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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5화 (145/232)

145.

‘최근 들어 신성력이 강해진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레오는 기운이 넘쳤다.

항상 나른하고 몽롱한 상태였던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이건 신성력을 과도하게 끌어올렸을 때나 느낄 법한 증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통도 심해졌다.

그리고 두통이 있은 후에는 잊어버렸던 기억 조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예를 들자면 데프리아 여신과 나눴던 대화라든가.

“레오…….”

레베카가 힘없이 레오를 불렀다.

데프리아 여신을 상기하고 있던 레오는 순간 그녀가 현신이라도 한 줄 알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베카가 왼손을 들어 레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지……. 미안하구나.”

녹진한 탈력감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레오는 그녀가 상당히 지쳐 있다는 걸 단박에 이해했다.

그리고 전해지지 않을 위로를 속으로 읊조렸다.

‘아니. 걱정해야 하는 건 당신이지. 그래도 목걸이를 부순 건 속이 다 시원했어. 일단 몸부터 추슬러. 지금 꼴을 율리안이 보면 기절할 거다.’

“그러게. 율리안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나아야 할 텐데.”

‘상태를 보니 그러기는 어려울…….’

“레오. 왜 말을 하다 말……. 어라?”

레베카가 깜짝 놀란 눈으로 레오를 바라봤다.

동시에 레오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레베카와 눈을 마주쳤다.

‘인간! 방금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 * *

부서진 목걸이가 든 상자를 껴안고 알리시아는 허겁지겁 성의 긴 복도를 내달렸다.

정보를 캘 게 있나 싶어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캐서린을 발견한 알리시아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당장 백작저로 돌아가자!”

“예? 이렇게 갑자기요?”

“빨리!”

알리시아의 다급한 외침에 캐서린은 움찔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았다.

그녀는 빠르게 눈치채고는 군말 없이 알리시아와 함께 공작 성의 로비로 향했다.

이미 응접실에 있었던 일이 퍼졌는지 그들을 배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냉대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현관을 막 빠져나간 알리시아가 갑자기 멈춰 섰다.

“어, 어디 갔지?”

“왜 그러세요?”

“없어! 없다고!”

알리시아는 드레스의 주머니를 정신없이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안약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약이야 다시 받아오면 그만이었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보랏빛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제플린의 혐오어린 눈빛이 떠올라 알리시아는 몸을 떨었다.

“너, 이거 잠시 가지고 있어.”

알리시아는 캐서린의 가슴팍으로 상자를 집어던졌다.

“마님!”

캐서린은 방금 도망쳐 나온 공작 성으로 뛰어 들어가는 알리시아의 뒷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 *

“그럼 정말로 내가 네 말을 알아들은 거란 말이야?”

‘그런 것 같군.’

“이유가 뭘까?”

‘나도 잘 모르겠어.’

“혹시 율리안과 붙어 지내서 그런 게 아닐까? 신성력이 옮았다거나…….”

레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성력은 그런 식으로 전해지지 않아. 아주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만 할 수 있어. 그것도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신성력이 있다고 해서 다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렇겠지…….”

‘그래도 답답하지 않아서 좋네. 그동안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종종 있었거든. 다만 부작용만 없길 바랄 뿐이야.’

“부작용이라고?”

‘그래. 율리안처럼…….’

레오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레베카는 그의 시무룩하게 처진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했다.

“그럼 혹시 저주를 내가 대신 가져올 수도 있어?”

‘뭐?’

“네가 아프면 율리안도 아프잖아.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냐는 말이야.”

‘그, 글쎄. 하지만 율리안이 그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이 모르게 하면 되지. 한번 시험해볼까? 약간만 꼬집어 봐서. 아니다. 도저히 네 귀여운 볼따구를 괴롭힐 수 없겠어.”

‘신의 사자를 그따위로 대하는 사람은 너뿐일 거야.’

“신의 사자든 뭐든 내 눈에는 그저 레오일 뿐이야. 율리안처럼 상냥하고 사려 깊은 검은 고양이.”

레베카가 싱긋 웃었다. 레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읊조렸다.

‘넌…… 내가 안 무서워?’

“흐음. 무서워해야 해? 가끔 하악질을 할 때면 무섭긴 하지만.”

‘난 저주를 부르는 불길한 존재야. 나만 아니었다면 너희 둘은 평범한 공작 부부로 살 수 있었어.’

레오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

율리안이 저주받은 공작이 아니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율리안의 저주 때문에 둘은 이어졌고, 동시에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레베카는 레오의 샛노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율리안은 이렇게 맑은 눈동자를 항상 바라보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레오.”

레베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팔이 욱신거려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잇새 사이로 넘기며 레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신의 농간을 네 탓으로 돌리지 마. 그리고 내가 너와 율리안의 저주를 풀어줄게.”

레베카는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어디까지 레오와 통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아는 건 율리안도 알 가능성이 있었다.

다행히 레오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율리안처럼 깊은 속마음까지는 통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왜…… 율리안이 네게 빠져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율리안이 내게 빠져들었어?”

‘당연하지. 그가 너를 볼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듣고 싶은걸?”

레오는 순간 말실수를 했다 싶어 얼른 마음의 통로에 빗장을 걸었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레베카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빗장을 다시 풀고 있었다.

레오는 아직까지도 경련이 일어나는 레베카의 팔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픔을 잊을 만큼 그녀가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오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 그녀에게 전했다.

예상대로 레베카가 활짝 웃기 시작했다.

율리안에게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 하나 더 늘어버렸다.

그리고 이 순간 가져가야 할 비밀이 생긴 이는 레오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저주라고? 레오 님이 아프면 공작도 아파?’

알리시아가 입을 틀어막은 채 문 뒤에 서 있었다.

* * *

“꼭 그렇게 이목을 끄셔야 했습니까?”

크로아가 뚱한 얼굴로 카지노의 명물인 금화 모양의 초콜릿을 우적거리며 씹었다.

“덕분에 이런 좋은 곳에도 와 보고, 괜찮잖아?”

율리안은 널찍한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가 있는 곳은 특별실이었다.

신전과 짜고 치는 게 일상인 카지노였지만 그들도 예상치 못하게 돈을 쓸어 담는 손님이 간혹 있었다.

그들은 이걸 여신의 변덕이라 불렀다.

그대로 두면 카지노의 생태계에 혼란이 찾아왔다.

카지노가 제때 돈을 몰아줘야 할 손님들이 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카지노 측에서 고안해낸 곳이 바로 이 특별실이었다.

여신의 변덕을 받은 손님은 곧장 특별실로 옮겨져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황제 못지않은 대접을 해주지만 더 이상 카지노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아주 깡패나 다름없군.’

율리안은 입구에 서 있는 건장한 경비 두 명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저보다 한 뼘은 작은 사내들이었다.

금방 제압해버리고 나갈 수 있었지만 그에겐 이 방에 볼일이 있었다.

옆방인 귀빈실에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대화를 엿들어야만 했다.

율리안은 주머니에서 새끼손톱만 한 검은색 마석을 꺼내어 귀에 꼈다.

여기로 들어오기 전, 귀빈실로 들어가는 화병에 흰색 마석을 넣어두었다.

흰색 자갈돌 사이의 마석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가 이곳에 가지고 온 한 쌍의 마석은 일정한 사정거리 안에 있으면 서로의 소리를 공유하는 공명 마석이었다.

공명 마석은 흰색 마석이 소리를 흡수하면 검은 마석이 소리를 내뱉는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가히 첩보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발명품이었지만 아직까진 사정거리가 무척 짧다는 단점이 있었다.

율리안은 최대한 벽에 가깝게 소파를 가져간 뒤 그 위에 벌러덩 누웠다.

경비들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자 그는 누운 채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아. 이쪽이 볕이 좋아서 말이지. 그나저나 목이 마르군. 음료나 더 가져다주게. 저 걸신들린 내 친구에게도 다과를 좀 더 가져다주고.”

율리안은 주머니에 금화 초콜릿을 슬쩍 숨기는 크로아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크로아가 멋쩍게 웃었다.

조세핀이 이곳의 초콜릿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나 챙기던 걸 그만 들켜버린 것이다.

“그럼 이제 한숨 자볼까. 푹 쉬다가 서류에 사인하고 갈 거야. 그러니 자네들도 쉬고 있게나.”

말을 마친 율리안은 모자를 얼굴 위에 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방 안에는 크로아가 초콜릿을 뜯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어찌나 적막했던지 경비들이 알게 모르게 하품하는 소리까지 다 들려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의 귓속으로는 정보가 쉴 새 없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 * *

“시간이 많이 지체되는군요.”

제플린의 뒤에 서 있던 베이츠가 시계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귀하신 몸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아쉬운 건 우리 쪽이야. 이 정도의 기다림은 감수해야지.”

제플린은 으르렁거리는 베이츠를 달래며 귀빈실을 슥 훑었다.

커다란 귀빈실의 정중앙에는 슬롯머신을 제외한 카지노의 모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커다란 게임판이 놓여 있었다.

왼쪽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바 테이블이 기다랗게 이어져 있고, 그 맞은편에는 호화로운 침대가 놓인 방이 세 개 정도 있었다.

이 안에서 모든 숙식이 해결이 가능한 구조였다.

제플린은 푹신한 의자에 기대었다.

하늘하늘한 커튼이 그의 어깨 위로 드리우자 그는 인상을 쓰고는 커튼을 치웠다.

게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있게 모든 의자에는 커튼이 달려 있었다.

물론 정체를 밝히기 원한다면 언제든지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체를 숨겼다.

아마도 대놓고 게임을 즐길 수 없는 황제파 놈들이겠지.

제플린이 이 자리에 앉을 만한 인물들을 추려보고 있을 때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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