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율리안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릴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다리를 접었다.
“릴리. 네 선물을 사 온 게 있으니 보러 갈래? 네 방에 가져다 뒀어. 난 레베카와 잠시 이야기할 게 있어서 조금 이따가 따라 갈게.”
“베키를 쫓아내려는 거 아니지?”
릴리가 레베카의 왼쪽 손을 꼭 붙잡은 채 율리안을 향해 적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마치 그에게서 레베카를 지켜내려고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릴리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가시처럼 온몸을 찔러댔다.
머리로는 릴리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율리안은 무너져 내리려는 표정을 애써 다잡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죽어도 그런 짓을 할 수 없어. 내 세상에서 너와 레베카는 가장 소중한 존재야.”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레베카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단지 릴리를 안심시키려는 말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면서도 레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볼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엄청난 말을 꺼내놓고도 율리안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레베카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내어주겠어? 부탁할게, 릴리.”
릴리는 호박 같은 율리안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용서를 구할 때처럼 그의 눈동자는 진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릴리가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래. 율리안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곧 책 읽으러 가줄게.”
레베카가 편안하게 웃자 릴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같이 가실까요.”
칸나가 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릴리는 칸나의 손을 잡았지만 아직 마음이 완전히 놓이지는 않았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그럼 저희들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벨마가 눈치껏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침실에는 레베카와 율리안 단둘만이 남았다.
속에서 들끓는 단어들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야 좋을지 몰라 율리안은 잠시간 레베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적막을 견디지 못한 레베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뭐야?”
그의 할 말이 무엇일지 예상이 갔다.
율리안은 악마의 발톱 때문에 아팠던 이후로 항상 제 건강에 유난을 떨었다.
레베카는 억새밭에서 제 앞에서 무너지던 율리안을 떠올렸다.
율리안이 걱정하는 줄 알면서도 또 무모한 짓을 했다.
그러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나쁜 짓을 했다고,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오래된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레베카는 그가 당연히 자신에게 고함을 칠 거라 예상하곤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은 좀 어때.”
예상과 달리 다정한 말투가 들려오자 레베카가 살며시 눈을 떴다.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그가 레베카의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바깥바람이 묻어난 서늘한 손길이었다.
그는 레베카의 오른팔을 흘깃 보며 물었다.
“열은 없네. 혹시 팔이 부러진 건 아니지?”
“아니야. 근육에 과도하게 힘을 줘서 경련이 왔대. 다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라고…….”
“불행 중 다행이군. 하지만 경미한 부상이라고 해도 아픈 건 아픈 거야.”
율리안이 으르렁거리듯 이를 악다물었다.
“제플린의 선물을 부수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였다고 했지?”
“응……. 그걸 보는 순간 부수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고.”
“그럼 굳이 당신이 하지 않아도 됐잖아.”
“…….”
“부수는 게 목적이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 됐잖아. 당신의 몸이 허약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왜 자꾸만 무모한 짓을 벌이는 거지?”
맞는 말이라서 열이 뻗쳤다.
하지만 순간 분노로 이성이 마비되었는데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레베카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자 율리안이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약조했잖아…….”
“약조?”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짓 따위, 이제 하지 않겠다고.”
“이거랑 그건 달라. 그때 한 약속은 자히드라 황제에게 목숨을 바치지 않겠다고 한 거였어.”
“아니. 내겐 다시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걸로 들렸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지금 당장 제플린을 데려올게.”
“뭐……?”
“그 새끼의 머리채를 잡고 와 당신 앞에 내밀어줄게. 그리고 이 칼로 목을 베어버려.”
율리안은 침실 벽 한쪽에 세워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칼자루를 레베카에게 내밀었다.
“그러면 이 미친 짓을 그만두겠어?”
레베카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팔자로 휘어진 눈썹 아래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베카가 조심스레 칼을 밀어냈다.
“그러면 당신이 다치잖아. 귀족 시해는 죄가 무겁다고. 당신이 아무리 요하네스 공작이라도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율리안.”
레베카의 부름에 율리안이 움찔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나는 내 사람 중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고 이 복수를 완성하고 싶어. 내 역량이 부족해서 상관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였어. 그러니 나는 그 사람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 그중에는 당신도 포함돼.”
“당신이 강요한 일이 아니잖아. 다들 당신을 돕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나선 것뿐이야.”
“글쎄. 과연 자발적인 걸까.”
레베카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은 이전 생의 기억을 가지고 모두를 속였다.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손쉽게 호감을 얻어냈다.
그건 강요나 다름없었다. 저열한 짓이었다.
그렇기에 레베카는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을 희생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회귀 후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자신의 복수가 끝난 후에 그 고마운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제플린과 함께 죽어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덤으로 얻은 인생이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이번 생에 미련은 없었다.
레베카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율리안이 싸늘하게 말했다.
“기어코 당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율리안은 누구보다 레베카의 심정을 잘 알았다.
자신도 저주의 굴레를 끝내기 위해 제 한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달랐다.
그녀는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자란 사람이었다.
잠시 그늘이 가렸다고 해서 죽어버리기엔 아까운 사람이었다.
당연히 행복해야 하고 밝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레베카는 언제든지 제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또다시 어머니의 마지막 눈빛과 레베카의 눈빛이 겹쳐졌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레베카는 사라져서는 안 됐다.
이 세상은 자신이 아니라 레베카 같은 사람으로 가득 차야 했다.
율리안이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당신이 죽어버리면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레베카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율리안, 당신은 숨을 쉴 때 의미를 생각해? 내겐 복수는 숨 쉬는 것과 같아. 복수는 내 호흡이고, 덤으로 얻은 이 삶을 살아갈 유일한 이유야. 그러니 내 복수에서 의미를 찾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율리안은 레베카의 담담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 몇 달간 부쩍 밝아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과거를 서서히 잊어간다는, 그래서 복수 따윈 때려치우고 이대로 공작 부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희망찬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었다.
레베카가 받은 상처는 그의 예상보다 깊었고 절대 잊힐 수 없는 것이었다.
‘제플린 데본셔…….’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레베카는 제플린의 만행을 그에게 명확히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거라곤 제플린이 그녀를 인형처럼 백작저에 가둬 둔 것과 오벨리아가에 어마한 채무를 지웠다는 것뿐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가 복수를 꿈꾸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레베카가 백작저에서 탈출하는 걸 도왔다.
오벨리아가가 재기하는 것도 도왔다.
그 결과, 레베카는 이제 요하네스 공작 부인이 되었고 살롱 사업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제플린도 기세가 꺾여 괴로워하고 있지 않은가.
율리안은 이 정도면 성공적인 복수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 말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아직도 불타는 그녀의 복수심이, 제플린 데본셔를 향한 뿌리 깊은 혐오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삶의 이유가 복수라니.
그는 레베카의 말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당신의 삶에…… 내가 또 다른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건가? 릴리가, 칸나가,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이 살아갈 이유가 될 수는 없어?”
이윽고 율리안이 칼을 내동댕이치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왜 당신이…… 당신이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계속 아파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당신은 이제 데본셔 백작 부인도 아니고, 오벨리아엔 빚도 없어. 리베르타의 사람들도 행복하게 잘살고 있잖아. 뭘 더 원하는 거야? 그가 대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레베카는 애원하는 듯한 율리안의 젖은 눈을 응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난 생의 일을 다 털어놓고 싶었다.
제플린은 지옥에서 겨우 도망친 자신을 다시 잡아다가 아이를 빼앗고 화마 속에 던져놓았노라고.
그래서 그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게 견딜 수가 없다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제플린을 혐오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했다.
우연히 크로아에게서 저주를 엿듣고 그를 이용한 것까지 전부 다.
그가 회귀한 사실을 믿지 않는 건 둘째 치고, 레베카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실망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자신에게 화를 내고 다시는 상냥하게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내 세상에서 너와 레베카는 가장 소중한 존재야.’
그가 이토록 자신을 아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그에게 준 게 없었다. 받은 것만 많았다.
그를 계속해서 밀어냈는데도 율리안은 끝없이 자신에게 매달렸다.
“그만하자…….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당신이 다치는 걸 다시 볼 용기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