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해사하게 웃는 릴리와 새끼 고양이, 그리고 자그마한 가을 꽃밭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문득 오벨리아 저택에서 봤던 태피스트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집에서 그와 같은 따스한 광경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게 퍽 충격적이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릴리가 그런 율리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빠도 안아봐.”
릴리의 성화에 율리안이 엉거주춤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새끼 고양이들이 율리안 근처로 모여들었다.
자신의 품에 있던 고양이마저 율리안에게 다가가자 릴리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칫. 다들 오빠만 좋아하네.”
“어쩔 수 없지. 난 고양이와 영혼을 나눈 사이니까.”
율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활발한 새끼 고양이에게 제 손가락을 내주었다.
그의 손가락에 앙증맞은 이빨이 박혔다.
릴리가 흘깃 율리안을 훔쳐봤다.
율리안과 가까워진 뒤 릴리는 그가 자신의 상상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과거의 릴리는 그를 완전무결한 신처럼 생각했었다.
그녀가 아는 율리안은 언제나 냉철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우두머리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막상 그를 옆에서 지켜보니 그는 생각보다 허술한 면이 많았다.
허둥지둥하기도 하고, 바보처럼 웃기도 잘 웃었다. 눈물도 많은 듯했다.
특히 그는 레베카 앞에만 서면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수다스러운 건 기본이고, 가끔 분위기가 싸해지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레베카는 뭐가 재밌는지 그런 농담에도 웃어주었지만 릴리는 그런 제 혈육이 부끄러웠다.
“어어! 그건 위험해.”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야생 엉겅퀴를 건드리려 하자 릴리가 냉큼 그를 안아 들었다.
자줏빛 꽃 밑으로 솟아난 가시가 꽤 위협적이었다.
율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없애버려야겠군.”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야?”
“조세핀이 그랬어.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자란 아이는 일찍 죽는다고. 지금은 내 눈에 보여서 얘를 보호한 거지만, 언젠가는 저게 아픈 식물이란 걸 스스로 깨닫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릴리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용맹한 고양이가 저깟 가시에 죽겠어? 그렇게 따지면 우리 숲 전체에 있는 엉겅퀴는 다 없애버려야지. 그리고 나는 걱정 안 해. 저렇게 든든한 엄마 고양이가 있잖아. 얘네들이 위험한 짓을 하면 엄마 고양이가 막아 줄 거야. 사람이든 동물이든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병이 안 난다고 조세핀이 그랬어.”
말은 마친 릴리가 새끼 고양이의 배를 간지럽혔다.
율리안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봤다.
‘든든한 엄마 고양이…….’
릴리의 품을 벗어난 새끼 고양이가 슬그머니 다시 엉겅퀴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어미 고양이가 득달같이 달려와 앞발로 새끼 고양이의 머리를 후려쳤다.
“내 말 맞지?”
릴리가 해맑게 웃으며 어미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 병이 안 난다고…….’
율리안은 순간 레베카를 떠올렸다.
그가 아는 레베카는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복수를 위해선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건 레베카답지 않았다.
‘아니, 난 레베카를 모른다.’
백작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무슨 계기로 변화되었는지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를 안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줄곧 레베카를 잘 알고 있다고 뻐기고 있었다.
‘난 원래 이기적이야. 이런 사람이라고! 당신 멋대로 만든 틀에 나를 가두지 마.’
억새밭에서 레베카가 소리치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양지 바른 곳에서 자란 레베카라는 망상 속에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가 복수를 소원하는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레베카가 지금 자신의 옆에 있다는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다친 것에 화를 내던 것도, 그녀의 건강에 강박적으로 염려를 하던 것도 다 레베카를 제 옆에 붙들어 두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그래서 그녀가 가진 삶의 이유가 자신이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
‘빌어먹을…….’
제 이기적인 마음을 깨닫자 그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빠. 왜 그래?”
갑자기 우울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는 율리안을 릴리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율리안은 릴리의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멀뚱한 얼굴 위로 레베카가 오기 전 항상 주눅 들어 있던 릴리의 얼굴이 겹쳐졌다.
자신은 릴리에게 했던 짓을 레베카에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혼자 걱정하고 지레짐작해서 결국 상처를 주고 말았다.
레베카가 살아가는 건 복수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고백한 말을 자신은 부정했다.
따뜻한 곳에서 태어난 사람도 자신처럼 어둠에 물들 수 있었다.
‘레베카도 나와 같아.’
그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정녕 그녀를 위한다면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응원해줘야 마땅했다.
위험한 골짜기에 발을 디디면 질책하는 게 아니라 제 한 몸 바쳐 징검다리가 되어주면 될 일이다.
그래서 그 골짜기를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도와주는 게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었다.
삶에 복수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일이었다.
“당장 레베카를 보러 가야겠어.”
율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베키는 지금 성에 없을 텐데?”
“그럼 내가 보러 가면 돼.”
“잠깐만! 오빠!”
릴리가 허겁지겁 새끼 고양이를 품속에서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율리안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릴리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선 심통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멍청이!”
* * *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레베카가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깊게 팬 미간을 보며 칸나도 덩달아 심란해졌다.
살롱의 일은 잘 풀린 게 확실했다.
평소라면 오늘 얻은 수확에 대해 자신과 의논을 할 차례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레베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공작…… 때문인가.’
칸나는 최근 둘 사이에서 감돌던 이상한 기류를 떠올렸다.
서로 그렇게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정작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한겨울처럼 쌀쌀맞은 단어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작에게 잘 대해주지 말걸.’
감히 레베카를 침울하게 만들다니.
칸나는 그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짜증나는 기색을 한숨으로 내몰며 레베카를 따라 창밖을 바라봤다.
소나기라도 오려는지 쨍쨍하던 하늘이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베카는 칸나가 한숨을 내쉬는 것도 모른 채 조금 전 목격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엘윈의 손목에 한 줄의 흉터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레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 흉터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엘윈이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모든 걸 놓으려고 했던 때가 있었네.’
‘샬럿이 그 정도로 소중하신가 봐요…….’
‘소중하지. 내 인생을 걸 만큼. 사람이 사람에게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샬럿이 태어나고 깨달았네. 나와 이네스에게 샬럿은 인생의 전부야.’
‘하지만 그건 샬럿도 반기지 않을 거예요. 새 출발을…… 생각하셨던 적은 없었나요?’
그 순간 엘윈의 눈동자 위로 떠오른 진한 그리움을 마주한 레베카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출발을 하려면 많은 게 필요하지. 그렇지만 우린 모든 걸 샬럿에게 주었네. 새 출발에 필요한 물건이 우리에겐 없어. 그래서 죽으려고 했던 거야.’
엘윈은 텅 빈 얼굴로 하늘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살아 있어서 다행이지 뭔가. 레베카, 너 같은 귀인이 찾아올 줄 알고 신께서 우리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셨나 보구나.’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엘윈의 그리움이 담긴 눈빛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와 그의 아내가 함께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한 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게 율리안의 미래일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껏 자신은 저주를 풀기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율리안이 행복해질 거라 생각 했었다.
물에 소금을 넣으면 짠맛이 나듯 그건 당연한 결과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레베카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다.
만약 율리안이 자신의 복수를 대신 이루겠다고 죽어버린다면 어떤 심정일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왔다.
며칠간 그가 자신을 외면한 것도 참을 수 없었던 자신이었다.
다정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냥 그를 따라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도 나와 같을까…….’
레베카는 제 앞에서 무릎을 꿇던 율리안을 떠올렸다.
자신이 살기 원하는 그 간절한 눈빛이 섬뜩하게 일렁거렸다.
레베카는 복수가 끝나면 목숨을 끊을 거라 그에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무의식중에 짓던 표정과 지껄였던 말들로 율리안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똑똑한 사내니까.
레베카는 솔직한 제 마음속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살고 싶어 하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회귀 후 얻어낸 소중한 것을 손에 쥐고서 욕심으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덤으로 얻은 삶이기에 더욱 놓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소녀가 자신을 노려봤다.
‘난…… 죽고 싶지 않아.’
마음껏 그와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피난처 같은 듬직한 그의 품에 밤마다 안겨 있고 싶었다.
다나에와 테오, 그리고 헤레나와 리비아와 그동안 꿈꿔왔던 일상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주에 고통받는 그를 지켜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저주는 릴리가 이어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제 막 행복은 찾은 아이에게 그런 짐을 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걸 원한 겁니까?’
레베카는 제게 또다시 삶을 준 신을 원망했다.
신은 누구 하나 행복할 수 없는 결말을 원한 걸까.
‘아니.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