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베이츠는 멀어지는 그레이스의 뒷모습을 넌지시 바라보다가 이내 제플린을 향해 발을 옮겼다.
“다녀왔습니다.”
계속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제플린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아, 그래. 뭔가 수확이 있었나?”
베이츠가 제플린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공작이 바리니카와 주고받은 편지를 입수했습니다.”
“뭐라고? 대체 무슨 수로?”
“제가 공작 성에 잠입하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성공했습니다.”
베이츠는 편지 다발을 제플린에게 건넸다. 편지 끝마다 율리안의 서명이 그려져 있었다.
“공작에게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공작은 레베카 님께 푹 빠져서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져 있더군요.”
“그런 것까지 일러주지 않아도 돼.”
제플린이 이를 바득 갈았다.
“하루빨리 계획을 실행시켜야겠어. 네가 구해온 건 일단 보험으로 가지고 있기로 하지. 연금술탑 쪽은 어때?”
“착실하게 증거들을 심어두고 있습니다. 연금술탑엔 대량으로 복사가 가능한 기계까지 있더군요. 바리니카 벽화에 쓰인 잉크와 똑같은 종류의 잉크로 바꿔둘 생각입니다.”
“하! 아무래도 여신께서 율리안을 버리신 모양이야. 이토록 일이 잘 풀리다니.”
제플린이 기분 좋게 허밍을 했다.
그런 그의 눈에 정원으로 산책을 나선 알리시아와 자신의 아들이 들어왔다.
그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모처럼 좋은 날이니 온정을 베풀어주도록 할까. 알리시아!”
제플린의 목소리에 양산을 쓰고 있던 알리시아가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남편을 발견한 알리시아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곧이어 제플린과 알리시아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유모차 안을 들여다보는 제플린을 바라보며 알리시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홀로 남은 베이츠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위태로운 데본셔 가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 *
단란한 점심 식사 후, 카림과 율리안은 하리츠 숲으로 떠났다.
둘은 말을 타는 중에도 티격태격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사이좋은 어린 소년들을 보는 것 같아 레베카는 내심 흐뭇했다.
“나도 따라가고 싶었는데!”
릴리는 곰 사냥이라는 말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따라가지 못하자 입을 삐죽 내밀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 카림이라는 공작님하고 겨뤄보고 싶었단 말이야. 정말 강해 보였어.”
레베카는 흠칫하며 릴리를 바라봤다.
릴리의 눈가에 살벌한 기운이 아른거렸다.
릴리가 연무장에서 웬만한 기사들도 떨 만큼의 기백을 가지고 있다는 건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의 앞에서 릴리는 마냥 순진한 어린애처럼 굴었다.
때문에 레베카는 그녀가 제국 최강의 기사였다는 사실을 가끔 잊고 살았다.
‘떡잎이 남다르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레베카는 강자와 겨루고 싶어 안달이 난 릴리를 보며 감탄했다.
“휴우…….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돌아오면 한 판 붙어보자고 해야겠다. 그래도 그렇지 구경도 못하게 한 건 너무해!”
레베카는 그런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랬다.
“릴리가 조금 더 크게 되면 같이 동행하겠다고 율리안이 약속했잖니.”
“정말 오빠가 약속을 지킬까?”
릴리는 율리안이 약속을 할 때면 언제나 레베카에게 재차 확인을 받아냈다.
둘의 관계가 회복되기 전 율리안이 깬 약속만 해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레베카는 언제나 그랬듯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율리안은 변했어. 만약에 네 오빠가 약속을 안 지킨다면 내가 아주 혼을 내줄게.”
“역시 베키가 최고야!”
릴리가 레베카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
한참을 부비적거리던 릴리는 고개를 들어 해맑은 미소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베키는 신이 내게 주신 것 중에 최고의 선물이야.”
자신의 딸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레베카는 이전 생의 프시케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릴리가 제게 보이는 믿음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그거면 됐다고? 당신,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나? 이제 당신 목숨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당신이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들 생각은 안 해?’
문득 율리안이 절규하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죽게 된다면 릴리도 슬퍼하겠지.
어린 마음에 받은 충격으로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몰랐다.
릴리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레베카는 다시 한번 더 저주를 풀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레베카는 상심한 릴리를 달랠 겸 공작 성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릴리는 레베카의 옆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훈련 다음으로 좋아했다.
둘은 천장 끝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오늘은 뭘 읽을 거야?”
“이거!”
릴리가 고심해서 고른 청소년용 소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어느새 릴리는 동화책에서 벗어나 조금 심오한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용사 리나의 모험이라. 재밌겠는걸?”
“응! 엄청 흥미진진할 것 같아. 베키는 뭘 볼 거야?”
“아, 나는…….”
레베카는 고서 여러 권을 보여주었다.
모두 요하네스 공작가에 대한 역사서였다.
책 선정을 마친 레베카와 릴리는 각자 자리를 잡고 책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책을 보다가도 릴리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레베카를 바라보곤 했다.
마치 그녀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짓에 레베카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면 릴리는 안심한 얼굴로 다시 책에 집중했다.
레베카는 그럴 때마다 더 필사적으로 역사서를 뒤적였다.
하지만 역사서에는 그녀가 알고 있는 것 이외의 사실은 적혀 있지 않았다.
‘단서가 아무것도 없네…….’
별 수확이 없자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렇게 쉽게 찾아질 거였다면 율리안의 저주는 진작에 풀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레베카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을 때, 벨마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레베카는 반사적으로 릴리를 바라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릴리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씩씩하게 말했다.
“괜찮아! 황녀님과 무슨 중요한 일을 하는 거지?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난 어린애가 아니거든.”
레베카는 어른스럽게 웃는 릴리를 보고 먹먹해졌다.
‘아니, 나는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면 좋겠어. 릴리.’
빨리 큰 아이는 상처가 많은 법이었다. 레베카는 그녀가 더 이상 빨리 자라지 않기를 바라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얼른 마무리하고 돌아올게. 손님도 계시니 저녁에 근사한 파티를 하자꾸나.”
릴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카트린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베카는 미소를 머금고선 치마를 들고서 예법에 맞는 인사를 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레베카, 우리 그런 인사치레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카트린느가 조급하게 레베카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이끌었다. 커다란 가방을 든 하녀가 그녀를 뒤따라왔다.
“무슨 일이기에 그래요?”
“레베카의 말을 듣고 제가 영감을 얻은 게 있거든요. 스승님과 머리를 맞대고 기가 막힌 걸 구상했어요.”
말을 마친 카트린느가 가방 속에서 투명한 수정구 하나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턱하니 올려두었다.
카트린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 호박석 목걸이 기억해요?”
“그럼요. 밤에도 환하게 빛이 나는 거 맞죠?”
“네. 거기에 쓴 공식을 응용해서 만든 시제품이에요. 신의 기사단은 신성력을 쓰잖아요. 무력도 웬만한 특수부대보다 강하고요. 레베카가 말한 대로 그들을 제압하려면 일순간이라도 무력화시키는 방법밖에 없어요.”
레베카는 수정구와 호박석을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빛으로 기절시키려는 거죠? 그러면 신성력에 영향을 주지도 않고 불필요한 살상 없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겠네요. 게다가 빛으로 공격한다는 점이 고상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방법은 아군에게도 영향이 간다는 큰 오점이 있어서 고려할 사항이 많을 텐데…….”
카트린느가 일순 멍해져서 레베카를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레베카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황녀께서 제게 힌트를 다 주셨잖아요. 이 정도 추론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카트린느가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할 수 없어요! 역시 당신을 따르기를 잘했어요. 레베카와 있으면 순간순간이 새로워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카트린느의 애정 어린 얼굴을 보다가 레베카는 문득 여태껏 자신에겐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어린 카트린느를 친구라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똑똑한 카트린느는 나이 차를 극복할 정도로 말이 잘 통했다.
만약 모든 일이 다 풀린다면 그녀와 한가하게 책을 읽고 토론을 하거나 쇼핑을 같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어색할 것 같았지만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이 된 게 없는데도 레베카는 요즘 들어 막연한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것도 율리안의 영향인가…….’
그가 자꾸만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하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여기게 된 건지도 몰랐다.
레베카가 씁쓸하게 웃고 있는 와중, 카트린느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비틀었다.
“아! 여기 소파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카트린느가 소파를 뒤적이더니 손가락만 한 약통 하나를 찾아냈다.
“이게…… 뭐죠?”
“제가 한번 볼게요.”
레베카는 카트린느에게서 약병을 건네받아 유심히 살펴봤다.
푸른색 액체가 반짝거리며 출렁거렸다. 분명 매일 꼼꼼하게 응접실을 청소했을 텐데 왜 이제야 발견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레베카는 그동안 응접실을 방문했던 손님들을 떠올렸다.
상인 몇 명과 오늘 도착한 카림, 그리고…….
‘알리시아.’
푸른색 액체가 꼭 알리시아의 변한 눈동자 색과 비슷하게 보였다.
게다가 뚜껑을 여니 투약 입구가 꼭 안약을 담는 통처럼 생겼다.
섬뜩한 예감에 레베카는 약통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건 제가 주인을 찾아서 돌려주도록 할게요.”
“네. 그러세요. 레베카 님 집에서 나온 물건이니까요. 말이 샜네요. 어쨌거나 이건 시제품일 뿐이라서 보완해야 할 점이 아직 많아요. 요약하자면 레베카 님께 자랑하고 싶어서 달려온 거예요.”
카트린느는 꼭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레베카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