2번 손님이 머리를 싸매고는 율리안을 흘겨봤다.

율리안이 피식 웃으며 2번 손님의 어깨를 짚었다.

“내가 자네보다 거하게 축복을 받았나 보지. 그나저나 여신께서 틀리지 않으셨던 것 같네. 이 판돈은 내가 가질 생각이 없으니까.”

“뭐, 뭐라고?”

율리안은 쓸어 담은 칩을 하늘 위로 던졌다.

“알아서 많이 가져가 보시게.”

곧이어 큰 소란이 일었다. 모두들 그가 던진 대량의 칩을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덤벼들었다.

“손님! 자, 잠시만! 진정하시고요!”

딜러는 빠르게 경비들을 불렀다.

건장한 경비들이 도착하자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됐다.

딜러가 한시름 놓았을 때 사태를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율리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율리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으니 제대로 모셔야지?”

* * *

한편, 단장을 끝낸 레베카는 멍하니 앉아 율리안이 말을 타고 사라진 길을 바라봤다.

그가 어리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면 어린아이의 쌈짓돈을 요구하는 것 같아 꺼림칙했었다.

하지만 레베카에게 그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넓은 등을 보면 머리를 기대고 싶었고, 견고한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어느새 그는 레베카에게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게 남편이란 건가.’

이전 생에서 느껴본 적 없던 묘한 안정감이 레베카를 사로잡았다.

계약 결혼이라고, 어차피 끝낼 관계라고 되뇌면서도 제 옆에서 곤히 잠든 그의 수려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제멋대로 숙덕거렸다.

율리안, 이 근사한 남자가 자신과 반지를 나눈 사람이란 사실을 상기하면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레베카는 처절한 복수를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만 해결하려고 했다.

상관없는 사람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자신은 나약했다.

고작 제플린의 입 발린 위협에도 발을 움직이지 못했었다.

누군가가 구해주었으면 하고 연약한 소리를 지껄였다. 피로연 때의 일은 레베카에게 엄청난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그 이후에 데본셔 저택에서 제플린을 만났을 때도 여진처럼 그 여파가 잔잔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자신은 여전히 제플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좀 더 강해지고 싶어.’

그녀는 제플린에게 얻어맞던 레오를 떠올렸다. 동시에 고꾸라지던 율리안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제 복수에 소중한 사람들이 희생하는 일 따위 없게 만들리라고 다시금 다짐했다.

레베카는 허벅지 중앙에 매어놓은 총을 꺼내 들었다.

아름다운 외관과는 달리 그 용도가 매우 섬뜩한 무기였다.

그녀는 총의 버튼을 한 번 눌렀다. 그러자 총의 크기가 커졌다.

레베카는 총을 들어 창밖으로 날아가는 새를 향해 조준했다.

가볍게 만들었음에도 총을 든 손이 부르르 떨려 조준점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졌다 한들 이 정도로는 나뭇잎 하나 제대로 쏘지 못할 게 뻔했다.

레베카는 초조해졌다.

육탄전이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칸나!”

그녀의 부름에 칸나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예. 레베카 님.”

“총 좀 쏠 줄 알아?”

“담을 뛰어넘는 사람의 어깻죽지 정도는 명중시킬 수 있습니다.”

그저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 듯 칸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레베카는 밝은 미소를 띠며 칸나의 어깨를 잡았다.

“잘됐다! 가자!”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사격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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