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레베카는 기도하듯 다짐을 읊조렸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저주를 푸는 방법이 희생뿐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크로아는 어느 외딴 신전에서 저주를 푸는 법을 찾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계시를 내리는 여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게 거짓이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크로아가 계시의 내용을 말하고자 할 때마다 피를 토했던 걸 보면 그랬다.
으레 신의 진언은 죽음을 동반한다고 했으니.
하지만 그건 계시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찾다 보면 다른 방도가 있을 수도 있었다.
허무맹랑한 희망이 샘솟았다.
그가 죽지 말라고 했다. 사라지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러니 그때까지 나는…….
“속도를…… 속도를 좀 더 높여!”
레베카가 마부석과 연결된 자그마한 창을 열고 소리쳤다.
칸나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는 레베카를 바라봤다.
“제발! 지금 당장 율리안을 봐야겠어!”
그녀의 고함에 화들짝 놀란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방울과 함께 레베카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아직 황녀께서 성에 계시는데 어딜 가시겠다고요?”
“라본느 살롱으로 갈 거야. 당장 레베카를 봐야겠어.”
율리안이 말 위에 올라탔다.
크로아가 쏟아지는 비에 손차양을 만들며 그를 만류했다.
“지금 비도 온다고요! 또 저번처럼 앓으실 작정입니까? 기다리다 보면 부인께선 금방 오실 겁니다!”
“못 기다려.”
말을 마친 율리안은 빠르게 말을 몰아 대문으로 돌진했다.
크로아는 두 손을 격하게 쳐들면서 그에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래요! 마음대로 하십쇼! 대신 오늘 일로 앓아누우신다면 전 이번에야말로 그만두겠습니다! 그만둘 거라고요!”
그는 씩씩거리며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손으로 닦아냈다.
크로아의 격정적인 외침은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거센 비는 아니었지만 옷자락을 흠뻑 적실 만큼의 비였다.
비에 젖어 바닥에 달라붙은 낙엽 더미를 짓밟으며 율리안은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레베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와 길이 엇갈리면 어떡하지? 아직 라본느 살롱에 있어야 할 텐데.
내 말을 듣고 그녀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끊임없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굳건히 닫힌 철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에서 레베카가 다급히 뛰어내렸다.
“레베카 님! 우산을……!”
칸나가 황급히 우산을 들고 레베카의 뒤를 따라 내렸다.
하지만 레베카는 제가 비에 젖고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율리안!”
말을 멈춰 세운 율리안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레베카를 멍하니 바라봤다.
레베카가 젖어든 드레스를 추어올리며 빗속을 뚫고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이, 물에 젖은 짙푸른 눈이, 달콤한 숨결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율리안!”
레베카가 목이 찢어져라 부르짖는 자신의 이름에 율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정없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빗물이 지금 순간이 현실임을 일깨웠다.
그는 서둘러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달려갔다.
심장이 발작하듯 세차게 뛰었다.
“레베카!”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았다.
미안했다고. 당신을 온전히 응원하지 못해서,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제는 당신을 지켜주겠노라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그녀를 가까스로 품 안에 안았을 때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사랑해. 레베카.”
그의 말에 레베카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그녀의 속눈썹에 매달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율리안은 깊은 늪에 발을 담근 기분으로 황망히 레베카를 바라봤다.
어차피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흉통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건 레베카였다.
그녀가 어느새 자신의 심장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가 평생을 두려워하던 일이 기어코 벌어졌다.
결국 그렇게 됐다.
자신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향해 품던 제 더러운 생각들이, 그녀를 가지고 만지고 싶어 욕망으로 꿈틀거리던 밤들도 결국 사랑이었다고.
난잡한 소설 속 이야기는 사랑이 맞았다.
어설프고, 순수하지도 않고,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이야기도 사랑이었다.
율리안은 천천히 레베카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동그란 이마를 지나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눈매를 살폈다.
앙증맞은 콧볼과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말캉한 분홍색 세상이 놀랍도록 사랑스러웠다.
아플 만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 같은 인간도 사랑을 할 수가 있었다.
“레베카. 사랑해. 당신이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만큼 당신을 사랑해.”
레베카는 힘이 쭉 빠져 그의 품에 주저앉듯이 안겼다.
기뻐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레베카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볼을 감쌌다.
언제나 따뜻했던 그의 뺨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손도 그만큼이나 차가웠다.
레베카가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할지 모르는데도 날 사랑해?”
“이미 당신은 내게 충분히 나쁜 짓을 저질렀어.”
율리안이 레베카의 손을 잡고는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손에선 가을비 냄새가 물씬 풍겼다.
비에 젖은 옷이 맞닿자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은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고서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당신이 지금 당장 칼을 들어 날 찌른다 해도 난 당신에게 사랑한다 속삭일 거야. 당신의 눈을 보며 죽어갈 수 있어 행운이라 말할 거야.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 나의 부인. 나의 레베카.”
레베카는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 사이로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그 말을 해도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를 다시 상처 입힐까 봐 무서웠다.
‘아니, 그런 걸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레베카는 제 속마음을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그가 아니라 상처 입을 자신이 두려웠다.
그동안 사랑은 그녀에게 고통이었다. 원하면 원할수록 가시처럼 파고드는 질병 같은 존재였다.
또다시 그 고통이 반복될까 봐.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레베카는 그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낼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었다.
“율리안, 나는…….”
율리안은 레베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대답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제 품 안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이미 증명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 안에 비친 자신의 눈빛과 그녀의 눈빛은 똑 닮아 있었다.
당신도 날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레베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입술은 빗물과 눈물이 뒤섞인 오묘한 맛이 났다.
레베카도 거세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기꺼이 입을 열었다.
살덩이가 서로의 입 안을 격정적으로 탐하기 시작했다.
“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마부가 허둥지둥 시선을 돌리며 진땀을 뺐다.
칸나는 레베카에게 주고 싶었던 우산을 아직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비에 흠뻑 젖어도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니 이제 레베카에게 우산이 필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만 돌아가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칸나가 우산을 펼쳤다.
* * *
벽난로의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걸 보면서 레베카는 몸을 감싸고 있던 담요를 끌어당겼다.
목욕 직후에 불가에 앉아 있으니 온몸이 노곤했다.
“이거 마셔.”
어느새 목욕을 끝낸 율리안이 그녀에게 머그잔 하나를 내밀었다.
레베카는 그가 건넨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였다.
뜨겁고 달큰한 코코아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살 것 같아.”
“머리가 아직 젖어 있네.”
“비가 와서 그런지 잘 안 마르더라고. 그냥 두면 알아서 마르겠지.”
“내가 말려 줄게. 이대로 있다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율리안이 마른 수건을 가져와 레베카의 머리를 꾹꾹 눌러 닦았다.
그는 잠시 벽난로를 바라보더니 수건을 옆에 두고 난로 안에 장작을 더 넣었다.
그가 풀무질하자 난롯불이 화르륵 솟으며 마른 장작을 야금야금 삼켰다.
“가까이 앉는 게 좋겠어.”
그는 난로 앞에 담요를 깔고는 레베카를 번쩍 안아 들어 그 위에 앉혔다.
“한결 더 빨리 마를 거야.”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세세하게 닦는 그의 손길에 레베카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그의 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비누 향에 아랫배가 간지러워 몸을 배배 꼬고 싶은 지경이었다.
“율리안. 나 팔 다 나았어.”
레베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건을 든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율리안은 열기어린 그녀의 눈빛을 보고 웃음을 흘리더니 곧장 그녀의 입술에 달려들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와 장작이 불에 타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둘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동안 못다 한 말을 하듯 서로의 몸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율리안의 커다란 손이 치맛자락을 붙들었을 즈음 노크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
“저어…… 공작님. 카트린느 황녀께서 가신답니다.”
하인의 말에 율리안이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그의 인내심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럼 어서 빨리 궁으로 돌아가라 그래!”
“곧 내려간다고 전해주세요.”
레베카의 말에 문 뒤에서 하인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뭐라고?”
율리안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오늘은 여기까지. 더했다간 혼이 나갈 것만 같아.”
레베카는 제 위에 올라타 있던 그를 부드럽게 밀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예의는 얼어 죽을…….”
율리안은 그대로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리고 온갖 싫은 소리를 내며 마지못해 뻐근한 아랫도리를 움직였다.
그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레베카의 드레스를 손수 입혀주고 그녀의 머리를 한 군데로 땋아 내렸다.
율리안의 능숙한 손길에 레베카가 의심스런 눈빛을 보냈다.
“여자 옷을 입히는 게 굉장히 익숙한 것 같네. 혹시 항간에 떠돌던 소문이 진짜인 건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리야. 내 순결은 당신이 먼저 입증했잖아. 옷이 좋아서 잘 아는 것뿐이야.”
“드레스도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뭐……. 예쁘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레베카에게 입혀보고 싶은 옷을 사 모으다 보니 드레스의 구조를 잘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기엔 조금 부끄러워 율리안은 공연히 뺨을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