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뭐? 황녀가 벌써 가버렸다고?”
“예에……. 두 분이 아직 방에 계신다니까 공작 내외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기 싫으시다면서…….”
크로아가 멋쩍게 웃음을 흘리자 율리안의 눈썹이 치솟았다.
“야! 그러면 왜 알리러 온 거야? 그때 그 말을 전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린…….”
“우린?”
크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나가던 고용인들도 귀를 활짝 열고 율리안의 다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윽!”
레베카가 율리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세게 쳤다. 그리고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오늘은 일찍 저녁을 먹기로 할게요. 주방장에게 일러주시겠어요?”
크로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율리안의 꾹 다문 입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레베카에게 내밀었다.
“대신 이걸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편지네요. 카트린느도 참 제게 잘한다니까요.”
둘은 어느새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레베카는 편지를 받아 그 자리에서 뜯었다.
편지 속에는 오늘은 어떤 수업을 들었고 어떤 칭찬을 들었는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게 마치 처음 학교에 간 아이가 엄마에게 떠드는 것 같아 레베카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율리안도 편지 내용을 흘깃 훔쳐봤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레베카가 편지를 등 뒤로 숨겼다.
“보지 마. 우리 둘만의 이야기니까.”
“뭐라고……?”
율리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짓궂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려고 손을 뻗었다.
“우리 둘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이리 내!”
“어림도 없어!”
레베카는 편지를 품 안에 날름 안고는 그의 손아귀를 피해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둘의 웃음이 넘치는 추격전을 바라보며 크로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빗속에서 벌어진 둘의 뜨거운 키스는 이미 공작 성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레베카를 꼭 보고 가야겠다며 소란을 피우던 카트린느도 그 소문을 듣고 얌전히 황궁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율리안이 먼저 레베카에게 입을 맞췄다고 했으니 그가 드디어 불치병의 정체를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이거 참……. 이제라도 깨달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크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방으로 향했다.
“알았어! 이제 그만해! 보여줄게! 보여주면 되잖아!”
율리안이 레베카의 허리를 잡고 공중으로 번쩍 들었다. 그제야 레베카가 편지를 흔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율리안은 웃음을 머금고서 그녀를 땅으로 내려주었다.
그리고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편지를 함께 읽었다.
편지를 잠자코 읽던 율리안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말했다.
“당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야.”
“나이 차이도 꽤 나는데 이렇게 잘 통하는 게 신기하지.”
“당신과 여덟 살 정도 차이가 났던가?”
“맞아. 그녀가 올해 스무 살이니까…….”
순간 레베카가 눈을 크게 떴다.
변한 분위기에 율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 꽃…….”
레베카는 편지의 끄트머리에 그려진 두 송이의 꽃을 보고 파르르 떨었다.
율리안은 그녀의 눈길이 멈춘 곳 보고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아아. 이거. 황녀의 서명 같은 거야. 친밀함을 표할 때만 쓴다더군. 예전에 연서를 받았을 때 본 적이 있어.”
“율리안!”
레베카가 대뜸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 율리안이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그건 일방적인 편지고, 이미 지난 일이니까…….”
“그게 아니야! 당장 카트린느를 만나야겠어. 마석 마차, 지금 어딨어?”
“그야 성안에 얌전히 있겠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이 꽃……. 샬럿의 편지에 있는 것과 똑같아.”
* * *
제플린이 서재를 나서는 걸 확인한 옥타비오는 얼른 삼층으로 올라갔다.
오늘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면 제플린은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몇 시간은 서재가 비어 있다는 의미였다.
복사해둔 열쇠로 서재의 문을 열고서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최근 들어 베이츠가 서재를 빈번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백작님과 대체 뭘 꾸미는 거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발뺌하지 마. 베이츠, 내가 자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거 잘 알 텐데.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베이츠는 옥타비오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어디 말할 자신이 있으면 해보십시오. 요즘 도련님께 모든 희망을 거시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베이츠는 건방지게 그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옥타비오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곤 이를 아득 깨물었다.
제 손바닥 위에서 춤추던 배우들이 하나둘씩 퇴장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화려한 자신의 연극을 폐막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뭐라도 찾아야 해.’
옥타비오는 쥐 잡듯이 서재를 뒤졌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먼지 한 톨 묻어나오지 않는 책상을 보며 그는 혀를 찼다.
“내가 너무 잘 가르쳤어.”
그는 초조함에 머리를 쓸어올렸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빛의 장미를 만날 수 있는 날이었다.
제플린이 꾸미고 있는 일에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절망어린 그의 눈길이 문가에 놓여 있는 상자에 맞닿았다.
폐지를 모아두는 상자였다. 아직 상자를 비우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옥타비오는 허겁지겁 상자를 열었다.
무더기로 쌓여 있는 찢어진 종이를 뒤지던 옥타비오가 단어 두 개를 찾아냈다.
‘요하네스 공작. 연금술탑.’
그의 직감이 번득이며 고개를 쳐들었다.
옥타비오는 상자에 있는 종이를 탈탈 털어 퍼즐처럼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할 때 즈음 그는 완벽하게 복구된 서류 한 장을 보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이거면…… 충분하겠어!”
그는 이어 붙인 종이를 서류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서재를 원래대로 말끔하게 정돈해 두었다.
옥타비오는 서류 봉투를 소중히 품에 안고 왔던 대로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자 서재 옆에 붙어 있는 제플린의 침실이 스르르 열렸다.
“베이츠, 네 말대로 옥타비오가 미끼를 물었구나. 아주 잘했어.”
“지금이 기회입니다. 빨리 그를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참 그렇지. 베이츠.”
“예. 하명하십시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네게 아주 큰 상을 내리겠다.”
제플린이 신뢰가 가득 담긴 미소를 그에게 건네고 있었다.
베이츠는 그의 웃음을 차갑게 내려다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옥타비오가 향한 곳은 수도 외곽에 있는 버려진 저택이었다.
지붕까지 타고 올라간 수북한 담쟁이넝쿨 때문에 저택의 색상이 무엇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다.
옥타비오가 능숙하게 녹슨 철문을 다섯 번 두들겼다.
그러자 발끝까지 내려오는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철문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유령 같은 그의 몰골에 옥타비오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누구십니까.”
“데본셔가의 옥타비오요.”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데프리아 여신의 행운이 따르기를.”
옥타비오가 성호를 긋자 로브를 입은 사내가 군말 없이 철장을 열어주었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굳게 닫힌 대문이 열렸다.
옥타비오는 가시덤불이 무성한 정원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따라오시지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유일한 빛이라고는 사내가 들고 있는 작은 양초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약한 불빛뿐이었다.
옥타비오는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사내가 어느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옥타비오 리멘입니다.”
사내의 말에 문에 달린 눈만 겨우 보이는 작은 창이 스르르 열렸다.
검은 안광이 두 사람의 몰골을 확인하더니 문을 열어줬다.
“데본셔에 부탁한 일은 이상이 없는가.”
나긋한 목소리가 검게 드리워진 장막 뒤에서 들려왔다.
세 명의 검은 인영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웬만해선 겁을 먹지 않는 그였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 그는 위압감에 다리를 후들거렸다.
몇십 년 전, 빛의 장미는 파비올라를 빼앗겨 허탈하게 무너져 있던 옥타비오를 거둬 들었다.
그리고 복수를 도와주겠다며 옥타비오를 자킴 데본셔에게 소개해주었다.
그에게 자킴의 호감을 사는 법을 일러준 것도 그들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빛의 장미와 함께한 옥타비오였지만 그도 빛의 장미에 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빛의 장미는 초대 황제 때부터 제국을 쥐락펴락하던 데프리아교 장로회였다.
그들의 정체는 물론이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제국의 안정과 데프리아교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황제를 바꿀 수도 있는 위험한 집단이라는 사실만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예…… 없습니다. 매달 주시는 금액이 얼마인데 당연히 변고가 없어야지요.”
“잘됐군. 지혜의 불은 어떠한가.”
“아직도 질기게 명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것 참 유감이구나.”
“오늘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옥타비오는 서류 봉투를 꺼내 옆에 서 있던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내가 서류를 장막 뒤로 가져가 건네었다.
옥타비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플린 데본셔 백작이 요하네스 공작을 모함하려 술수를 쓰려고 합니다. 요하네스 공작이야말로 데프리아교의 심장이 아닙니까. 그를 공격하는 건 신전을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 위험한 계획을 한시 바삐 알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옥타비오는 들려올 경악과 따라올 칭찬을 기대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심드렁한 하품 소리였다.
“그건 우리도 아는 정보다. 더 쓸 만한 정보는 없는가? 예를 들자면 백작이 이런 일을 벌이려는 진짜 이유라든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저의 같은 거 말이지.”
“이유랄 게 뭐가 있습니까. 당연히 전 부인인 레베카를…….”
“그 이유는 제가 직접 설명해 드리지요.”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제플린과 베이츠가 등장했다.
“감히……!”
사내가 칼을 빼 들고 제플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베이츠가 맨손으로 그의 칼자루를 빼앗고는 단번에 때려 눕혔다.
그의 주먹에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보아 이곳으로 들어오는 동안 몇 명은 제압한 모양이었다.
장막 뒤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무례하군. 데본셔 백작.”
“아, 죄송합니다. 제국의 실세를 뵌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그만. 저희가 손해를 끼친 재산들은 충분히 변상하겠습니다.”
제플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장막 뒤에서 스릉- 하고 칼이 뽑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싶진 않습니다. 이제 저런 늙은 정보원을 통할 게 아니라 저와 직통으로 이야기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흐음…….”
“오랫동안 앓던 이를 빼 드리겠습니다.”
“좋다. 대화를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제플린은 비릿하게 웃으며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너…… 너!”
옥타비오가 눈을 뒤집으며 그를 바라봤다.
제플린의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빠르게 속삭였다.
“배신한 사냥개의 최후는 누구보다 잘 알겠지?”
옥타비오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