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56화 (156/232)

156.

레베카를 실은 마차가 수도를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율리안이 마부가 채비하는 짧은 찰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마차를 몰았다.

말의 에너지를 변환하는 마석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카트린느의 마차를 맹렬히 뒤쫓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 인장이 그려진 마차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카트린느!”

레베카가 창문 밖으로 상체를 반쯤 내밀고서 손을 흔들었다.

“레베카, 위험해! 추월할 테니까 들어가 있어!”

율리안의 외침에 레베카가 얼른 몸을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말을 더 빠르게 몰아 가볍게 카트린느의 마차를 앞질렀다.

율리안이 마차를 돌려세우자 굉음과 함께 뒷바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아슬아슬하게 전복을 면한 마차가 바위처럼 길목을 막아섰다.

느닷없는 습격에 황실 마부가 깜짝 놀라며 말의 고삐를 잡아끌었다.

간발의 차로 황실 마차의 말이 율리안의 마차에 머리를 처박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호위 기사가 칼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마부석에 앉은 율리안이 위압적인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요하네스 공작이다. 황녀께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왔으니 협조해주게.”

호위 기사가 주춤하고 있는 사이 레베카는 카트린느가 보낸 서신을 들고 마차에서 뛰쳐나왔다.

기사는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레베카의 팔을 붙잡았다.

“부인. 이러시면…….”

율리안이 눈썹을 치켜뜨며 마부석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레베카의 팔을 잡고 있는 호위 기사의 손을 강제로 떼어냈다.

어마어마한 악력에 기사가 신음을 냈다.

“지금 감히 누굴 잡는 거지?”

“으윽……. 고, 공작님…….”

레베카는 두 사람의 싸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세게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카트린느! 저예요. 레베카!”

카트린느가 놀란 눈으로 마차의 문을 열었다.

연금술을 배운 뒤로 그녀는 레베카를 스승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카트린느가 깍듯하나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인가요?”

“급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달려왔어요.”

카트린느는 이마에 땀과 섞인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다급했는지 율리안은 재킷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카트린느는 땀에 젖은 율리안의 셔츠를 보곤 얼굴을 굳혔다. 촌각을 다투는 심각한 일이 벌어진 듯했다.

카트린느가 레베카의 손을 잡고 비장하게 말했다.

“말해보세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울 테니.”

“큰 부탁은 아니에요. 다만 이 꽃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요.”

“꽃이라고요?”

레베카는 장황한 설명 대신 카트린느의 서신 끝에 그려진 꽃을 짚어 보였다.

제가 그린 꽃을 찬찬히 살피던 카트린느는 잔뜩 긴장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설마 이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건가요? 궁금하면 내일 알려줘도 될 텐데…….”

“일분일초가 아까운 일이라서요. 이 꽃은 대체 뭔가요?”

“일종의 암호예요. 여기 데이지를 닮은 두 송이의 꽃은 제 이름의 앞머리를 딴 거예요. 제가 아카데미 초급반에 있을 때 같은 반 여학생들 사이에서 잠깐 유행했던 암호죠.”

“어떻게 해독하는지 알려 줄 수 있나요?”

“당연하지요. 레베카에게 알려주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대신 좀 복잡한 그림을 그려야 해서 책상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아요.”

“다행이다…….”

카트린느가 암호를 알고 있다는 말에 레베카는 긴장이 확 풀렸다.

레베카가 휘청거리자 율리안이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곤 카트린느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건 제가 해결해 드리죠.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카트린느는 마석 마차의 내부를 보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마석 마차는 황실에 두 대나 있었지만 큰 행사나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아무리 황녀라 해도 쉽게 탈 수 없었다.

어릴 때 이후로 처음 타 보는 마석 마차에 카트린느의 얼굴 위로 호기심이 반짝 떠올랐다.

하지만 레베카의 진지한 눈빛에 카트린느는 구경하는 걸 그만두곤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을 들었다.

“이 표가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암호는 아니에요.”

카트린느는 로탄더스 문자를 모조리 적고는 그 밑에 각기 다른 꽃을 그려 넣었다.

레베카는 초조한 눈빛으로 카트린느가 종이에 암호를 적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표가 칸칸이 채워질 때마다 기쁨으로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카트린느가 그린 꽃들은 샬럿의 편지를 장식한 꽃과 똑같았다.

“유치하긴 하지만 예쁜 암호이지 않나요? 비밀 일기를 쓸 때 자주 애용하곤 했어요. 이 암호를 만들었던 아이가 생각이 나네요. 정말 똑똑한 아이였는데 이름이 샤…… 뭐였더라?”

카트린느가 잠시 적는 걸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레베카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샬럿이요……?”

“네! 맞아요, 샬럿! 레베카처럼 금발이 예뻤던 걸로 기억해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이후로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았지만……. 실종이라니 너무 끔찍한 일이죠. 그 아이는 살아 있을까요?”

카트린느는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베카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아마 살아 있을 거예요.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카트린느는 레베카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다시 암호를 쓰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암호를 채워 넣고 얼굴을 번쩍 들었다.

“다 됐어요. 그런데 이게 왜 갑자기 궁금하단 건가요?”

“제 친구가 보낸 편지에 똑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어서요.”

“흐음…….”

카트린느는 레베카의 의중을 살펴보려는 듯 잠시간 그녀를 바라봤다.

레베카는 카트린느의 집요한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카트린느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마 레베카의 말은 거짓일 것이다.

단순한 친구의 편지 따위에 이렇게 먼지 휘날리도록 뛰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거짓이면 또 어떠냐.

카트린느는 레베카가 하는 일이니 어련히 좋은 일에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 시절의 장난 같은 암호가 큰일에 연루되었을 리가 없었다.

카트린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뭐, 좋아요. 레베카가 뭘 하든지 돕겠다고 약조했으니 질문은 이쯤하고 넘어갈게요.”

“고마워요. 카트린느.”

“레베카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그렇게 좋더라, 난.”

카트린느가 볼을 붉히며 능글맞게 웃었다.

레베카도 그녀의 호의적인 태도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훈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율리안의 딱딱한 말투가 둘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래서 신의 기사단에 대항할 만한 무기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듣자하니 연금술사 설득에 실패하신 것 같던데요.”

카트린느의 얼굴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말도 말게. 무기에 ‘무’ 자만 꺼내도 지난 역사가 어떻다는 둥 피에 물든 연금술은 저주받는다는 둥 귀가 따가워 죽겠어. 왜 그렇게 유난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무기가 이상한 데 쓰이지 않도록 규제를 하면 될 것을. 총이나 칼은 다 잘 들고 다니면서.”

“신의 기사단을 공격하려면 총이 통하지 않는 신성력 방패를 필연적으로 뚫어야 합니다. 신성력을 파괴하는 무기를 만드는 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죠. 자칫하다가는 이단심판까지 갈 수도 있으니 연금술사들이 머뭇거리는 겁니다.”

둘의 대화는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신성력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비살상 무기를 만들면 그만 아닌가요?”

“응?”

“굳이 공격에 초점을 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황제께선 신의 기사단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라고 하셨지 그들을 쓰러트릴 무기를 만들라고 하지는 않으셨으니까요. 그러니 방어에 중점을 두고 상대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데 신경을 쓰면 어떨까 하는데…….”

카트린느와 율리안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레베카와 서로를 번갈아 봤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 그러면 되겠어요!”

카트린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기절하는 정도에 그치도록 에너지를 조절한다면 목숨엔 지장이 없을 거예요. 신성력 방패를 건드리지 않는 방법을 써서…….”

뭐라고 공식을 중얼거리던 카트린느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면 다른 연금술사들도 설득할 수 있을지 몰라요!”

“유혈 사태는 작을수록 좋긴 하지. 좋은 생각이야. 레베카.”

율리안이 자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레베카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하고 건드렸다.

레베카는 황녀 앞에서 주책맞게 구는 그의 행동에 살며시 눈을 흘겼다.

하지만 곧 예쁘게 휘어지는 그의 눈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정한 공작 부부의 애정 행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카트린느가 멋쩍은 듯 말했다.

“그…… 제가 빠져 드려야 될 차례인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이렇게 된 거 공작 성에서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고 가시겠어요?”

레베카의 말에 율리안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레베카, 그리고 릴리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율리안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불청객은 딱 질색이었지만 그는 레베카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말하진 못했다. 대신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카트린느를 노려보았다.

‘거절해.’

카트린느는 움찔하며, 율리안의 불타는 듯한 시선과 마주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작이 저렇게 싫어하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레베카 덕분에 영감이 떠올라서 당장 제 방으로 가고 싶어서요. 식사는 다음 기회에 함께 해야겠어요.”

“그것 참 아쉽군요. 얼른 황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카트린느의 단호한 거절에 율리안은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율리안이 아까와 달리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자 카트린느는 그를 자그맣게 흘겨보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됐네요. 제 마부와 호위 기사가 애타게 절 기다리고 있는 걸요. 두 분은 얼른 아늑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하던 일 마저 하세요. 그럼 이만.”

카트린느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