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2화 (162/232)

162.

“뭐야. 부인이 오셨으면 내게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일전에 뵌 적이 있었죠. 카림 라트라니스입니다.”

카림은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레베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율리안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 인사는 그쯤하고 자네 방이 어딘지 바로 안내해주지.”

“왜 이렇게 서둘러. 기왕 이렇게 만난 거 소문의 요하네스 공작 부인과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신경 꺼.”

“아! 알겠군. 자네는 부인이 내 매력에 빠질 것 같아 경계하는 거지? 이봐. 그렇게 자신이 없어?”

카림은 율리안보다 더 경우가 없는 자였다. 그의 능글맞은 웃음에 레베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율리안이 레베카의 눈치를 슬쩍 봤다.

굳은 그녀의 낯빛에 율리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가 카림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이제 보니 직접 사냥을 당하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왔나 보군.”

“어허. 무례하시군요.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님.”

카림도 똑같이 율리안의 멱살을 잡았다.

그 순간 눈치를 살피고 있던 크로아가 레베카의 얼굴을 보고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일관적으로 무심함을 유지하고 있던 레베카의 얼굴에 돌연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험악한 표정에 크로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저,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크로아는 레베카가 응접실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걸 보며 뒷걸음질 쳤다.

저 사이에 끼어서 등 터지는 일만은 극구 사양이었다.

“율리안.”

율리안이 카림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 전에 레베카가 빠르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레베카는 카림의 멱살을 잡은 율리안의 팔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율리안은 제 팔에 닿는 레베카의 온기에 멈칫하더니 이내 카림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었다.

‘율리안이…… 이렇게 쉽게 물러난다고?’

카림은 황당한 표정으로 율리안과 레베카를 번갈아 봤다.

레베카가 뚫어져라 율리안의 멱살을 쥐고 있는 카림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림은 레베카의 치켜 올라간 눈매를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곤 슬며시 손의 힘을 뺐다.

“라트라니스 공작님. 공작님의 매력은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저는 제 남편이 더 취향인 것 같네요.”

레베카는 슬그머니 율리안의 팔짱을 꼈다. 율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카림이 멍하니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봤다.

“전 좀 더 신사적이고 예쁘게 생긴 사람을 좋아해서요. 죄송하지만 공작님의 말씀대로 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레, 레베카…….”

율리안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레베카가 이렇게 누구 앞에 나서서 자신에 대한 애정을 표하는 일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동의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율리안과 다르게 카림은 어딘가 혼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레베카는 그에게 어떤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을 기세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무례라고 하셨나요? 무례는 공작께서 먼저 저지르신 것 같은데요. 저희가 초대했다고는 하나, 기일을 알려주지도 않고 멋대로 방문하신 건 공작님이지요. 그리고 이쪽에도 일정이란 게 있습니다. 아무리 공작님이 오셨다고 한들 그렇게 빨리 일정을 비울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응접실을 부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시다니 이게 무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요?”

레베카의 눈이 푸른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카림은 움찔하며 레베카를 바라봤다. 무도회에서도 느꼈지만 정말 기백이 남다른 여자였다.

율리안도 조금 놀란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카림과는 원래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한다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유달리 날카로운 그녀의 태도를 보니 말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을 두둔하는 그녀의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율리안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레베카가 율리안의 팔을 더욱 단단히 붙잡고 쐐기를 박듯 카림에게 쏘아붙였다.

“이곳은 엄연히 요하네스 공작의 성입니다. 부디 친히 초대한 주인에게 손을 대는 불상사는 없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레베카가 턱을 치켜들었다.

율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듯이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레베카는 카림이 자신의 멱살을 잡은 것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고 있던 것이었다.

평소라면 그저 유연하게 넘어갔을 상황이었는데 굳이 신경을 긁는 말들을 골라내는 걸 보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어깨를 쫙 펴고는 우쭐해진 기분으로 카림을 슬쩍 내려다봤다.

“그래! 내 아내의 말처럼 이번에는 자네가 무례했어.”

카림은 혀를 찼다. 율리안의 행복에 겨운 표정에 짜증이 솟구쳤다.

‘아내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그는 율리안의 구겨진 옷깃을 세심하게 정리하는 레베카를 보고 쓴웃음을 삼켰다.

처음으로 결혼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율리안을 이용할 거라 생각했던 제 예상과는 달리 레베카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 보였다.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그녀의 눈길이 그 증거였다.

그래도 그녀가 율리안에게 상처를 줄 것 같다는 예감은 여전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카림은 제 직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와 지나간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현재였다.

카림이 한 발짝 물러나서 사근한 어투로 말했다.

“부인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것 같군요. 북부의 거친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제야 레베카는 뻣뻣하게 굳어 있던 눈매를 풀었다.

“아닙니다. 사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말이 좀 과했던 것 같네요. 여독이 쌓이셨을 텐데 편히 쉬실 공간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쉬는 것보단 몸을 활발히 움직여야 여독이 풀리는 타입이라서요. 준비되는 대로 사냥을 나갈까 합니다. 물론 부인께서 허락하신 후에 말이지요.”

카림이 제법 공손하게 굴며 말했다.

율리안은 슬쩍 레베카의 눈치를 살폈다.

레베카는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율리안도 썩 사냥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불곰은 달랐다.

공작령의 하리츠 숲에는 불곰 서식지가 있었다.

불곰은 가을만 되면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기 위해 먹이를 비축하려 민가를 습격하곤 했다.

올해만 벌써 열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전문 사냥꾼들을 부르기는 했으나 거대한 불곰을 상대하기엔 항상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맘때면 율리안은 사람들을 이끌고 직접 곰 사냥에 나서곤 했다.

레베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제 허락이 뭐가 필요하겠어요. 영지민들을 위한 일에 힘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필요하신 걸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식사하실 시간은 있으시겠지요?”

레베카의 점심 식사 초대에 율리안의 낯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굳이 겸상을 할 필요가 있어? 손님 방에 최고급 만찬을 차려주면 그만이지.”

카림은 율리안의 불만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가 아는 율리안은 미식가였다.

때문에 그는 음식에만 관심이 있지, 누가 식사를 같이하든 언제나 투명인간 취급을 하곤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레베카와 단둘이 식사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아 보였다.

문득 짓궂어지고 싶어진 카림은 피식 웃으면서 보란 듯이 레베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누구의 제안인데 거절하겠습니까. 부인의 초대를 기쁘게 받겠습니다. 점심 식사가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율리안의 따가운 눈총이 이마에 내리박히자 카림은 못내 즐거웠다.

* * *

일꾼들이 오두막을 뜯어내고 있는 모습을 그레이스가 벽 뒤에서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백작님! 여기 안에 있는 물건들은 어찌할까요?”

“내다 버려. 그딴 쓰레기 같은 거.”

그는 그레이스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지 모른 채 태연하게 지껄였다.

사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레이스가 저 오두막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제플린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통보도 없이 하루아침에 오두막을 헐어버리기로 했다.

그레이스는 희게 질릴 만큼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이 저택에, 아니 이 세상에 남은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배신감이 치솟았다.

그레이스는 제플린 손에 망가져 가는 데본셔 저택을 휙 둘러보았다.

사방에 가림막이 처져 있고, 그 안에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레이스는 저택을 공사할 거란 제플린의 말을 단순한 보수공사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제플린은 몇백 년 동안 이어온 저택을 싹 뜯어고칠 계획이었다.

이 고풍스런 저택이 최신 유행으로 범벅되는 걸 도저히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파라솔 밑에 앉아 태연자약하게 신문을 뒤적거리는 제플린의 뒤통수를 따갑게 노려보았다.

며칠 전 옥타비오가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의아한 일이긴 했으나 눈엣가시 같던 그가 사라진 건 그레이스 입장에선 당연히 기뻐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레이스는 어쩐지 제플린의 다음 목표가 자신일 것 같다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게 항상 신뢰의 눈빛을 보내던 제플린의 눈이 어느 순간 싸늘해졌다. 마치 ‘당신도 날 배신할 거지?’라고 캐묻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초조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레베카에게 도움을 준다고 약조하긴 했지만 그레이스의 마음속엔 언제나 데본셔가를 향한 충성심이 남아 있었다.

데본셔가는 어릴 때부터 그녀가 섬겼던 가문이었다.

그녀를 키운 건 이 저택이었고, 이 저택을 키운 것 또한 그레이스였다.

때문에 그녀는 줄곧 제 욕심과 충성심, 그 가운데 서서 저울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데본셔 저택은 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그레이스는 저택이 자신의 소유가 됐을 때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레베카 님께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야 해.’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폐허가 된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그레이스…….’

베이츠가 멀리서 그런 하녀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플린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건 명백한 살의였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해지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