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엘윈은 라본느 살롱의 거대한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문만 들었지, 이곳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안 들어갈 거면 비키시오!”
누군가 엘윈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투덜거렸다.
그의 말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살롱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요즘 수도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조만간 라본느 살롱에서 봅시다’였다.
라본느 살롱을 따라한 콘셉트의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라본느 살롱의 미술품과 비슷한 것을 구매해달라는 요청도 심심치 않게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이곳은 명실상부 유행의 중심지였다.
엘윈은 휘황찬란한 로비에 발을 디디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보통 고객들의 집으로 찾아가 의뢰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고객은 어딘가 수상했다.
정확한 신원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그저 라본느 살롱으로 오라는 말만 있었다.
조금 꺼림칙해서 그는 몇 번이나 이 의뢰를 거절했다.
하지만 계약금이라며 같이 동봉되어 온 돈이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제플린에게 상납해야 할 돈이 커진 요즘 엘윈은 찬 빵 데운 빵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마 정체를 밝히기 꺼리는 큰손일 거라 여기며 엘윈은 접수대로 향했다.
“엘윈 데본셔 남작님이시죠?”
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직원이 먼저 그에게 다가왔다.
“마, 맞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엘윈은 떨떠름한 얼굴로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가장 구석진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과를 곧 올리겠습니다.”
“아, 예……”
엘윈은 영문을 모른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함정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방 안 분위기가 지나치게 아기자기했다.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가구로 가득 차 있는 방을 보며 그는 의뢰인의 취향이 참 독특하단 생각을 했다.
엘윈은 앙증맞은 분홍색 소파에 엉거주춤 앉았다.
대체 뭘 구해달라고 하려기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걸까.
자신은 예술품을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위험한 물건이라고 해 봤자 최근 값이 몇 배는 오른 바리니카의 작품 정도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과 트레이를 끌고 온 직원이었다.
엘윈은 실망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도로 앉았다.
문을 닫고 들어온 직원이 정성스레 접시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삼단 트레이에 담긴 화려한 디저트를 구경하던 그는 무심코 직원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엘윈은 깜짝 놀라 직원에게 삿대질을 했다.
“잘 지내셨어요. 숙부님? 아, 아니지요. 이제 엘윈 남작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레베카가 모자를 벗으며 싱긋 웃자 엘윈이 놀란 입을 벙긋거렸다.
* * *
“이런 꼴로 나타날 생각은 없었는데, 남작님을 감시하는 사냥개가 끈질겨서 말이죠.”
“그럼 내게 의뢰를 넣은 사람도 혹시……?”
“맞아요. 저예요.”
“날 부른 이유가 뭐야? 아니, 뭡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같이 지낸 세월이 있는데.”
레베카는 싱긋 웃으며 우아하게 작은 마카롱을 입 안에 넣었다.
“으음. 역시 마가렛의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남작님도 드셔보세요. 아주 맛있어요.”
“그, 그래…….”
엘윈은 마지못해 레베카의 청에 따라 마카롱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확실히 맛은 좋았다.
“샬럿도 여기에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쵸?”
남작이 움찔하며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는 얼굴이었다.
“샬럿이 열 살 때 제플린에게 납치되었다고 했던가요. 지금쯤이면 스무 살쯤 되었겠군요.”
“그렇겠지…….”
“가엾어라. 제플린만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서 또래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따님을 찾을 방법이 있어요.”
“뭐라고?”
엘윈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러나 그는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이런 식의 말은 지금까지 많이 들어왔다.
샬럿을 찾으려고 탐정을 고용했을 때, 그들은 모두 호언장담하며 금방이라도 샬럿을 찾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그가 고용한 탐정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시신으로 돌아왔다.
제플린의 짓이 확실했다.
이제 엘윈에게 남은 희망은 그저 제플린이 변덕을 부려 샬럿을 풀어주길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엘윈은 찻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말이라도 고맙네.”
“믿지 않으시는군요. 하긴 갑자기 찾아온 예전의 조카며느리가 하는 말을 쉽게 믿는 것도 이상하지요. 하지만 제겐 정보가 있습니다.”
“정보라고?”
“네. 제플린은 인질들을 어떤 섬에 가둬뒀습니다. 그곳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섬일 확률이 높아요. 인질들은 동굴에서 생활하는 것 같았는데…….”
“샬럿이 동굴에서 살고 있다고? 내 딸이?”
엘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최근 사진을 들여다봐도 그의 머릿속에서 샬럿은 여전히 열 살 난 어린아이 모습에 멈춰 있었다.
그런 어린 딸이 열악한 동굴에서 살고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솟구쳤다.
“어째서…… 그런 거짓말로 내 가슴을 후벼파는 것이냐. 혹시 제플린에 대한 화풀이야?”
레베카는 벌겋게 충혈된 엘윈의 눈동자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딱히 그를 아프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 전해져왔다.
레베카는 이전 생의 그의 최후를 떠올렸다.
제플린은 결국 샬럿을 그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엘윈과 그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데본셔의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서 엘윈은 유일하게 레베카를 사람처럼 대해주었다.
제플린의 눈을 피해 그녀에게 안부를 물어보기도 하고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그렇기에 레베카는 더더욱 샬럿을 찾고 싶었다.
샬럿에게 다정한 부모를 돌려주고 싶었다.
“죄송…… 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전 제가 모은 정보를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증거를 원하신다면 보여드리겠어요. 그 섬에서 탈출했다던 사람이 있거든요.”
“그럼 네 말이 다 진짜라고?”
“네. 백작저에서 있을 때부터 조금씩 조사해 왔던 결과예요. 어떠신가요? 이 정도면 저를 신뢰하실 수 있을까요?”
엘윈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는 레베카의 확신하는 태도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거짓이라면 어떤가.
단 일 퍼센트의 확률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매달려야 했다.
생각보다 빠른 수긍에 레베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해요. 숙부님께서 협조해 주신다면 샬럿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말해주거라. 무엇이든 하겠어.”
“혹시 샬럿에게서 온 편지와 사진을 주실 수 있을까요?”
“편지와 사진?”
“네. 일정한 시기마다 인질들의 소식을 전해준다고 들었어요. 혹시라도 단서가 있을까 싶어…….”
“그럴 리는 없어. 편지는 아주 철저하게 검열돼서 오거든. 이것 봐라.”
엘윈이 품속에서 편지와 사진 뭉치를 꺼내 들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지. 필요하다면 마음껏 봐도 좋지만 딱히 건질 건 없을 거야. 수백 번도 더 읽어봤지만 단서가 될 만한 건 발견하지 못했지.”
레베카는 먼저 사진을 살폈다.
나무줄기를 배경으로 한 사진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똑같은 배경과 똑같은 구도였다.
달라진 것은, 겁먹은 어린아이가 어느새 증오를 품은 여인으로 자라났다는 것뿐.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레베카는 사진을 엘윈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리고 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수상한 점은 없었다.
부모의 안부를 묻는 말과 어서 빨리 여기서 꺼내달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편지 어디에도 섬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레베카는 편지지를 쓸어 보았다.
여기 오기 전 살펴봤던 편지들과 달리 샬럿의 편지에는 꽃이 그려져 있었다.
각기 다른 모양의 꽃이 편지의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꽃은 샬럿이 직접 그린 건가요?”
“아, 그거 말이냐? 제 어미가 꽃을 무척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그린 걸 거다. 상냥하게도 한 번도 잊지 않고 꽃을 그려줬어.”
엘윈의 말에 레베카는 다른 편지들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모든 편지지엔 꽃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저 장식으로 치부하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테두리의 꽃을 찬찬히 살펴보던 레베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모든 꽃의 배열이 똑같아!’
소름 돋을 정도로 잎의 모양과 개수마저 똑같았다.
어떤 편지를 비교해 봐도 테두리에 그려진 꽃들의 그림 순서는 변함이 없었다.
편지를 보낸 시기에 따라 순서가 조금씩 변동되기는 했다. 하지만 변형된 이후로는 똑같은 그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특별한 이유 없이 똑같은 꽃을 계속해서 그려놓았을 리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암호였다.
“남작님. 혹시 편지 중 한 장을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려무나. 네 얼굴을 보니 뭔가 찾은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샬럿이 암호를 쓴 것 같아서요.”
“암호라고……?”
“네. 아직 해석은 못했지만 제가 반드시 뜻을 알아올게요.”
“그렇구나. 샬럿이…… 흔적을…….”
엘윈의 눈앞이 흐려졌다.
자신의 딸은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걸 여태껏 못 알아봤다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레베카는 눈을 훔치는 엘윈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맙…… 구나.”
“이런 상황에 말씀드리기는 뭣하지만,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어요.”
레베카는 잠시 뜸을 들였다.
위험한 일이었기에 엘윈에게 부탁하기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샬럿을 구해내기로 결심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신들을 설득해 주세요. 제플린 데본셔를 버리라고.”
“내 말로 설득해서 가능한 일이었다면 진즉에 제플린을 버렸을 거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잖아요? 제플린이 세를 지나치게 많이 걷는다고 들었어요. 반발심을 품은 가신들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요.”
“그렇긴 하다만…….”
“파블로 자작, 그가 우리 편으로 돌아섰어요.”
“파블로가?”
“네. 두 발로 직접 찾아왔던데요?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앞으로 파블로 같은 가신들이 더 늘어날 테죠.”
“하지만 사냥개들의 눈을 피해서 설득할 방도가 있는가?”
“당연하지요. 열쇠는 남작 부인께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네스는…….”
엘윈이 낯빛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