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4화 (164/232)

164.

레베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짧은 시간 내에 시제품을 만들어 내다니 대단해요. 연금술사들이 카트린느를 칭찬하는 소리가 아주 자자하던데요?”

“그,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이게 다 레베카가 제 재능을 알아봐 준 덕분이죠.”

아무래도 그녀가 이곳을 찾은 건 칭찬이 목적인 것 같았다.

카트린느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목을 쓸었다.

속이 뻔히 보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귀여웠다.

레베카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기회는 아무에게나 던져지는 법이죠. 단지 그걸 잡는 사람과 놓치는 사람으로 나뉠 뿐입니다. 카트린느는 기회를 잡은 거예요. 그것도 아주 단단하게.”

레베카의 말에 카트린느의 낯빛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런 거였으면 좋겠지만요……. 부황께서 카리바나 왕국과 협상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레베카가 예언했던 것처럼 아주 좋은 값을 받아낼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레베카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카트린느가 말을 계속 이었다.

“언니들은 잘된 일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께, 그리고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하지만 저는 누군가의 아내로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전 목숨을 걸고 이 무기를 만들어 내겠어요.”

카트린느가 비장한 얼굴로 수정구를 잡았다.

레베카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트린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연금술탑으로 가죠. 일분일초가 아깝잖아요.”

카트린느가 힘차게 레베카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요!”

* * *

“카린!”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카트린느의 인기는 가히 엄청났다.

연금술사들은 레베카가 동행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카트린느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카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내 연구실로 온다는 약속 잊지 않았겠지?”

“무슨 소리야! 내 연구가 먼저야!”

“다들 잊은 거 아니겠지? 카린은 지금…….”

문득 느껴지는 온화한 시선에 세 명의 연금술사들이 고개를 삐걱삐걱 돌렸다.

레베카가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가만히 있으면 차가운 인상이라 그런지 연금술사들이 기겁을 하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고, 공작 부인! 몰라 뵙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익숙한 일이니까. 그럼 우리 카린 양을 잘 부탁드릴게요.”

레베카가 카트린느의 등을 떠밀면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베카는 연신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카트린느의 뒷모습을 웃으며 바라봤다.

연금술탑의 로브를 걸친 카트린느는 이제 어엿한 한 명의 연금술사처럼 보였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레베카가 마부에게 말했다.

카트린느를 다시 데리러 오기까진 몇 시간이 남았다.

레베카는 그동안 도서관이라도 뒤지면서 저주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멀리서 흙먼지와 함께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레베카 님!”

칸나가 말을 빠르게 몰면서 레베카를 불러 세웠다.

언제 보아도 그녀의 승마 기술을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다.

레베카가 다시 바닥에 내려온 사이 칸나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왔다.

“칸나!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구나.”

레베카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칸나는 그런 레베카의 얼굴을 벅찬 듯이 바라보다가 얼른 말에서 내렸다.

“그간 바빠서 소홀했던 점 사과드립니다.”

“얘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시킨 일 때문인 걸 뻔히 아는데 그런 원망을 하겠니.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레베카는 가만히 칸나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거친 피부가 차가웠다.

레베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분간은 큰일을 시키지 않을 테니 푹 쉬도록 해. 어휴. 얼굴 차가운 것 좀 봐. 일단 성으로 돌아가자.”

“네…….”

칸나는 수줍게 한 번 웃더니 타고 온 말을 탑의 마구간지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짐꾸러미를 들고는 레베카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칸나가 커다란 짐가방 속에서 서신 뭉치를 꺼내 들었다.

“성과가 있었습니다. 사냥개들이 모두 수락하겠다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레베카가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내민 서신 뭉치를 받아들었다.

그간 칸나는 정보원 역할을 맡은 사냥개들의 뒤를 캐고 있었다.

데본셔의 가신들이 제플린에게 등을 돌리게 하려면 가신들을 억죄고 있는 사냥개들을 하루라도 빨리 매수해야 했다.

정보원들은 저택에 있는 사냥개들보다 훨씬 더 용의주도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변을 일절 밖으로 누설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칸나는 몇 달 간 천천히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제 문제는 그들을 매수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제플린이 제 발등을 찍었지.’

로드리고의 서신을 통해 제플린이 인질을 상징하는 물건을 정보원을 포함한 모든 사냥개에게 보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열한 협박이었다. 물건을 받은 사냥개들은 분노했다.

레베카는 곧바로 그가 보낸 물건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추적이 거의 불가능했겠지만 옥타비오가 없는 제플린은 틈이 많았다.

그녀의 편으로 돌아선 저택의 사냥개들만으로도 물건의 정체와 수신인을 밝혀낼 수 있었다.

레베카는 제플린이 엉망으로 만들어 보낸 물건과 똑같은 물건을 구해냈다. 그리고 온전한 물건과 함께 자신을 도우면 소중한 사람을 구해낼 수 있다는 서신을 동봉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상황 파악이 빠른 정보원들이었다.

제플린이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냥개들과 마찬가지로 제플린이 망하게 되면 그들의 인질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레베카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이미 제플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이미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절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갑자기 내려온 밧줄을 덥석 잡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레베카는 서신을 한 장, 한 장씩 넘겼다.

그리고 동의를 뜻하는 물결치는 서명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물론 이 정도로 일이 잘 풀린 건 아마 베이츠의 침묵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체 알리시아와 무슨 관계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가 공작 성을 찾아왔다는 걸 율리안에게 전해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가 원하는 게 단지 알리시아와 그 아들의 안위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알리시아를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럼 설마…….’

레베카는 베이츠의 얼음 같은 푸른색 눈과 어두운 금발을 떠올렸다.

이전 생에서 레베카는 알리시아가 제플린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작저에서 레베카가 유일하게 자유로운 시간은 모두가 잠든 새벽녘뿐이었다.

그녀를 감시하는 사냥개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경계할 뿐 레베카가 밖을 나다닌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레베카는 바닥에 귀를 바짝 붙였다.

이 시간 때면 자신의 문밖을 지키는 사냥개가 어김없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곤 했다.

레베카는 문 앞에 인기척이 없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밖을 나섰다.

그녀는 옷을 단단히 여미곤 밤의 정원을 기척 없이 거닐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소소한 일탈이었다. 이런 것도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서글프게 달을 올려다보며 여느 때와 같이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이 동한 레베카가 소리를 따라갔다.

‘대체 언제쯤 레베카를 치워버릴 거야? 이건 약속과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알리시아의 목소리였다.

레베카는 순간 얼어붙은 듯 발을 멈췄다.

‘조용히 못해?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잖아.’

남자가 아주 조용히 속닥거리는 바람에 레베카는 그를 특정할 수가 없었다.

레베카가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을 때 알리시아가 볼멘소리로 읊조렸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내가 첫째 부인이 아니란 건 참아볼게. 그런데 내 아들은? 내 아들은 왜 아직도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냐는 말이야! 이러다가 레베카가 임신이라도 하면…….’

‘알리시아, 너도 인정했잖아. 제플린이 불임이라는 거. 그녀가 임신하려면 너처럼 외간 남자를 만난다거나 제플린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일밖에 없어.’

‘하지만…….’

‘그리고 착각하지 마. 그 아이는 데본셔의 핏줄을 잇지 않았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비밀을 폭로해 버릴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따위로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흥. 그걸 제플린이 알게 되면 당신도 무사하지 않을 걸.’

‘과연 제플린이 날 믿을까 널 믿을까? 내기해 봐도 좋아.’

그 이후로는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자세히 듣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알리시아와 대화하던 남자는 옥타비오가 분명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알리시아가 둘째를 임신한 것도, 자신이 프시케를 가지게 된 것도 제플린이 악마의 발톱을 복용한 이후였다.

불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몰아간 세월이 통탄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레베카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비밀도 폭로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불어닥칠 폭풍 같은 상황이 피곤했다. 그 모든 걸 상대하기에 레베카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서의 친부가 누군지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저 제플린과 닮은 사람의 아이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는데…….

‘아니겠지.’

베이츠는 그때만 하더라도 제플린의 완벽한 수하였다. 그런 그가 제플린을 배신하고 알리시아를 취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대번에 심각해진 레베카의 얼굴을 칸나가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아니. 이렇게 일을 잘 해줬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

“좋은 소식이 더 있습니다.”

“좋은 소식?”

“로버트 씨가 섬을 찾았답니다.”

“정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사실…… 레베카 님께 보고를 드리기 전에 로버트 씨는 저와 의논을 하곤 했습니다. 확실한 정보가 아니면 말씀드리기 싫다면서요.”

“그래서? 확실한 정보야? 정말 인질들이 잡혀 있는 곳을 찾은 거야?”

레베카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녀를 채근했다.

칸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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