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그는 총을 그대로 관자놀이에 겨눈 채로 베이츠의 귓가에 바투 다가와 속삭였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 때까지 가지고 놀아. 어디 보자, 우리 쥐새끼께서는 어떤 걸 가장 고통스러워할까?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건 어때? 내 침실에 발을 딛기 전에 그 정도 각오는 했겠지?”
저 혼자 있는 침실이었다면 이딴 쥐새끼 따위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부부 침실이었다. 레베카와 자신 둘만의 공간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이 신성한 곳을 넘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율리안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율리안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그의 눈을 마주한 베이츠는 찬란한 황금빛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해를 끼칠 의도는 없습니다.”
제 말을 증명하려는 듯 베이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바닥에 던지곤 두 손을 들었다.
율리안이 기겁을 하며 칼이 바닥에 닿기 전에 칼집을 아슬아슬하게 잡아챘다.
그는 아직 미동도 없이 자는 레베카를 흘깃 보고는 나지막하게 분통을 터뜨렸다.
“무슨 짓이야! 레베카가 깰 뻔했잖아.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베이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율리안은 숨을 죽인 채 레베카가 뒤척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베이츠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잠에 빠진 레베카와 노심초사하는 율리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곧이어 베이츠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당신은…… 이곳에서 사랑을 받고 있군요.’
그는 레베카가 데본셔 저택에 있는 동안 그녀에 대해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레베카는 주인이 가장 아끼는 장식품이었다.
그래서 지켜야 하고 아름다운 게 당연한 사람. 그 정도 감상에만 그쳤다.
하지만 레베카가 이혼을 스스로 거머쥐었을 때 베이츠는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장식장을 벗어난 그녀는 자신처럼 따뜻하고 붉은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래. 마치 알리시아처럼.
베이츠는 알리시아의 아름다운 연보라색 머리칼이 끔찍한 색으로 변한 걸 떠올렸다.
잘 세공된 자수정처럼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 또한 심해 속에 묻혀 버렸다.
데본셔를 탈출하면 그녀도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베이츠는 꿈속에 푹 빠져든 레베카를 보고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가 비장한 얼굴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전에 신분부터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닌가?”
“베이츠…… 베이츠 롬바디입니다.”
율리안은 잠시 멈칫했다. 베이츠라면 일전에 레베카가 말했던 그 사내였다.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율리안은 총을 거두고는 테라스를 향해 고갯짓했다.
“따라와. 여기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베이츠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테라스엔 매섭고 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율리안은 춥지도 않은지 얇은 잠옷만 입고서도 어깨를 움츠리는 일이 없었다.
“좋아. 말해봐. 내게 할 말이 뭔지.”
베이츠는 흰색 마석을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시종일관 무심함을 유지하던 율리안의 얼굴이 조금 흔들렸다.
“돌 조각 따위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야.”
“이게 마석인 걸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 카지노의 귀빈실에서 제가 찾아낸 것입니다. 공작님께서 심으신 게 아닙니까?”
방해한 게 네놈 짓이었구나.
율리안은 이를 아득 악물고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백작이 내게 잘잘못을 따지라고 시키기라도 했나?”
“아닙니다. 전 그때 공작님께서 마저 듣지 못하신 걸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뭐?”
난간에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던 그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백작은 연금술사를 핍박하던 역사를 반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때와 연금술사의 지위는 달라. 이제 연금술 없는 발전은 있을 수가 없지. 백작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물론입니다. 요즘은 신전도 연금술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연금술사는 그 무엇과도 대체 할 수 없는 인력이 되었습니다. 공작님께서 가진 연금술탑이 제국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 겁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요점만 말해.”
“백작은…… 공작님 소속의 연금술사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울 작정입니다.”
율리안이 멈칫하며 베이츠를 바라보았다. 제정신이냐는 눈빛이었다.
“요하네스 공작의 연금술탑을 신성 모독으로……? 신전이 미쳤다고 그걸 허락해?”
“허락할 겁니다. 공작님과 연관 짓지 않고 연금술사들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몰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연금술사들의 죄를 사해준다는 조건으로 연금술탑을 신전의 소유로 돌릴 수 있겠죠.”
“그동안 내가 얌전히 있을 거라 생각해? 데본셔 백작이 나를 아주 만만하게 보는 것 같은데.”
“공작님께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백작은 바리니카 벽화 사건의 용의자로 연금술사를 지목할 겁니다. 복잡한 탑 내부 안에 증거 몇 개를 숨겨 놓는 건 일도 아닙니다. 백작은 이미 연금술탑의 하인과 하녀 여럿을 매수해두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발뺌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바리니카를 해외로 도주시켰다는 증거를 가지고 나까지 엮어버리겠다 겁박이라도 할 셈이겠군.”
“정확합니다…….”
“하! 빌어먹을 데본셔 새끼가…….”
율리안은 제플린이 기껏해야 연금술탑을 폭발시키거나 귀중한 자료들을 소실시킬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치밀한 사내였던 모양이다.
‘오히려 얕본 건 나였군.’
율리안은 팔짱을 끼고서 베이츠를 내려다봤다. 그를 이용해야 한다는 레베카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걸 내게 일러바치는 이유가 뭐야. 넌 백작이 신임하는 부하라고 들었다. 그런 그를 배신하면서까지 원하는 게 있을 텐데.”
베이츠는 율리안의 비뚜름한 입매를 바라보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알리시아와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알리시아……? 데본셔 백작 부인 말이야? 이것 참 흥미롭군. 주군의 부인을 탐하는 기사단장이라. 소설 한 편 뚝딱이군.”
“자세한 건 묻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 하나입니다. 그 둘의 안위만 보장된다면 백작을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그 말을 내가 어찌 믿지? 이게 백작의 함정이 아니란 걸 내가 어떻게 신뢰하느냔 말이야.”
“조만간 선물을 하나 보내겠습니다. 그를 보시면 확신하실 겁니다.”
“흠…….”
율리안은 뻣뻣하게 굳은 그의 푸른색 눈을 바라봤다.
로드리고의 추측대로 그의 로켓에 들어 있던 머리카락은 알리시아의 것인 게 분명했다.
기구한 사연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율리안이 관심 있는 건 오직 하나.
그가 제플린 데본셔를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뿐이었다.
“네 눈빛을 보니 딱히 거짓은 아닌 것 같군. 좋아. 알리시아와 그 아들은 살려주지.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게 있어.”
“무엇입니까.”
“덫 안에 덫을 놓는 거.”
율리안이 씨익 웃었다. 그러곤 자신이 생각해낸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베이츠의 얼굴 위로 떠오르던 의문이 구름처럼 차차 걷히기 시작했다.
“과연……. 현명한 계획입니다. 그 정도면 백작도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것 말고도 이쪽엔 확실한 카드가 더 있어.”
“그게 뭡니까.”
“비밀이다.”
“비밀…… 입니까.”
베이츠는 빙글거리며 웃는 율리안을 바라보고 미미하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말해주지도 않을 거면 굳이 왜 제게 말하는 건지……, 공작도 만만찮은 악취미의 소유자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늦은 밤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 그렇지. 잠시만 기다려.”
어리둥절한 그를 등지고 율리안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뒤에 다시 테라스의 문을 살며시 열고 나타났다.
“이건 약속의 증표라고 생각해.”
율리안이 뭔가를 베이츠를 향해 던졌다.
가뿐히 그가 던진 것을 받아든 베이츠는 제 손을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얼마 전 잃어버렸던 자신의 로켓이었다.
베이츠가 황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백작에게 등을 돌린 사람이 당신 혼자일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베이츠는 그간 백작저에서 종종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을 떠올렸다.
묘하게 들떠 있던 사냥개들과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시선들.
단언컨대 지금껏 자신은 감시하는 역할이었지 감시를 당하는 쪽은 아니었다.
율리안이 그사이 사냥개와 저택의 고용인들을 매수한 모양이었다.
“범상치 않은 분이라 여겼지만 제 예상보다 더 주도면밀한 분이셨군요.”
“아, 그거. 내가 한 거 아니야.”
“예?”
“내 아내가 보통 영민한 게 아니라서 말이지. 난 그녀가 차린 밥상에 포크만 올려놓았을 뿐.”
베이츠가 멍하니 율리안을 바라봤다.
율리안은 레베카가 기특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 의미에서 충고 하나만 하지. 나를…… 아니, 레베카를 배신할 생각이 있거든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베이츠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유념…… 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율리안은 잠에서 깼다.
베이츠가 성을 떠난 이후로 세세한 계획을 조정하느라 그는 동이 트는 걸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에도 율리안은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레베카가 잘 있는지 확인하는 게 그의 하루의 첫 시작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그의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순간 잠이 달아나 율리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스르륵 내려가 그의 반라가 드러났다.
“레베카?”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사위를 살폈다.
하지만 침실 어디에도 레베카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설마 베이츠가…….’
그가 자신을 속이고 레베카를 해치기라도 한 걸까?
역시 그를 믿는 게 아니었다.
율리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