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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6화 (146/232)

146.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신전과 직통으로 이어지는 뒷문을 열고 나온 데스라치노가 천천히 그의 앞에 착석했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사제가 천을 드리웠다.

살랑거리는 천 뒤로 데스라치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오늘 몰골이 단정치 않아 부득이하게 얼굴을 가릴 것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몰골이 단정치 않다니 그럴 리가.

대중 앞에 자주 서는 그의 직업답게 데스라치노는 최신 유행에 맞춰서 잘 꾸미기로 유명한 자였다.

그저 자신의 표정 변화를 제플린에게 내색하지 않으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

제플린은 데스라치노의 이상한 변명에 코웃음을 쳤지만 태연스레 말했다.

“편한 대로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한데 저자는…….”

베이츠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교황은 제플린과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다.

데본셔가는 대대로 신전과 적대하던 가문이었다.

게다가 제플린은 신성모독죄로 신의 기사단에서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교황의 직분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데프리아교의 교황 자리는 교체 주기가 짧은 편이었다.

교황 자리에서 내려온 자들의 말로가 썩 좋지 않았기에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자가 많았다.

그러니 데스라치노의 경계는 당연한 것이었다.

제플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가 내치고 신전마저 꺼리는 지금의 제 처지가 우스웠다.

황제의 눈 밖에 났다는 게 소문이라도 난 건지 황제파 귀족들이 자신과 교류를 점차 끊기 시작했다.

금전적으로 엮인 이들은 자신을 대놓고 괄시하진 않았지만 이전과 태도가 다른 건 확실했다.

‘꼴좋구나. 제플린. 우리 가문을 말아먹다니.’

문득 자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는 죽어서까지 자신을 종종 괴롭히곤 했다.

제플린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그럴 리가요. 아버지.’

제플린 데본셔는 이따위 일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비뚜름하게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나저나 생각은 굳히셨습니까? 게임이나 하자고 저를 친히 부르신 건 아닐 테고.”

“예. 확신이 섰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거절…… 입니까?”

제플린의 이맛살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연유가 무엇입니까?”

“연유랄 것이 있습니까. 저는 신성한 데프리아 여신님을 섬기는 미천한 존재이고, 요하네스 공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쉬이 내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백작님의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지요. 그럼 이만…….”

장막 사이로 의자를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플린은 꼿꼿하게 몸을 세운 채 말했다.

“만약에.”

“……?”

“만약에 요하네스 공작이 교황님과 정치적인 견해만 다른 게 아니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섯 번째 부인이 도망갔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제 사생활입니다. 백작님께서 왈가왈부하실 게…….”

“그녀의 원래 약혼자가 바리니카라 들었습니다. 이래도 뭔가 짚이는 게 없으십니까?”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교황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그게 무슨…….”

“지금 신전을 괴롭히고 있는 불손한 그림들은 전부 바리니카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바리니카의 행적을 찾을 수는 없으셨겠죠.”

“백작님께선 바리니카가 어디 있는지 아신단 말씀입니까? 아니, 그 전에 그의 작품이라는 걸 어찌 확신하십니까? 그림에는 그의 직인도 없었습니다.”

“물증이 없다 해도 이건 암암리에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데스라치노는 입을 다물었다.

제플린이 대신 말을 이어갔다.

“바리니카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데스라치노의 탄식이 커튼 너머로 들려왔다.

제플린은 그가 더 실망하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허나 누가 빼돌렸는지는 잘 압니다.”

“그게 누굽니까!”

“제게 사냥개라는 훌륭한 사병 조직이 있는 걸 교황님께서도 잘 아실 겁니까.”

“예예. 잘 압니다.”

데스라치노는 얼른 본론부터 말하라는 식으로 몸을 들썩였다.

그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제플린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제 사냥개는 무력뿐만 아니라 정보를 모으는 데도 아주 탁월하지요. 바리니카를 빼돌린 이에 대한 꽤 정확한 단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리니카의 작품인지 어찌 아시냐고 물으셨죠? 당연합니다. 제가 그 작품에 참여했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그를 감시하는 역할이었지만.”

“뭐요?”

제플린은 말없이 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벽보 중 하나를 테이블로 던졌다.

사제가 테이블 위의 벽보를 들고 데스라치노에게 가져다줬다.

데스라치노는 영문을 모른 채로 벽보를 손에 들었다.

벽보 속엔 눈에 실핏줄이 터진 채 광적으로 주사위를 돌리는 사내가 보였다.

언제 봐도 적나라하고 불쾌한 그림이었다.

“이게 어쨌다는 겁니까. 게다가 이 그림은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중죄에 해당한다는 거 모르십니까? 백작께선 또다시 신의 기사단을 만나고 싶으신가 봅니다.”

“아. 신의 기사단. 그땐 참 감사했습니다. 별 조사도 없이 저를 풀어주셔서요.”

“빛의 장미께서 명하신 거니 제게 감사 인사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당신을 풀어주셨는지 원…….”

‘그분들?’

제플린의 눈이 잠시 번뜩였다.

그는 빛의 장미에 대해 아는 점이 거의 없었다. 주로 옥타비오가 연락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플린은 몰랐다는 티를 내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글쎄요. 굳이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나저나 그림을 다시 살펴보시지요. 누군가와 닮지 않았습니까?”

“누굴 닮았다는……. 아니, 이건 당신이 아닙니까?”

제플린은 생각할수록 열이 뻗치는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맞습니다. 아주 감쪽같이 속았죠.”

제가 허락했기는 했으나 제플린은 그 말은 쏙 빼놓고 말을 이어갔다.

“전 바리니카가 그림을 완성하는 걸 감시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한 달간 별장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를 내치려는 함정이었죠. 제 가을 무도회가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었는지는 교황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자히드라 황제가 그런 겁니까? 그 자가 감히!”

“진정하십시오. 아직 속단은 이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제께서 굳이 이런 일을 벌이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호시탐탐 신전을 노리고 있다는 건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위험한 짓을 감행한다고요? 게다가 바리니카는 신전 소속의 화가가 아니었습니까? 저는 배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배후라는 말입니까?”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

“그, 그게 무슨!”

“그가 당신의 다섯 번째 부인을 바리니카와 함께 해외로 도망치게끔 도왔습니다. 증좌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당장 내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오!”

데스라치노가 커튼을 거세게 걷었다. 그 탓에 커튼을 지지하고 있던 지지대가 휘청거렸다.

그는 분노로 시뻘겋게 타오른 얼굴을 한 채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쳤다.

“대관절 요하네스 공작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겁니까?”

“이것 참 불손한 말이 될 것 같아서요. 저를 신의 기사단에 넘기지 않겠다고 약조하셔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데스라치노는 잠시간 제플린을 노려보다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약조하겠소…….”

“황제와 손을 잡고 신전을 무너뜨리는 게 그의 계획입니다.”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다는 말이란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플린은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제부터는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서 교황을 설득해야 했다.

율리안이 바리니카와 그의 약혼녀를 외국으로 빼돌린 건 확실했다.

황제가 자신을 바리니카와 엮은 연유를 찾다가 운 좋게 얻어걸린 증거였다.

교황에게 호기롭게 말을 했지만 그가 앞으로 할 이야기는 오로지 심증에 기대어 지어낸 소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럴싸했다.

아니, 이게 진실이 아니라면 그가 그동안 찾아낸 율리안의 행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그동안 신전의 뒷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모은 치부책을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

“그리고 황제께 바리니카까지 손에 쥐여 주며 속삭였습니다. 제플린 데본셔를 망하게 해달라고. 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의 전 부인인 레베카 오벨리아겠지요.”

데스라치노는 일전에 자신의 발을 지르밟던 그녀를 떠올렸다.

막 이혼한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레베카는 힘이 넘쳤다.

그래서 그는 제플린의 이혼을 레베카가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 추측했다.

곧바로 요하네스 공작과 결혼식을 올린 사실이 그의 추측에 더욱 힘을 실었다.

제플린은 전 부인이란 단어가 아직도 거슬렸다.

그의 눈썹이 잠시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렇겠지요. 그리고 또 나머지 이유는 데프리아교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전을 없애려고 한다는 것.”

“아니, 그러니까 그 말이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신전이 망하면 요하네스 공작가도 망합니다!”

“아니지요. 신전이 망해도 요하네스 공작가는 살아남을 겁니다. 물론 명예가 조금 시들해지긴 할 테지만 그에게는 연금술탑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미 신전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만큼의 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공격할 순 없습니다.”

“요하네스 공작 말입니다. 정말로 축복을 받은 게 맞습니까?”

제플린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데스라치노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처세술에 무척이나 능숙한 사람이었다.

데스치노가 금방 낯을 고치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당연하지요. 요하네스 가문이 받은 축복은 성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데스라치노는 한껏 엄격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의 신성을 의심하는 건 여신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그답지 않게 데스라치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제 부인을 빼돌렸다는 데도 교황은 율리안을 싸고돌았다.

아무래도 요하네스 공작과 신전의 관계는 생각보다 굳건한 모양이었다.

증좌도 없이 이대로 밀어붙이기엔 위험한 짓이었다.

제플린은 잠시 물러나기로 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일개 일반인의 호기심이었습니다.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호기심은 개구리를 죽이는 법이지요. 부디 백작의 호기심이 호기심으로 그치기 바랍니다.”

“그 말, 명심하겠습니다.”

제플린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데스라치노는 못마땅한 듯 그의 노골적인 아부를 바라보다가 사제에게 손짓했다.

사제가 얼른 커튼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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