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빛의 장미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동안 역사 속으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수많은 야망가들의 비참한 결말은 모두 빛의 장미의 작품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이 사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플린은 빛의 장미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옥타비오의 뒤를 밟았다.
제플린은 따뜻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빛의 장미의 본거지에 쳐들어갔던 걸 떠올렸다.
그 섬뜩한 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협상을 제안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대단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네의 계획을 도와준다면 바리니카의 은신처를 알려주겠다는 건가?’
‘맞습니다.’
실상 제플린은 바리니카가 숨겨진 곳을 알지 못했다. 빛의 장미도 찾지 못한 걸 자신이 무슨 수로 찾았겠는가.
하지만 그거야 차차 찾으면 될 일이다.
제플린은 일단 공수표를 던지기로 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지금 당장 요하네스 공작에게 가서 바리니카를 어디 숨겼냐고 물어보면 그만이다. 아니면 자네를 고문해서 정보를 얻으면 되지.’
‘그래 보십시오. 저는 고문을 당하기 전에 자결하고 말 테니까. 흉터투성이인 얼굴로 사는 것보다 그 편이 더 났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요하네스 공작의 행보가 신경 쓰이실 텐데요. 그의 아집을 꺾고 동시에 심판자 사태도 잠재울 좋은 기회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요하네스 공작이 아내를 들였으니 조만간 후계자가 태어날 것이다. 그는 그때 치워버려도 늦지 않아. 그리고 심판자는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닐세.’
‘후계자요? 뭔가 모르는 게 있으신 것 같은데 레베카는 불임입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지 않나. 내가 알기론 자네와 이혼하기 위해 공작 부인께서 꾸민 일이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불임이었던 이유가 꼭 아내에게만 있는 건 아니지. 자네에게 정말 아무 문제도 없나?’
‘증거 없는 추측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제 아들이 태어났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아, 그렇지. 자네를 똑 닮은 아들이 태어났다고 들었네. 축하가 늦었군. 자네처럼 온실 속 화초처럼 크길 바라네. 어쨌거나 자네가 내건 조건들은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제안이네.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군.’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당신들이 몇백 년 동안이나 망설이던 일을 제가 대신해드리는 건.’
‘우리가 망설였던 일이라……. 그게 뭐지.’
‘지혜의 불꽃을 꺼트리는 일 말입니다.’
일순 검은 장막 뒤가 술렁였다.
제플린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말했다.
‘지혜의 불을 꺼트리는 자, 영원한 지옥 속에 갇힐 것이다. 카디르 성서의 이 한 줄 때문에 지금껏 당신들이 하지 못했던 걸 제가 대신 수행하겠다는 겁니다. 빛의 장미와 데본셔가 맺은 계약을 지금껏 제가 지켜왔으니 그 끝맺음도 제가 하겠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들려온 대답은 긍정이었다.
‘아버지가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제플린은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빛바랜 수첩 위엔 자킴 데본셔의 서명이 자그맣게 쓰여 있었다. 바로 자킴 데본셔의 일기였다.
저택 공사를 위해 비밀통로를 들쑤셔 보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전대 백작의 일기에는 옥타비오가 그에게 알려주지 않은 데본셔가의 진실이 적혀 있었다.
제플린이 인질을 가둬 둔 섬은 원래 한 사람을 위한 곳이었다.
‘지혜의 불꽃’이라 불리는 사내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었다.
그는 칼에 찔려도 금방 상처가 아물고, 총에 맞아도 몸속에서 총알을 태워버렸다.
불을 만들어 내고 불을 먹고사는 늙지 않는 불사의 사내였다.
불사의 존재는 언제나 혼란을 가져왔다. 최악의 경우 불사의 비밀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카디르교는 지혜의 불꽃에 대한 진실을 옛날부터 철저하게 숨겨왔다.
데본셔가는 본디 영세한 상인 집안이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우연히 도주하던 지혜의 불꽃을 도와주게 되었고 곧 그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데본셔는 이제 막 국교로 자리 잡기 시작하던 데프리아 신전을 찾아가 지혜의 불꽃을 빌미로 협박을 했다.
자신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지혜의 불꽃의 정체를 폭로해 버리겠다고 윽박질렀다.
단, 요구를 들어준다면 지혜의 불꽃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겠노라고 신전과 협상을 시작했다.
불사의 존재가 있다는 건 카디르교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데프리아교의 장로들은 매달 거액의 금액을 데본셔가에 지불하고 불사의 정체를 숨기기로 했다.
데본셔가는 그 자금으로 백작의 자리까지 올랐다.
데본셔는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신전과 거리를 두며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자킴이 데본셔 백작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타락한 신전에 회의적이었고, 그런 신전을 쓸어버리고 싶어 하는 자히드라와 손을 잡았다.
자히드라에게 충성을 바친 자킴이었지만 그는 지혜의 불꽃만큼은 자히드라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빛의 장미는 자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그가 황제에게 비밀을 폭로하는 날엔 엄청난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들은 옥타비오를 데본셔가에 침투시키고 자킴을 아들의 손에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후계자인 제플린 데본셔에게 진실을 숨기고 그를 옥타비오의 손에 놀아나게끔 조종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인질을 잡아둘 섬을 물색하던 중 제플린은 가문이 아주 오래 전부터 소유하던 곳을 알아냈다.
옥타비오는 그곳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말렸지만 호기심이 동한 제플린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지혜의 불꽃을 찾아냈고 동시에 효과적으로 많은 인원을 가둘 수 있는 장소도 발견했다.
옥타비오는 지혜의 불꽃을 가문에 중대한 죄를 지은 자라고 설명했다.
제플린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는 늙지 않았다.
그래도 제플린은 동안인 사람이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그 섬에 들어간 이상 나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옥타비오 이 개자식…….’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다.
그러니까 결국 제플린 데본셔는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옥타비오의 각본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당장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빛의 장미와 계약한 게 있어 잠시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다.
‘아직 우리는 백작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네. 그러니 당신이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옥타비오는 살려두도록 하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옥타비오를 처리했더니 이번엔 빛의 장미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지금은 별수 없이 그들을 따라야 할 차례였다.
제플린은 제거해야 할 대상 목록에 빛의 장미를 새겨놓으며 더 놓친 내용은 없나 하고 자킴의 일기를 뒤적거렸다.
그때 일꾼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백작님. 저 구석에 있는 오두막은 어찌할까요?”
제플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제가 어릴 때 놀던 오두막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가 그곳을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긴 했다.
하지만 뭐가 어쨌든 이곳 데본셔 저택에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소유였다.
제플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부숴버려.”
* * *
대충 옷가지를 갖춰 입은 율리안과 레베카는 인내심 없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10초 남았어. 10초 동안 당신들의 주인이 내려오지 않으면 여길 다 박살 내 버리겠다.”
크로아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응접실에서 흘러나오는 굵직한 음성에 멈칫했다.
꼭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였다.
“카림! 적당히 좀 해.”
율리안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확 열어젖혔다.
카림이 번득이는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드디어 행차하시는구만. 대체 어떤 중요한 사무가 있으셨기에 편지로 불러낸 손님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거지?”
“고작 열흘 전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빨리 올 줄 누가 알았겠어. 네 성에서 여기까지 적어도 일주일은 걸리는데 무슨 수로 온 거야?”
“그냥 달렸지. 난 일반인보다 더 빠르다고. 자네의 상식은 나한테 통하지 않아.”
“불곰을 잡을 생각에 아주 미쳐버린 모양이군. 그렇게 피가 모자라나? 이래서야 야만인이나 다름없지 않나.”
“야만인 좋네. 요즘은 이딴 지겨운 공작 자리는 내려놓고 그냥 경계선을 넘어 마물들이랑 치고받고 살까 고민 중이야. 그게 더 즐거운 인생일 것 같거든.”
레베카는 자신을 소개할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공방을 주고받는 두 공작을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여태껏 라트라니스 공작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없었다.
이전 생에는 스치듯 본 게 다였고, 이번 생 또한 그에게 관심이 크게 없었다.
연회장이나 결혼식장에서 보긴 했지만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는 정말 커다랬다.
키는 율리안이 더 컸지만, 덩치는 카림이 더 컸다.
율리안만큼 거대한 사내가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는데 레베카는 제 얼굴보다 더 큰 카림의 팔뚝을 보며 입을 벌렸다.
가시가 돋친 말들이 오고 가고 있었지만 둘의 입술에 미미한 미소가 번져있는 걸 보아 저게 일상적인 대화인 듯싶었다.
레베카는 슬쩍 뒤로 물러나서 율리안과 카림을 한눈에 담아 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와 루비 같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히고 있었다.
칠흑같은 율리안의 머리칼과 청빛이 도는 카림의 흑발이 동시에 들썩였다.
두 사람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두말할 것 없었다.
덩치가 비슷한 둘은 얼핏 보면 형제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게다가 둘 다 결혼을 싫어한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마치 신화 속 아름다운 쌍둥이 남신의 그림 한 폭을 보는 것 같았다.
‘저러니 염문설이 돌았지…….’
젊은 두 공작의 뜨거운 우정은 수많은 소문을 만들었다.
레베카는 이전 생에서 라트라니스 공작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라트라니스 공작 부인을 노려보던 몇몇 사람들의 매서운 눈길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물론 둘의 그렇고 그런 소문이 사실일 리는 없었다.
그건 자신이 산증인이었다.
레베카는 조금 전 있었던 율리안의 뜨거운 입맞춤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