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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57화 (157/232)

157.

레베카가 슬쩍 율리안을 흘겨보며 타박했다.

“율리안. 황녀께 무례하게 굴면 어떡해.”

“뭐가 무례해.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잖아.”

“그거면 다 된 거니…….”

“식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배가 고픈 것 같군. 당신도 오늘 식사를 제대로 못했겠지. 얼른 성으로 돌아가자. 말을 몰게.”

율리안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레베카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마부석에 같이 앉을까? 혼자서는 외롭잖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지만 정중히 거절하지. 바람이 차. 옷도 그렇게 얇게 입어 놓고선. 당신은 안락한 마차 안에서 내 실력을 감상하도록 해.”

레베카는 뒤돌아서는 그의 셔츠 위로 선명하게 보이는 굵은 날갯죽지를 응시했다.

‘참나. 자기가 더 춥게 입었으면서…….’

하지만 딱히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서 빨리 샬럿의 암호를 해독하고 싶었다.

율리안이 부드럽게 마차를 모는 동안 레베카는 기억을 더듬어 샬럿의 편지에 있던 꽃을 종이 위에 하나하나 옮겨 그렸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다는 재능은 괴로운 기억을 상기하는 저주 같았다.

하지만 이럴 땐 꽤 달가운 재능이기도 했다.

마지막 꽃까지 다 그려 넣은 레베카는 암호 해독 표를 보면서 더듬더듬 샬럿의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이곳은…… 화산섬. 왕관 모양의 리조트가 있습니다. 사탕수수밭 너머 동굴에 있는 저를 구하러 와주세요.”

* * *

“당장 구하러 가야 합니다!”

붉은 통신석에서 흥분한 로버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정해요. 로버트.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있어요.”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지금껏 모은 단서들과 그 샬럿이란 아이의 메시지가 일치합니다. 화산섬에 있는 왕관 모양의 리조트는 분명 크라운 온천 리조트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섬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요. 크라운 온천 리조트는 제국과 외국에 있는 섬을 다 합쳐서 지점이 열 개는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레베카는 일전에 제플린의 서재에 숨어들었을 때 봤던 장부를 떠올리며 말했다.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율리안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마 해외는 아닐 거야. 식료품 조달에 그 많은 경비 인력을 소화하려면 제국 내에 있는 게 편리해.”

“그렇다면 네 개의 섬으로 줄어들겠네.”

“당장 조사하러 떠나겠습니다. 확실한 단서가 나온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버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평생 원하던 순간이 코앞까지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걱정이 됐다.

운 좋게 섬의 위치를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구출하는 게 큰 난관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군대를 끌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사냥개들이 목숨을 걸고 증인이 되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인질을 죽이거나 다른 곳으로 빼돌리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무조건 은밀하게 들이닥쳐서 한 번에 구해내야 해.’

“레베카 님! 허락해주십시오!”

로버트의 성마른 재촉에 레베카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알겠어요. 대신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인질들을 발견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요. 설사 당신의 어머니가 경비에게 맞고 있는 상황을 목격해도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

고민하는 로버트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결심에 힘이 되고자 레베카가 말을 덧붙였다.

“이른 시일 내에 반드시 모두를 구출할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기다릴 때입니다. 당신의 섣부른 판단에 아까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어요. 거기엔 당신의 가족도 포함되겠죠. 제 말, 아시겠나요?”

“예……. 죄송합니다. 제가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이성이 돌아왔는지 그의 말투가 한층 더 차분해졌다.

레베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가족의 안위가 달려 있는데 누가 침착할 수 있겠어요. 다만 지금은 신중할 때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인질이 잡혀 있는 섬만 알아내 주세요. 그 이후에 일은 저희와 같이하는 걸로 하죠.”

“알겠…… 습니다.”

힘없는 그의 말에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경비가 부족하다거나……. 아니면 도와줄 사람을 붙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돈은 그때 공작님께서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합니다. 전 이미 망자가 된 몸, 신분을 속이기에 아주 편리하죠. 누구도 저라고 의심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연락해주십시오.”

“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베카 님, 그리고 공작님.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시마이라!”

통신석 단말기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마석의 빛이 꺼지더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로버트의 절박한 목소리가 방 안에서 가시지 않아 율리안과 레베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침묵 사이로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말씀하신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하녀가 커피잔과 밤참용 샌드위치를 너른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원래라면 저녁에 커피를 들진 않지만 오늘은 밤을 새우더라도 구출 계획을 짜야 했다.

레베카는 말없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봉가니산 원두 특유의 달짝지근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샬럿이 엘윈에게 보낸 모든 편지에는 암호가 그려져 있었다.

조금씩 내용이 수정된 것을 보면 정보를 얻을 때마다 암호를 추가했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편지에 암호를 그려 넣었을 샬럿을 떠올리자 눈시울이 절로 시큰해졌다.

레베카는 이전 생의 자신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자신을 구해주기를, 무력하게 기적만을 바라던 비참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동시에 책임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여기까지 올 동안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제 그걸 갚아야 할 차례였다.

그녀와 똑같이 생각에 잠겨 있던 율리안이 말했다.

“로버트가 그리 흥분한 건 처음 봤어. 그는 가족을 증오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증오하는 가족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다니.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

“감히 추측해 보자면 책임감이 아닐까. 자신 때문에 가족의 목숨이 저당 잡혔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가는군…….”

“그것도 아니라면 얼마 남지 않은 가족애가 있었을 수도 있지. 미친 듯이 증오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게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이야?”

“믿기지 않겠지만 공존할 수 있더라…….”

레베카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난날 자신은 제플린을 사랑했었다. 증오하면서도 그를 사랑했다.

온몸으로 자신을 안아주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를 가족이라 생각했었다.

레베카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가족에는 여러 형태가 있는 거니까. 정답은 없지.”

‘여러 형태…….’

율리안은 제 가족을 떠올렸다.

무심한 아버지와 결코 다정하다곤 할 수 없는 어머니.

그리고 죽은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듯 연이어 들어온 세 명의 새어머니들과 릴리.

그것도 가족이라 칭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 과거를 생각해도 예전만큼 울적해지지 않았다.

율리안은 턱을 괴고서 옆자리에 앉은 레베카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레베카가 수줍게 시선을 내리더니 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레베카의 손짓 하나마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율리안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이제 그녀가 자신의 미래이자 새로운 가족이었다.

“이 일은 일단 사냥개들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로버트가 저리 흥분한 걸 보면 다른 사냥개들도 마찬가지로 난리가 날 거야. 하지만 샬럿의 부모님들에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레베카가 소리 나게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 괜한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그리고 샬럿의 부모는 당신 판단에 따를게. 난 그런 분야엔 서툴러서 말이지. 어쨌든 로버트가 섬을 찾을 때까진 입단속을 해야겠어.”

“사실 로버트가 섬을 찾은 뒤가 더 문제야. 리조트와 인질들을 같은 섬에 둔 걸로 봐서 경비가 삼엄할 게 분명해.”

“인질들의 수가 적지 않아. 그리고 경비를 감독할 사람도 필요하지. 그동안 적어도 몇십…… 아니 몇백의 경비 인력이 필요했을 텐데 데본셔가 무슨 수로 그만큼의 사병을 모은 거지?”

율리안의 말에 레베카가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는 기억 속에서 데본셔 저택의 비밀의 문을 지나 은밀히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밀 금고의 문을 열고 장부를 하나하나씩 살펴봤다.

장부 속 내용이 그림처럼 머릿속에 좌르륵 펼쳐졌다.

레베카는 그중에서 제플린의 사병에 관한 장부를 찾아내고 눈을 떴다.

“확실히 이상하긴 해. 황제께서 정한 데본셔가의 사병 수는 삼백 명 남짓이야. 사냥개를 포함해 저택에는 백오십 명 정도의 사병이 있어. 나머지는 정보원으로 나가 있거나 사업체의 경비 인력으로 파견된 걸로 알고 있어.”

“제플린 같은 편집증 환자가 통제하기 힘든 용병을 쓸 것 같진 않고……. 그렇다면 황제 몰래 숨겨둔 사병이 더 있단 말이겠군.”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도와주고 있을 수도 있지.”

“누군가 도와준다고?”

“저번에 말한 수상한 이름말이야. 빛의 장미. 당신, 들은 적 있어?”

“빛의 장미라…….”

처음 레베카에게 이름을 들었을 때도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라 생각했다.

문득 어떤 문양이 섬광처럼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흰색 장미 문양이었다.

율리안은 장미 문양과 얽힌 오래된 기억을 꺼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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