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이제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제플린의 무감한 명령에 알리시아는 돌아누운 제플린의 등을 잠시간 쳐다보다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들고 그의 명대로 침실을 벗어났다.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이곳의 밤이 미치도록 싫었다.
사람으로 북적대는 낮에는 그나마 머리를 비우고 살 수 있었다.
울적한 기분이 들 때면 눈을 들어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데본셔 저택을 바라보면 됐다.
제가 속해 있는 곳이 얼마나 훌륭한 곳인지 상기하다 보면 나쁜 기분이 금방 가셨다.
하지만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밤이 오면 쓸데없는 상념이 밀려 들어왔다.
끔찍했던 과거부터 시작해 앞으로 닥쳐올 미래의 시련이 자꾸만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되도록 일찍 잠에 들었다.
얼른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제플린은 몇 번이나 그녀를 안았다.
그 탓에 알리시아는 스산한 데본셔의 밤에 홀로 내던져진 꼴이 되었다.
‘얼른 자면 돼.’
알리시아는 구슬처럼 뺨 위를 도르륵 굴러가는 눈물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제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계단 위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알리시아의 팔뚝을 잡았다. 등 뒤로 견고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제 앞에 펼쳐진 아찔한 계단을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큰일 날 뻔했구나. 고맙…….”
뒤를 돌아본 알리시아는 잠시 멈칫했다.
어딘가 익숙한 푸른 안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하니 방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는 제플린의 수족과 같은 베이츠였다.
방까지 데려다주는 건 조금 유난스러운 것 같았지만 알리시아는 묵묵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무뚝뚝한 말투엔 어쩐지 다정함이 묻어났다.
방으로 가는 동안 둘 사이엔 침묵이 맴돌았다.
평소라면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재잘거렸을 알리시아였지만 그녀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일상적인 대화가 간절했다. 하지만 그 대화를 이끌어나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베이츠가 친히 방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군더더기 없이 사무적인 태도였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까닥거리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얼른 침대에 눕고 싶었다.
베이츠는 한동안 문고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발을 돌렸다.
* * *
달빛조차 들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 매섭게 치켜뜬 푸른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베이츠는 바위처럼 몇 시간째 요동조차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카지노에서 보았던 기골이 장대한 사내를 떠올렸다.
일부러 만들어낸 것처럼 아름다운 근육을 가진 사내는 제국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
그는 손안에서 연신 굴리고 있던 흰색 마석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돌에서 마나가 흘러나오기에 혹시나 하고 집어 들었던 것이었다.
율리안이 변장을 하고서 카지노를 찾은 날에 때마침 제플린이 있는 귀빈실에서 마석이 나왔다?
우연이라기엔 우스울 정도로 정황이 딱 맞아떨어졌다.
‘염탐을 하러 왔군…….’
도청을 할 수 있는 마석은 공기와 닿는 면적이 작아질수록 그 효과가 떨어진다고 들었다.
제가 마석을 꽉 쥐고 있었으니 공작은 제플린의 핵심적인 계획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플린이 연금술탑을 공격하려는 걸 알았으니 공작은 그에 맞게 충분한 대비를 할 것이었다.
제플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마땅했으나 베이츠는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그는 침실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알리시아를 떠올렸다.
백작 부인이 출산을 했는데도 그녀를 살펴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유령처럼 제플린의 침실을 빠져나오는 그녀의 모습도 그려봤다.
알리시아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레베카처럼.
그는 산통을 호소하는 알리시아를 데려온 레베카를 떠올렸다.
이전에 봤던 레베카와 동일 인물이라 생각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좋아보였다.
알리시아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는 잃어버린 로켓을 습관적으로 찾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로켓을 훔쳐간 용의자로 로드리고가 유력했지만 그의 방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안정을 찾게 하는 물건이 없어지자 베이츠의 인내심이 평소보다 쉽게 바닥이 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이제 목숨값은 다 갚은 것 같군.”
* * *
<그가 갇혀 있던 섬에 거대한 사탕수수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광지를 개발하는 것 같다는…….>
레베카는 로버트의 서신을 읽으며 생각에 빠졌다.
사탕수수는 주로 화산섬에서 재배하고 있는 식물이었다.
그렇다면 인질들이 갇혀 있는 게 화산섬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단정 짓기엔 아직 단서가 모자랐다.
그리고 정보를 제공해 주는 그 낭인의 말을 모두 믿을 순 없었다. 갈대를 사탕수수로 착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며 로드리고의 서신을 꺼내들었다.
찬찬히 읽어내려가던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베이츠라고?”
뜻밖의 이름이 등장했다.
레베카는 서둘러 동봉된 로켓을 열어봤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베이츠가 알리시아를 연모한다라…….
이전 생을 통틀어 봐도 딱히 그런 기색을 느낀 적은 없었다.
베이츠는 얼음장 같은 사내였고 제플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사내였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와 알리시아 사이엔 어떤 접점도 없었다.
‘설마…….’
순간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레베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진의가 어떻든 기억해 둘 만한 정보였다.
레베카는 로드리고의 서신을 내려놓고 상자를 가득 채운 편지를 뒤적거렸다.
섬에 갇힌 인질들이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었다.
혹시라도 편지 속에 섬에 대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 레베카는 꼼꼼히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이 많은 걸 전부 다 읽어야 하는 건가?”
뻑뻑해진 눈가를 문지르고 있는 레베카를 발견한 율리안이 성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율리안은 정말로 레베카와 각방을 썼다.
그녀를 피한다거나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만큼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잃어봐야 소중한 걸 안다고 했던가.
레베카는 새삼 그동안 자신이 율리안의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차갑게 내려앉은 그의 시선을 받아낼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하게 아파 왔다.
지금도 그랬다.
더없이 사무적인 태도로 그는 책상 위에 있는 상자를 들었다.
“혼자 하기 힘들 것 같으니 이만큼은 내가 검토해 보도록 하지.”
“그래…….”
율리안은 레베카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 제 몫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무감한 그의 얼굴을 슬프게 쳐다보다가 책상으로 시선을 내렸다.
책상과 소파 사이의 거리가 우주만큼 벌어진 것만 같았다.
‘그래. 이게 맞는 거였어.’
레베카는 그와 계약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했다.
계약 조건을 달성하고 나면 끊어질 관계였다.
자신은 그를 떠날 예정이었고, 그와의 사이는 차가울수록 좋았다.
‘아는데……. 알고 있는데…….’
레베카는 차오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이미 그를 향해 뛰고 있는 심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려한 대로 자신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냉담한 그의 태도마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좋았다.
‘오히려 이렇게 된 게 잘 된 일일지도 몰라.’
희생에 사랑만큼 강력한 동기는 없었다.
이런 절절한 마음이라면 데프리아 여신도 자신이 목숨을 바쳤을 때 기꺼이 율리안의 저주를 풀어 줄 터였다.
나만 참으면 그만인 일이다.
레베카는 울음을 목구멍 안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편지 더미를 읽어나갔다.
‘아무렇지도 않나 보군…….’
사락사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에 율리안이 레베카를 흘깃 쳐다보았다.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에 집중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시 원래의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레베카는 또다시 스스로를 해할 것이었다.
율리안은 그게 잘못된 거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일부러 냉담하게 구는 동안 레베카는 자신에게 한 마디도 붙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했더라면 율리안은 금세 마음을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기롭게 화를 낼 때만 해도 초조해 하는 것 또한 자신의 몫일 줄을 몰랐다.
힘이 쭉 빠졌다. 철저한 을이 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무기력함에 율리안은 아무런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약…….’
율리안은 자신이 한발 다가갈 때마다 레베카가 방패처럼 내세우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선 계약의 정확한 내용도 기억나질 않았다.
계약을 엎어버리는 건 자신의 특기였다.
그는 그때 계약서를 불에 태워버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냥 모른다고 발뺌해버릴까.
당신은 이미 내 아내가 되었으니 이제 돌이킬 수 없다고.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고 협박이라도 해볼까.
그 소설 속 남자주인공처럼.
‘최악이네.’
그는 자신을 이렇게 궁지까지 몰고 간 여자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제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레베카는 여전히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미웠지만 도저히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율리안은 전해지지 않을 마음을 붙들고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레베카 님!”
칸나가 헐레벌떡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작님도 계셨군요…….”
칸나는 집무실에 감도는 숨 막히는 분위기에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 아직도 서로 대치 중인 것 같았다.
레베카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지 따르면 그만인데 왜 반기를 들어선…….
칸나는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는 레베카를 떠올리곤 율리안을 남몰래 흘겨보았다.
레베카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아. 엘윈 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레베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준비해서 나가야…….”
레베카의 눈길이 편지를 읽고 있는 율리안에게 머물렀다.
율리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급한 일 같으니 갔다 와. 그동안 나는 여기 있는 편지들을 검토해 둘게.”
“그럼…… 부탁할게.”
레베카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칸나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율리안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기랄…….”
영원히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뒷모습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