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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7화 (147/232)

147.

커튼 뒤로 데스라치노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그가 위엄 있게 고개를 쳐드는 걸 지켜보던 제플린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교황의 부인을 함부로 건드린 건 좌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증거가 있는 게 확실합니까?”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를 쉽게 공격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일이 수면에 오른다면 교황께서도 구설에 오르실 수 있습니다. 그건 원치 않으시겠지요.”

“흠, 흠…….”

대놓고 긍정하진 않았지만 곤란하다는 듯한 그의 신음소리가 커튼 뒤에서 흘러나왔다.

제플린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게 좋은 수가 있습니다.”

“좋은 수라니.”

“요하네스 공작의 평판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를 확실히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계책입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하십시오. 저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데스라치노의 재촉에 제플린은 그가 반쯤은 넘어왔다는 걸 확신했다.

“연금술탑을 그의 손에서 빼내오는 겁니다.”

“연금술탑을……?”

“그가 가진 것 중 신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적인 힘은 그림자 군대와 연금술탑, 이 두 가지뿐입니다. 특히 연금술탑은 거대한 부를 공작에게 제공해주고 있죠.”

“백작의 말대로 연금술탑은 율리안 공작의 개인적인 재산입니다. 그걸 어찌 빼앗습니까.”

“그 방도는…….”

베이츠가 이어서 말하려던 제플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제플린이 고개를 돌리며 짜증이 섞인 어투로 그에게 속삭였다.

“뭐야?”

“잠시 실례…….”

말을 마친 베이츠는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화병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화병에 놓인 자잘한 흰색 자갈 중 유난히 매끄러운 돌 하나를 빠르게 집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벌레가 있는 것 같아서요. 계속 이어서 하시죠.”

제플린은 갑작스런 돌발 행동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데스라치노가 그의 제안에 큰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플린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대화를 묵묵히 들으며 베이츠는 손안에 있는 돌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 * *

‘물건을…… 그렇다면…… 공작도…….’

옆방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유심히 듣던 율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여들었다.

아마 누가 마석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부수질 않지?’

그 이유야 어찌 됐든 일단 정보가 중요했다.

율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들려오는 몇 가지의 단어를 가지고 추리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그의 눈앞으로 서류 한 장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사인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인내심의 한계가 온 듯한 표정으로 경비원이 그에게 펜과 서류를 내밀었다.

“조금만…….”

율리안은 귀찮다는 듯 손을 홰홰 젓고는 다시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해주셔야겠습니다.”

인내심의 끈이 끊어진 경비원이 율리안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율리안의 손에 펜을 억지로 쥐여 주려는 찰나, 그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율리안은 제 손을 휘감고 있는 경비원의 우락부락한 팔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고선 뻣뻣하게 얼어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경비원의 등 뒤로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제 먹잇감에 발을 올린 하이에나를 발견한 야수처럼 그의 동공이 커져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경비원이 뒤로 주춤 물러나려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누가 바닥에서 발을 잡아당기는 듯이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살면서 겁이 나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없던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생리적 반응에 적잖이 당황했다.

율리안의 동공 테두리가 서서히 금빛을 띠기 시작했다.

마치 눈 안에서 금환식이 일어나는 듯한 광경에 경비원은 눈을 끔뻑였다.

“자자! 사, 사인을 하고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갑세!”

율리안의 눈동자 색이 변하면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됐다.

크로아가 박수를 치면서 경비원의 등을 잡고 자신에게 돌려세웠다.

크로아의 호들갑에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경비원도 크로아를 바라봤다.

그 덕분에 선명한 황금색으로 완연히 물든 율리안의 눈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젠장. 결국 제대로 못 들었잖아.’

율리안은 크로아가 사인하는 것을 지켜보는 경비원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교황과 제플린의 대화가 끝나 있었다.

“그…… 그쪽도 여기에 사인을…….”

경비원이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율리안은 눈을 잠시 매섭게 치켜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곤 묵묵히 서류를 받아들었다.

“이제 됐지?”

그는 가짜 서명을 휘갈기곤 위조한 신분증을 내밀었다.

경비원은 서명과 신분증의 이름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보내주었다.

“후아……. 간 떨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뭐 알아내신 게 있습니까?”

카지노를 벗어나자 크로아가 다리에 긴장이 풀렸는지 후들거리는 무릎에 손을 올리며 허리를 굽혔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썩 만족스럽지는 않군.”

“그 인간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연금술탑을 공격하겠다고 하더군. 게다가 바리니카를 빼돌린 것도 들켰어.”

“예에? 그럼 큰일이네요!”

“글쎄. 누구에게 큰일일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지.”

율리안이 씨익 웃으며 마침 도착한 객마차에 올라탔다.

크로아는 또 말을 안 해주실 작정이냐고 구시렁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의자에 앉자마자 율리안은 콧수염을 거칠게 떼고는 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좀…… 피곤하군.”

불쾌한 장소에서 불쾌한 이들의 목소리를 계속 들었더니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했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레베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 오라는 한마디만 해도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고 릴리에게 같이 동화책을 읽어준 뒤 침대로 돌아가…….

기나긴 밤을 떠올리자 느슨하게 휘어 있던 그의 허리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무슨 더러운 상상을…….’

또다시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오벨리아가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꽃밭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사람이었다.

어떤 풍파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이 변하지는 않을 터.

율리안은 그녀에게 손을 댈 때마다 그녀가 오염이 되는 상상을 했다.

고결한 아침 이슬 같은 그녀가 불결한 흙탕물 같은 자신에게 더럽혀지는 끔찍한 상상이었다.

최소한의 욕구만 표출하는 데도 그랬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만큼 그녀를 안게 됐을 때 얼마만큼 후회하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평생 참아왔던 일이다. 지금 와서 참지 못할 것도 없었다.

율리안은 마음속으로 레베카를 향해 달려들려는 자신의 팔다리에 족쇄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어서 빨리 마차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도착하길 간절히 빌었다.

* * *

“베키, 많이 아파?”

의사가 레베카의 팔에 붕대를 단단히 압박하는 걸 지켜보며 릴리가 물었다.

레베카는 한껏 울상인 릴리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근육이 놀란 것뿐이래. 며칠만 쉬면 회복한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낫는 거 맞지? 베키 죽는 거 아니지?”

릴리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자 레베카의 낯빛이 잠시 흐려졌다.

‘레베카는 꿈이 아닌 거야. 그치? 진짜 사람 맞지? 갑자기 사라지는 요정님 같은 게 아니지?’

함께 잘 놀다가도 릴리는 이따금씩 레베카가 진짜인지 볼을 꼬집어 보며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려 들었다.

아무래도 릴리는 자신에게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레베카 때문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레베카가 사라지면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거라 믿는 게 퍽 안쓰러웠다.

릴리는 갑작스런 율리안의 태도의 변화를 아직까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원래의 쾌활한 성격 덕분에 릴리는 곧잘 율리안을 편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가 언짢은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을 더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등짝을 백만 대는 때려주고 싶었다.

‘이 팔로는 그것도 못하겠네.’

참 연약하고 쓸모없는 몸뚱어리였다. 고작 망치질 몇 번에 이렇게 망가지다니.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몸이 회복하는 동안은 수련을 못 하게 됐다.

게다가 하필 오른팔을 다친 터라 당분간은 서류에 제대로 된 사인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쓸모없는 짐짝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레베카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역시 그냥 참는 게 나았으려나.’

잠시 후회가 밀려왔지만 레베카는 다시 돌아가도 자신은 똑같이 했을 거라 생각했다.

제플린은 거머리 같은 사내였다.

떼고 또 떼어내도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는 순간 달려들어 생명력을 앗아가는 거머리였다.

그런 그의 선물을 온전히 돌려보냈더라면 다음번에는 더한 짓거리를 할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팔 한쪽은 값싼 일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잘한 일이라며 다독이던 와중에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레베카!”

거친 숨을 몰아내며 기세 좋게 들이닥친 율리안이 레베카의 몰골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 냉찜질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어서 와.”

레베카가 해맑은 미소를 건넸지만 율리안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공작님! 이건 그럴 만한 사정이…….”

뒤늦게 쫓아온 벨마가 율리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레베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고용인들도 그녀를 두둔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의 귀엔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땅 밑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에 율리안은 휘청거렸다.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스스로 해쳤다.

그동안 레베카가 제 몸을 내던졌던 일들이 율리안의 머릿속을 잔인하게 할퀴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바쳐 지키고 싶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져 버리는 걸까.

율리안은 그간 레베카를 지키기 위해 끙끙 앓았던 자신이 우스워진 것 같았다.

“큰 부상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율리안의 핏기가 가신 얼굴을 걱정스레 올려다보던 레베카가 말했다.

“당신은……!”

율리안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불안하게 자신과 레베카를 번갈아 보는 릴리를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손짓 발짓 하나에도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아이였다.

여기서 그녀와 싸움이라도 벌였다가는 어렵사리 얻은 릴리의 마음이 다시 닫혀 버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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