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0화 (160/232)

160.

“벌써 일어났어? 조금만 더 자지 그랬어.”

그가 대충 셔츠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

율리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레베카의 온기가 느껴지자 조금씩 안도감이 밀려 들어왔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레베카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자, 잠시만! 쏟을 것 같아!”

레베카는 손에 든 쟁반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렸다.

율리안은 그제야 레베카를 품속에서 놓아주었다.

“이게 뭐지?”

율리안의 질문에 레베카가 수줍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아침 식사야. 당신이 항상 내게 만들어 줬으니까. 나도 한번 만들어 주고 싶어서…….”

율리안은 레베카와 은색 돔 커버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당신이 직접 요리를 했다고?”

레베카가 의자를 빼내곤 율리안을 앉혔다.

“자자.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앉아.”

율리안이 얼떨떨하게 의자에 앉자 레베카가 머뭇거리는 손으로 돔 커버를 열었다.

“보, 보기보다 맛이 좋을 수도 있어.”

‘맛이 좋을 수도 있다고……? 맛을 보지 않고 요리를 한 건가.’

레베카의 말에 율리안은 접시 위에 올려진 정체불명의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스크램블드에그인 줄 알았던 게 알고 보니 핫케이크였다.

바싹 태운 베이컨 두 조각이 몽글몽글한 핫케이크 위에 앙증맞게 올라가 있었다.

율리안은 포크로 음식을 뒤적거리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채소를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삶은 달걀의 단면을 자른 듯한 모양의 채소를 으깨보던 율리안의 낯이 조금 새파랗게 질렸다.

“이거…… 설마 아보카도야?”

“응! 몸에 좋다고 해서 말이야. 그런데 자르는 게 힘들어서 조금 애를 먹었어.”

“그렇구나……. 씨까지 이렇게 깔끔하게 잘랐구나…….”

대체 무슨 수로 그 단단한 씨앗을 잘랐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수련은 필요가 없을지도…….’

경악할 만한 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율리안은 커다란 유리컵을 가득 채운 보라색 음료를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뭘까? 레베카?”

“건강 녹즙이야. 몸에 좋다는 건 다 넣었어.”

“녹즙은 초록색인데…….”

“뭐라고?”

“아니야.”

조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잘못된 걸 지적하기엔 레베카는 자신의 성과물을 보며 무척이나 뿌듯해하고 있었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을 보니 도저히 사실을 고할 수 없었다.

문득 일전에 발라리아 해안에서 테오와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테오는 그에게 레베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까지 빠짐없이 일러주었다.

그중 테오가 유난히 강조하던 게 있었다.

‘레베카는 요리를 끔찍하게 못하네. 부모인 내가 봐도 그건 저주받은 재능이야. 그러니 웬만하면 그 아이가 요리를 하게 해선 안 돼.’

그때의 테오는 옛 기억을 떠올렸던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흘려듣는 게 아니었다.

율리안은 곧 제게 닥칠 재앙을 바라보았다.

“어제 늦게 잔 것 같던데 얼른 먹어. 기력을 보충해 줄 거야.”

하지만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레베카를 보니 절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율리안은 제가 잠든 틈을 타서 주방에서 부지런하게 움직였을 그녀를 상상했다.

주방장은 분명 지금쯤 화병으로 앓아누웠을지도 몰랐다.

맛이 없으면 어떤가. 그녀의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었다.

율리안은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었다.

“커흑…….”

하지만 레베카의 요리는 그의 생각보다 가혹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맛이 입 안 가득 폭격처럼 쏟아졌다.

쓴맛과 신맛이 공존하는 핫케이크라니.

게다가 보라색 녹즙에선 늪지대의 맛이 났다.

율리안은 물과 함께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삼켰다.

“어때? 맛있어?”

“먹을 만…….”

율리안은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잠시간 바라봤다. 기대에 부푼 두 뺨이 발그레했다.

‘귀여워…….’

그는 잘 익은 자두를 찔러보듯 레베카의 볼을 쿡쿡 건드리며 눈을 접어 보였다.

“맛있어. 무척이나.”

단단히 닫힌 봉우리가 활짝 피어나듯 레베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다! 내가 요리만 하면 우리 집 식구들이 앓는 소리를 냈거든. 당신이 아무거나 잘 먹는다던 크로아의 말이 정말인가 봐.”

“크로아가 그랬어?”

“응! 내가 맛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니까 크로아가 당신이라면 맛있게 먹을 것 같다고 그랬거든.”

“그랬단 말이지…….”

그는 웃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크로아를 향한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요리를 어쩜 그렇게 잘하는 거야? 당신이 만든 핫케이크는 버터 맛이 났는데 내 건 신맛이 난단 말이지. 레몬을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가?”

쉴 새 없이 레베카의 입술이 움칫거렸다.

그가 맛있게 먹은 게 정말 기쁜지 레베카는 전에 없던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태피스트리 속 어린 레베카가 떠올랐다.

꼭 그녀가 옛날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율리안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방금까지 입속을 차지하던 재앙 같은 맛을 잊어버렸다.

‘크로아에게 상이라도 내려야겠어.’

크로아의 말대로 자신이 맛있게 먹은 건 사실이었다.

레베카의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던 율리안은 다급하게 물로 제 입 안을 헹궜다.

“그래도 녹즙은 좀 맛이 없지? 그래도 몸에 좋은 게 맛이 없…….”

레베카는 갑작스레 입 안으로 들어오는 물컹한 살덩이에 말을 삼켰다.

끼익-

율리안이 성마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레베카의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자그마한 입속을 샅샅이 훑었다.

입맞춤으론 만족하지 못했는지 율리안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목덜미를 자극하는 그의 입놀림에 레베카가 치마를 움켜쥐며 간신히 읊조렸다.

“율리안…… 아직 아침이야.”

“아침이면 뭐가 어때서……. 우린 부부잖아.”

“할 일이 많잖…… 윽.”

율리안이 그녀의 드레스의 어깨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움푹 팬 그녀의 쇄골을 농밀하게 핥기 시작하자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요망해, 아주…….’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면 그는 타고난 게 분명했다.

레베카는 발끝까지 타고 흐르는 전율에 다리를 치켜들었다.

“공작님! 공작님!”

또다. 또다시 크로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은 애써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원래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손님이 오셨다고요!”

하지만 크로아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율리안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그는 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제기랄! 이 성의 고용인들은 몸에 탐지기라도 달고 있는 거야? 방해하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건가?”

“손님이 오신 지 한 시간이나 지났거든요? 저도 나름 눈치껏 참다가 올라온 겁니다!”

무시무시한 고함에 크로아가 억울한 듯 제 가슴을 팡팡 쳤다.

레베카가 아침 식사를 손수 만들어서 올라간 다음 그는 공작 부부를 방해하지 말라고 고용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성질 급한 방문객에게 손을 비벼가며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준 것도 자신이었다.

율리안은 최근 들어 대부분 고용인에겐 퍽 친절하게 굴었다. 하지만 크로아만큼은 예외였다.

공작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크로아에게 바가지를 긁어댔다.

크로아는 한숨을 푹 내쉬곤 문에 대고 소리쳤다.

“카림 라트라니스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공작님께서 지금 당장 내려오지 않는다면 응접실을 부숴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진심인 것 같거든요? 그 비싼 유리창이 산산조각나기 일보 직전이라고요!”

“라트라니스 공작이 왔다고?”

옷차림을 추스르던 레베카가 눈을 크게 떴다.

* * *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밀어버려.”

제플린은 이른 아침부터 공사 현장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 태어나던 날, 그리고 레베카가 이곳을 다녀간 그 다음 날부터 데본셔 저택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저택의 전체적인 외양부터 정원과 후원까지 싹 갈아엎는 대공사였다.

‘무조건 요하네스 공작 성보다 화려하게 지어야 해.’

안전상의 이유로 저택의 층수를 더 높이지 못한 게 한이라면 한이었다.

연금술을 도입한 건축술은 비싸긴 했지만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안전하고 확실했고 무엇보다 진행 속도가 빨랐다.

율리안의 연금술탑에 돈을 바쳤다 생각하면 장이 꼬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곧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테니 결국엔 이것도 남는 장사나 다름없었다.

제플린은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에 감탄하며 하루빨리 계획을 실행할 방도를 고민했다.

“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뒀습니다.”

“그래.”

제플린은 하인이 마련해 둔 파라솔 밑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매의 눈으로 공사 현장을 살펴봤다.

소음이라면 질색하는 그였지만 이런 소음이라면 대환영이었다.

시끄러울수록 레베카를 맞을 준비가 착실히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제플린은 레베카가 완전히 바뀐 데본셔 저택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상상을 했다.

오로지 당신을 위해 이곳을 꾸몄다고 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한동안 공사를 지켜보던 제플린은 조간신문을 펼쳤다.

<또다시 일어난 신전 습격 사건! 이제 수도도 안전하지 않다>

그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바리니카 벽화 사건은 그동안 신전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체 모를 집단이 작은 시골 마을부터 시작해 큰 도시까지 신전을 차례차례 습격하기 시작했다.

습격이라 떠들어대곤 했지만 딱히 유혈 사태는 없었다.

그들은 거사를 치를 동안 신전의 사람들을 기절시키고 신관들의 죄목을 낱낱이 적어둔 벽보를 붙였다.

그리고 신전의 외벽에 붉은 페인트로 언제나 같은 문장을 써놓았다. 그들만의 표식인 듯했다.

<썩은 뿌리를 도려내고 다시 처음으로.>

평화로운 시위에 가까운 이들의 행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심판자’라 부르며 남몰래 추종하는 모임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신의 기사단은 이 ‘심판자’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심판자로 오해받은 억울한 희생자가 다량 생기는 와중에도 심판자는 작은 단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조직적이고 주도면밀했다.

어디 높으신 후원자라도 있는지 심판자들은 신전에 그치지 않고 신전과 결탁한 귀족들의 집까지 습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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