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이 아이가 새로운 후계자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소공작님.’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그의 안대에 그려진 새하얀 장미 문양이 기묘하게 번쩍거렸다. 은가루라도 뿌린 모양이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생글생글하게 웃는 상이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그것만 뺀다면 얼굴을 기억도 못할 평범한 사내였다.
그런데 황제 앞에서도 고개를 숙인 적 없던 그의 아버지가 평범한 사내에게 허리를 접었다.
율리안은 그때의 아버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약자의 표정이었다.
율리안이 다시 그를 만난 건 아버지의 장례식에서였다.
‘또다시 뵙는군요. 이번에는 소공작님이 아니라 어엿한 공작님이 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장례식장에서 건넬 만한 말은 아니었다.
율리안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전대 공작님께서 저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썩 사이좋은 부자 관계는 아니어서 말이지. 그래서 당신은 대체 뭐기에 이리 당당하게 무례를 저지르는 거지?’
‘흠…… 글쎄요. 저를 뭐라고 지칭하여야 할까요. 공작가의 관계자 정도?’
‘뭐라고?’
‘원래라면 당신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은 다른 공작들과는 다르군요. 절대 길들일 수 없는 들고양이 같은 눈을 지녔어.’
‘사람을 불러 쫓아내기 전에 꺼지시지.’
‘길들이는 건 시간 낭비겠네요. 아쉽군요. 아주 아쉬워요. 덕분에 휴식기를 가져야겠어요. 대신 지켜보겠습니다. 부디 최대한 빨리 쓸 만한 후계자를 생산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역겨운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후에 율리안은 레오에게 그 사내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캐물었다.
‘글쎄. 모르는 인간인 걸. 너와 달리 다른 요하네스 공작들은 내게 비밀이 많았거든. 하지만 다니엘이 가끔 몸에 묻히고 들어오던 냄새가 나긴 했어.’
그 뒤로 그 수상한 남자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율리안은 그 남자에 대해 깡그리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째서 레베카가 빛의 장미를 언급했을 때 그가 떠올랐을까.
율리안은 그의 안대에 그려진 흰색 장미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뭐 아는 거라도 있어?”
레베카가 턱을 매만지고 있던 그를 향해 물었다.
율리안은 잠시 고민하다 그녀의 깊게 팬 미간을 보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혼란을 주고 싶진 않았다.
레베카는 이미 여러 일로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레베카가 턱을 괴고는 물끄러미 커피를 바라봤다.
식은 커피 위로 고민하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커피…….”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레베카가 턱에서 손을 뗐다. 그녀의 눈이 영민하게 반짝였다.
“율리안, 그거 알아? 화산섬에서 재배한 커피는 맛이 무척 독특하다는 거.”
“그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데.”
율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했다. 화산섬에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니까.
레베카는 제플린이 화산섬에서 키운 커피로 떼돈을 번 것을 기억해냈다.
특이한 스모키한 향이 일품인 원두라고 광고를 했던 것도 떠올랐다.
사실 커피콩을 볶는 방식을 달리 한 것뿐인데 바보처럼 속아 넘어갔다며 소비자들을 비웃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율리안, 혹시 지금 데본셔가의 자산 상태가 어떤지 알아?”
“꽤 자금난을 겪고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돈이 썩어 넘쳐나는 가문이잖아. 아직 견딜 만한 것 같아. 저택을 싹 갈아엎는 대공사를 시작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래……? 그러면 위협을 무릅쓰고 투자를 할 만큼 급하지는 않겠네.”
율리안은 다시 얼굴에 수심이 내려앉은 레베카를 살펴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재정에 아주 큰 구멍이 나게 만들 수는 있지.”
레베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게 가능해?”
“내가 말했잖아. 그 새끼의 사지를 묶어서 당신 앞에 데려다 놓을 계책이 있다고.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만들 거야.”
“그래서 계책이 뭔데?”
“제 덫에 스스로 빠져들게 만드는 거.”
“덫이라고?”
율리안은 카지노에 있었던 일과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대충 설명했다.
레베카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그걸 당신이 혼자서 다 계획했단 말이야?”
“뭐…… 크로아가 도와주긴 했어. 하지만 아직 이걸 실행하기에는 정보가 조금 모자라.”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당신 말대로만 된다면 이 복수의 끝도 멀지 않았어.”
레베카가 비장한 눈을 빛냈다.
율리안이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레베카의 보드라운 손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다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레베카.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 아주 긴 여행을 떠나자.”
“여행?”
“저번에 신혼여행이 짧아서 무척 아쉬워했잖아.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여행을 다니는 걸 좋아했다며.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 무척 많아.”
율리안이 레베카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당신이 모든 걸 털어버리고 마음껏 웃는 모습을 어서 빨리 보고 싶어.”
레베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그의 부드럽게 풀어지는 눈매를 보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주를 푸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레베카는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래.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흡족한 대답이었는지 율리안이 슬며시 웃었다.
레베카는 먹먹한 눈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정보가 부족하다고 했지.”
율리안은 분한 듯 숨을 토해냈다.
“그건 그래. 아직 핵심적인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콜린이 곧 알아낼 것 같으니까.”
“로드리고 말에 따르면 제플린은 지금 사냥개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대. 옥타비오 사건 이후로 사람을 믿지 않게 된 거겠지. 그러니 콜린이 정보를 알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난감하게 됐군.”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제플린이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어.”
“그게 누구지……?”
“베이츠 롬바디. 제플린의 기사단장이자 현 사냥개들의 우두머리.”
“그자가 우릴 도와줄 수 있다는 건가?”
레베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흩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로켓을 가지고 와서 율리안에게 내밀었다.
로드리고가 레베카에게 주었던 그 로켓이었다.
“이게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줄 거야.”
* * *
초승달이 구름에 가려 빛 한 점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공작 성의 숲에는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사납게 퍼지고 있었다.
위협적인 울음소리에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 고양이님들의 심기가 불편하신가 보군.”
비명 같은 울음소리에 그들은 숲속에 발을 디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날은 몸을 사리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보초들이 주춤하는 사이 한 인영이 숲속으로 파고들었다.
수상한 자가 숲에 닿자마자 불청객을 알아챈 고양이들이 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침입자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고양이를 뿌리치며 공작 성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캬악-
나무에서 고양이들이 일제히 그의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집요한 공격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칼등으로 고양이를 쳐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공작 성의 고양이들은 마치 잘 훈련된 기사단처럼 일사불란하게 그를 포위했다.
고양이가 열리는 나무라도 있는 건지 어디선가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인영이 머뭇거리며 사방을 둘러싼 날카로운 송곳니를 노려봤다.
“이건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팔뚝으로 코를 가리고 마취탄을 터뜨렸다.
자욱한 연기가 퍼져나가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고양이들이 비틀거리다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 틈을 타서 그는 재빨리 공작 성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그의 뒤를 쫓아오는 고양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복면을 끌어 내렸다.
어둠 속으로 푸른 안광이 서늘하게 빛이 났다.
베이츠였다.
“젠장. 찝찝하게…….”
고양이에게 해를 끼친 자는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낭설이 있었다.
그는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여신의 축복을 받는 특별한 곳이었다.
입구부터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에 베이츠는 저도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윽…….”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양이가 목을 할퀸 상처를 닦아냈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였는지 많은 양의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는 빠르게 상처를 처치하곤 고개를 들어 공작 성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 심어둔 사냥개 덕에 공작 성의 내부는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공작 부부의 침실에 딸린 테라스를 찾아냈다.
그는 주변을 세심하게 살핀 뒤 허리춤에서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끝에 갈고리를 단 뒤 테라스를 향해 던졌다.
두어 번의 시도 끝에 갈고리가 난간에 걸렸다.
베이츠는 제대로 고정되었는지 밧줄을 여러 번 당긴 다음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회색 망토는 멀리서 보면 공작 성의 벽돌 중 하나처럼 보였다.
테라스에 도착한 그는 숨을 죽여 문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는 손쉽게 핀 하나만으로 문을 땄다.
베이츠는 조심스레 커튼을 걷고 방 안으로 들어가 사방을 살폈다.
침대 위엔 금발을 늘어뜨리고 곤히 잠에 빠진 레베카 혼자밖에 없었다.
예상과 다른 상황에 베이츠가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늘한 금속이 관자놀이에 맞닿았다.
“쥐새끼가 겁도 없이 고양이 소굴로 기어들어 왔군 그래.”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흡사 그를 덮쳤던 고양이와 비슷한 음성이었다.
베이츠가 천천히 눈을 옆으로 굴렸다.
검은색 총구를 겨누고 있는 율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율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배부른 고양이가 쥐새끼를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