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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9화 (149/232)

149.

율리안이 레베카의 손을 잡고 간절히 말했다.

“데본셔는 조만간 스스로 괴멸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렇게 된다면 당신이 내 저주를 풀어주고 우린 그대로 같이 살면 돼. 그러니 제발…….”

그의 말처럼 쉽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율리안과의 일상이라니.

말만 들어도 황홀했다.

매일 아침 그가 만든 식사를 하고 간단한 업무를 본 뒤 릴리와 그와 함께 산책을 하는 평온한 삶.

평범한 귀족처럼 화려한 무도회를 열거나 둘이서 한가롭게 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다.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해졌지만 그만큼 짙은 그늘이 레베카의 얼굴 위에 드리워졌다.

레베카는 제 상상 속에서 율리안의 곁에 서 있는 자신을 지웠다.

그리고 그곳에 다른 사람을 채워 넣었다.

속이 쓰렸지만 그가 영원히 미소를 지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애초에 죽었던 사람이니 아쉬워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뇌며 레베카는 절망에 빠진 율리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난 그만둘 수 없어. 이미 출발한 기차처럼 멈출 수가 없어. 미안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견뎌줘. 당신의 행복이 머지않았어. 오늘의 고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힐 일이야.”

그녀는 원래도 이상한 말을 자주 하고는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이해했다.

제가 뭐라고 애원한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다치게 만들 것이라는 걸.

그리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스스로를 해치는 일을 도울 수밖에 없다는 걸.

파르르 떨리던 그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그래. 기어코 당신 마음대로 할 거란 말이지.”

그의 내밀한 곳에서 반항심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율리안이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럼 나도 이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왜 옷을 벗는…….”

레베카는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율리안이 레베카의 턱을 끌더니 곧이어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입술을 겹쳐왔다.

잠시 버둥거리던 레베카는 입 안 깊숙한 곳까지 훑어내리는 그에게 결국 몸을 내맡겼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그의 움직임에 레베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율리안이 입술을 떼어냈다.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그의 두꺼운 목덜미를 끌어안아 다시 키스할 뻔했다.

하지만 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을 보자 레베카는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수풀 사이에서 먹잇감을 노려보는 듯한 샛노란 한 쌍의 눈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촛불이 비쳐들어 마치 불타는 듯했다.

율리안은 침대 머리맡에 허리를 기대고 있던 레베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맨가슴에 머리가 맞닿자 레베카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율리안은 침대 한가운데에 그녀를 내려놓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레베카는 빈틈없이 들어찬 그의 상체 근육을 정신없이 훑어내렸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열기 어린 눈빛에 더 자극을 받은 듯 다시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농밀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는 빠르게 드레스의 리본을 풀어 헤치고 코르셋을 풀었다.

뽀얗게 드러난 레베카의 살갗에 그는 정신없이 입맞춤을 퍼부었다.

매일 밤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애써 참았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저릿한 감각이 발끝까지 휘몰아쳤다. 레베카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그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바위를 얽은 큰 나무 줄기처럼 레베카를 옥죄고 있었다.

“아……!”

환희에 몸을 뒤척이다 레베카의 다친 오른팔이 짓눌렀다.

레베카가 짧은 신음을 토해내자 율리안이 화들짝 놀라며 밑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팔을 붙드는 레베카를 멍하니 보고 있던 그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그는 후회가 가득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레베카를 다시 안아 들어 원래 그녀가 하고 있던 자세로 돌려놓았다.

“율리안…….”

레베카가 그대로 떠나려는 율리안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잡았다.

제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를 떠나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율리안은 그를 잡은 레베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엉망으로 파헤쳐진 옷자락 사이로 꽃처럼 불그스름하게 피어난 제 흔적들이 보였다.

레베카가 내쉬는 밭은 숨이 귀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율리안은 아쉬움이 잔뜩 눈으로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신이 나을 때까진 당분간…… 각방을 써야겠군.”

쿵-

거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꼭 그의 마음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그가 떠난 빈자리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레베카의 뺨 위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 * *

“레베카가…… 내 선물을 부쉈다고?”

제플린은 알리시아가 내민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알리시아는 손톱을 뜯으며 그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상자 안을 확인한 제플린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그녀가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저, 저는 말렸어요! 하지만 레베카 님이…….”

“레베카가 이걸 직접 부쉈어?”

“네?”

그가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알리시아는 뜻밖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직접 부쉈냐고 물었어.”

“네……. 망치를 들고…….”

“망치를 들었다고? 레베카가?”

그녀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 제플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찬찬히 미소가 번졌다.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겠군.”

“가보가 박살이 난 마당에 그게 중요한가요?”

“그녀가 날 계속 기억한다면 이 정도 값은 얼마든지 치를 수 있어.”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묻는 듯 알리시아가 제플린을 쳐다봤다.

제플린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답했다.

“알리시아, 나쁜 기억으로나마 남는 게 잊히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나은 법이야. 어쨌든 날 생각한다는 거잖아?”

제플린은 깨진 다이아몬드 조각 하나를 불빛에 비춰보았다.

“다이아몬드는 깨져도 아름답군.”

“그 너덜너덜한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이런 모양새가 되어도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지. 돌멩이가 아무리 갈고닦아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듯이.”

알리시아는 그 돌멩이가 자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정말 그렇다고 답할까 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다이아몬드 조각을 내려놓으면서 제플린이 알리시아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짙은 금발을 손으로 꼬며 푸른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제플린은 처음에 그녀가 레베카 행세를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감히 알리시아 따위가 레베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 발상만으로도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를 구해준 게 누군지도 몰라보고 옥타비오의 손을 잡은 것도 어이가 없었다.

멍청하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저를 배신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레베카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채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전과는 다른 감상이 들었다.

‘조금 불쌍하긴 하군.’

지금의 알리시아는 궁지에 몰려 버둥거리는 토끼 같았다.

제플린은 흔치 않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제 아들을 낳았다.

저택 안에 사내아이 한 명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아이는 데본셔의 금발과 푸른 눈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자신을 꼭 닮은 귀여운 아이를 끼고 다닌다면 평판도 올라갈 테지.

제플린이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리시아.”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알리시아를 향해 갔다.

듣자하니 옥타비오가 아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고 했다.

아마 새로운 꼭두각시를 찾은 거겠지.

자신을 죽이고 아들을 후계자에 앉힐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뻔한 수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옥타비오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알리시아가 필요했다.

어두운 곳에서 알리시아는 가끔 레베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썩 괜찮은 대용품이었다.

“아들의 이름을 네가 지었다지. 아서…… 라고 했나.”

제플린의 입에서 아서의 이름이 나오자 알리시아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네! 맞아요. 당신의 아들 이름이 아서예요.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니, 좋은 이름이야.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군. 조만간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보도록 할까.”

“지, 진심인가요?”

“거짓말 같나?”

알리시아는 상냥한 제플린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꼭 기억을 잃었을 때로 돌아간 듯해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내가 선물을 잘 전달하고 답장까지 받아오면 상을 준다고 했잖아.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거든.”

그 답장이란 게 섬뜩한 거절의 의미인데도 제플린은 뭐가 그리 좋을까.

이쯤 되자 알리시아는 그가 단단히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어지는 그의 말로 더더욱 굳혀졌다.

“자, 그럼 이제 말해봐. 오늘 레베카는 무슨 옷을 입었지?”

“뭐라고요?”

“레베카가 어떤 향수를 뿌리고 어떤 장신구를 걸쳤느냔 말이야. 내 선물을 받았을 때 표정은 어땠지?”

속사포로 질문을 부어대며 제플린은 알리시아를 품 안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입술로 탐하기 시작했다.

“제, 제플린…….”

“쉬이……. 그런 거 말고. 레베카에 대해서 말해줘. 그녀가 네 손을 잡았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노려보던가?”

제플린이 알리시아를 벽으로 밀쳤다.

알리시아는 그의 광기어린 눈빛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분명 제가 원하던 일이었다. 그가 레베카를 보듯 자신을 보았으면 했다.

그의 인형이 되겠다고, 레베카의 대체품이 되겠다고 선언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하지만 해야만 해. 그가 지금 나를 원하고 있잖아.’

오랜만에 그가 자신을 찾은 것이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알리시아가 뻣뻣한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말했다.

“오, 오늘 레베카 님은 청회색 드레스를 이, 입으셨어요.”

“리본이 달렸나?”

“아니요…… 공단 끈을 허리에 두른 드레스였어요.”

“가느다란 허리가 아주 볼만했겠군. 좋아, 아주 좋아. 알리시아. 더 말해줘, 레베카에 대해 모든 걸!”

제플린은 알리시아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알리시아의 허리는 레베카의 사이즈와 비슷했다.

그는 흡족하게 미소를 짓더니 알리시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가 입술을 뗄 때마다 알리시아는 레베카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제플린은 기꺼이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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