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샬럿이 납치당한 뒤로 이네스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행사가 아니라면 하루 종일 샬럿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괜찮습니다. 따님의 소식을 알려드리면 분명 기운을 차리실 거예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구나.”
“반드시 그러실 거예요. 어쨌거나 부인께서 해주실 일은 간단합니다.”
“뭐지?”
“가신들의 부인 모임에 참석하셔서 한 마디만 흘려주시면 돼요. 반드시 값비싼 옷들로 치장해서 가셔야 합니다. 아! 제가 보내드리면 되겠군요.”
“부인들의 모임이라……. 그렇지. 사냥개들은 부인을 크게 신경 쓰지 않긴 하지. 그래, 뭐라고 하면 좋겠나.”
“레베카가 살길을 열어둔 것 같더라. 만나고 싶다면 라본느 살롱으로 찾아가라. 그렇게만 말씀해주세요. 그 뒤의 일은 알아서 진행될 겁니다.”
엘윈은 어느새 수심 가득한 얼굴을 벗어던지고 레베카를 멍하니 바라봤다.
예전에도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제플린에게 한없이 아까운 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쌍한 아이가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는 꿈에도 몰랐다.
“샬럿, 꼭 찾아요.”
레베카가 환히 웃었다.
엘윈은 샬럿도 어디선가 그녀처럼 활짝 웃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율리안은 다 읽은 편지들을 차곡차곡 모아 수신인 별로 상자에 정리했다.
역시 검열을 확실히 하는지 단서라고 할 만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활자를 읽은 탓에 눈이 따끔거렸다.
율리안이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누르는데 크로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아펠리가 왔습니다.”
“아, 그래. 시간이 금인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율리안이 짧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레베카의 흔적이 가득한 집무실을 잠시간 시린 눈으로 훑어보다 등을 돌렸다.
율리안은 영원한 빛의 정원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럭스 꽃을 살피고 있는 아펠리가 보였다.
이곳에 와서까지 일을 하고 있다니, 그는 정말 완벽한 일 중독자였다.
“오랜만에 쬐는 햇볕에 졸도하는 건 아니겠지?”
“공작님!”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율리안 뒤로 비쳐드는 햇살이 눈에 부셔 아펠리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럭스 꽃에 뭐라도 있나?”
율리안이 그의 수첩을 넌지시 보며 말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점검 차원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점검까지 해주다니 뒤처리가 확실한 직원이군. 아주 마음에 들어.”
“하하. 공작님의 마음에 든다니 큰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카트린…… 아니 카린은 좀 어때? 쓸 만한 것 같아?”
“쓸 만한 정도가 아닙니다. 카린은 천재입니다! 웬만한 기초 학문은 독학으로 다 배웠고, 심화 과정도 일주일 만에 거의 다 이해했어요. 매번 들고 오는 질문도 어찌나 허를 찌르는 것들인지…… 다들 자신의 제자로 들이려고 아주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래? 그럼 다들 무기 제작에 동의한다는 건가 보군.”
아펠리가 움찔하며 목덜미를 쓸었다.
“그, 그게…….”
“아펠리, 내가 말했잖아. 그녀를 제자로 들이려면 무기 제작에 참여해야 한다고. 아시다시피 아주 어렵게 모신 천재라서 말이야.”
“고려는 해보겠습니다만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연금술로 살상 무기를 대량 생산했다가 고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한 문명이 멸망했었지. 그래서 은밀히 자네들한테 부탁한 게 아닌가. 걱정 마. 난 연금술 무기로 돈 벌 생각은 없어. 그저 호신용이지. 상대방이 총을 들었는데 난 나뭇가지로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펠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어떤 자가 요하네스 공작에게 총을 들이민단 말인가.
율리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어쨌든 심사숙고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그때 멀리서 크로아가 다가와 율리안에게 귓속말을 했다.
“카트린느 황녀께서 오셨습니다.”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때마침 자네의 열성적인 학생이 도착했다고 하니 수업 준비를 하러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 * *
카트린느가 종종걸음으로 공작 성 안으로 들어왔다.
율리안이 그녀를 맞았다.
“황녀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카트린느는 그의 인사에 대충 고개를 숙인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인께선 어디 계시나.”
“제 부인은 오늘 일이 있어 잠시 외출했습니다. 곧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계시겠습니까?”
“알겠네.”
“그럼 항상 찾으신 곳으로 모실까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군.”
율리안은 카트린느를 서재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고용인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숨어든 아펠리가 카트린느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베카가 성에 있는 날이면 카트린느는 그녀와 함께 상점가로 외출하는 척하며 연금술탑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녀가 성에 없을 땐 직접 연금술사를 성으로 데려와 그녀에게 연금술을 가르쳤다.
연금술사들은 카트린느를 평범한 귀족 영애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황녀라는 신분을 알렸을 때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특별 취급이 싫다는 카트린느의 요청 때문이었다.
오랜 핍박의 역사 때문인지 연금술사들은 동료의 비밀을 지켜주는 걸 중요시했다.
영애가 연금술을 한다는 건 평판에 치명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연금술사들은 별다른 질문 없이 카트린느의 비밀 수업에 임했다.
서재로 향하던 카트린느가 율리안을 흘깃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여전했으나 어쩐지 예전만큼의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황궁 정원을 장식한 조각상을 마주한 것처럼 무감한 기분이었다.
카트린느는 새삼 자신이 그와의 미래를 꿈꾸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그에 대한 자그마한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트린느는 레베카의 말대로 자신은 율리안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황제가 원하는 이상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목표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갈망한 것이었다.
이제 다른 목표가 생겼으니 그에 대한 관심이 눈 녹듯 사라진 게 당연했다.
게다가 지금은 율리안보다 레베카가 더 좋았다.
율리안이 레베카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불쑥 끼어들 때면 좀 꺼져주었으면 할 정도였다.
레베카는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한발 앞서 나간 생각을 들려주곤 했다.
그녀는 레베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원하는 것처럼 변화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샘솟았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사실 줄곧 품고 있었지만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서재가 가까워지자 카트린느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어서 빨리 저 안에 있는 지식의 보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칭찬을 받고 혼도 나고 하면서 한층 더 성장해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뛰지 않기 위해 자제력을 발휘하며 힘차게 발을 굴렀다.
* * *
카트린느를 서재까지 에스코트한 뒤 율리안은 숲으로 향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을 때 숲만큼 좋은 장소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왕 바위로 향하려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곳에서 레베카와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율리안은 발에 채는 매끈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런 작은 돌이 몇백, 아니 어쩌면 몇천 년의 세월을 거쳤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아? 어떤 역사를 간직했는지 궁금해.’
돌멩이를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추측하는 레베카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작은 돌멩이, 나무, 잡초 하나까지에도 레베카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레베카가 떠오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온종일 그녀가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율리안이 심장 언저리에 손을 올렸다. 또다시 저릿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최근에 심장통이 괜찮아지나 싶었다.
하지만 레베카와 다툰 날을 기점으로 또다시 극심한 흉통이 시작되었다.
만약 자신이 식물인간이 된다면 그녀는 내 곁에 있을까.
레베카라면 당연히 자신의 곁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율리안은 그러길 원치 않았다.
그건 그가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미래였다.
‘젠장. 연금술탑이나 생각해.’
율리안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쓸데없는 상상을 떨쳐버리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 제플린이 연금술탑을 공격한다고 했었다.
제대로 된 계획은 듣지 못했지만 대충 예상가는 바는 있었다.
굳이 교황을 찾아간 걸 보면 분명 신전이 연관될 만한 일일 것이다.
‘정말 이 커다란 탑이 당신 거란 말이야? 당신이 어릴 때 세운 거라며? 정말 대단하다. 다음에 찬찬히 구경시켜줄래?’
하지만 곧 그의 집중력은 또다시 떠오르는 레베카의 목소리로 흐트러졌다.
연금술탑을 신나게 구경하던 그녀의 상기된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악!”
율리안은 답답함에 소리를 질렀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원할 때 볼 수 있고 살갑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이 정도로 그녀가 그립지는 않았을 텐데.
율리안은 그냥 미친 척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순간 수풀에서 인영이 불쑥 튀어 올랐다.
“무슨 일이야!”
“릴리?”
“오빠……? 소리를 지른 게 오빠였어? 혹시 어디 다친 거야?”
릴리가 율리안을 걱정스레 살폈다.
율리안은 차마 사실을 고할 수 없어 멋쩍게 대답했다.
“아, 그냥 심심해서…….”
“뭐야. 완전 바보 같아.”
릴리가 샐쭉하게 입을 내밀더니 다시 자신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율리안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
“너야말로 어디로 가는 거야?”
“쉬잇!”
릴리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더니 살금살금 걸으라는 시늉을 했다.
영문은 몰랐지만 율리안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어느새 멈춰선 릴리가 속닥거렸다.
“저길 봐.”
릴리가 가리킨 곳엔 태어난 지 몇 주도 안 되어 보이는 새끼 고양이 다섯 마리가 뛰어놀고 있었다.
꽃밭에서 정신없이 나비를 쫓는 새끼 고양이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근처에 있던 어미 고양이가 인기척에 경계하듯 얼굴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다가온 인간이 율리안과 릴리인 걸 확인하곤 다시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만져도 되겠니?”
릴리가 다정하게 어미 고양이에게 물었다.
어미 고양이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꼬리를 한 번 휘두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괜찮대!”
릴리가 환호성을 지르며 조심스레 꽃밭으로 들어갔다.
코스모스 향기가 훅하고 콧잔등을 때렸다.
릴리의 등장에 새끼 고양이들이 혼비백산하며 어미 근처로 도망갔다.
하지만 릴리가 챙겨온 간식을 내밀자 슬그머니 그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곧 경계심을 풀고 릴리의 신발 끈을 물어뜯거나 그녀의 손가락에 관심을 보였다.
릴리가 그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율리안에게 보여줬다.
“너무 귀엽지?”
율리안은 이 평온한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