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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5화 (165/232)

165.

“예. 아마 조만간 연락으로 자세하게 말씀드릴 테지만 이번에는 확실한 정보입니다. 사탕수수밭까지 숨어들어서 확인했답니다. 그곳에 자신의 여동생과 어머니가 있는 것까지도요.”

“그걸 목격했는데도 용케 이성을 챙겼구나. 로버트…….”

제 식구가 잡혀 있는 걸 발견한 로버트의 심정이 가늠도 되지 않았다.

칸나는 침울해진 레베카의 얼굴에 이마를 긁적였다.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어 했던 말인데 도리어 근심을 얹은 것 같았다.

칸나는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드리탄 남작 부인이 은밀히 살롱에 연락했습니다.”

순식간에 레베카의 머릿속에서 상념이 사라질 만큼 좋은 소식이었다.

드리탄 남작은 리조트 사업을 맞고 있는 데본셔가의 가신이었다.

인질들을 구출해내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인물의 등장에 레베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부인 말고 또 몇 명이나 연락이 왔어?”

“아직…… 한 명입니다. 하지만 조만간 다른 이들도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 데본셔 백작이 저택 공사로 돈을 더 많이 요구하고 있거든요.”

“한 명도 큰 성과지. 샬럿의 편지 이야기를 이네스에게 하길 잘한 것 같구나. 수고했어, 칸나. 휴가라도 줄까? 얼굴이 정말 많이 상했어.”

레베카가 퍽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칸나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하루빨리 레베카 님이 편하실 수만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나저나 이걸…….”

칸나가 잠시 멋쩍은 얼굴로 짐 가방을 뒤적이더니 직사각형의 네모난 금판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금판에는 달맞이꽃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끝에 빨간색 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 저번에 보니 책 사이를 냅킨으로 표시하시는 것 같아 책갈피를 하나 사봤습니다.”

레베카는 칸나의 뜻밖의 선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칸나가 긴장한 얼굴로 슬쩍 레베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장신구를 살까 했는데 보석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인기가 많은 거라고 해서 샀습니다. 혹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럴 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 요새 책을 읽을 일이 많았는데 딱 좋은 선물을 해주었구나. 고마워.”

레베카가 소중하게 책갈피를 만지작거리자 칸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칸나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는지 공연히 뺨을 쓸어내렸다.

레베카는 제 손에 쥐어진 자그마한 책갈피를 바라보았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

칸나의 말간 얼굴을 보며 레베카는 책갈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죽고 싶지 않아!’

* * *

녹음이 짙은 하리츠 숲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있었다.

그 탓에 아무리 해가 쨍쨍한 날에도 숲속엔 항상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세 명의 사냥꾼과 두 공작은 숨을 죽이고 곰의 흔적을 쫓았다.

사냥개들이 앞서 나가 숲을 종횡무진 누볐다.

율리안은 사냥개가 짖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며 신중하게 발을 내디뎠다.

한 번에 곰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는 아직까지 없었다. 때문에 보통 곰의 흔적을 쫓은 뒤 덫을 쳐 놓고 기다렸다.

대부분의 곰은 율리안이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사냥꾼 선에서 처리가 됐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쫓는 영악한 녀석은 웬만한 사냥꾼들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럴 때면 율리안이 나서서 곰을 쫓는 걸 도왔다.

오늘의 마지막 타깃인 불곰은 열 명의 사냥꾼이 달려들어 보름 이상을 쫓았는데도 잡을 수가 없었다.

녀석은 영리하게도 덫을 쳐 놓은 곳을 요리조리 피해갔다.

게다가 이 불곰은 인간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데다가 덩치도 다른 녀석들의 배는 돼서 벌써 사냥꾼이 두 명이나 죽었다.

무엇보다 이 녀석은 마을을 세 번이나 습격한 전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잡아야 했다.

“냄새가 점점 지독해지는 걸 보니 가까이 있는 모양이야.”

카림이 땅에 대고 코를 킁킁거리자 율리안이 대번에 질색하며 말했다.

“짐승 같다는 말을 자주 듣다 보면 정말 짐승이라도 되는가 보지?”

“이런 풍족한 영지에 사는 공작님께선 모르시겠지만 북부에선 토끼 새끼 한 마리라도 귀한 식량이라고. 이런 재미만 보는 사냥 따위 들어본 적이 없는 놈들이 많아.”

“재미라니. 이건 생존과 관련된 거야. 좀 더 진지하게 임할 수는 없어?”

“손님을 불러다가 일이나 시키다니. 이런 경우 없는 공작님을 봤나.”

카림은 툴툴거렸지만 이 상황이 내심 싫지는 않은지 그의 입술에 미미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그의 붉은 눈에서 시선을 뗀 율리안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넌…… 내가 공작이 아니더라도 어울려 줄 건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내가 공작이 아닌, 그냥 율리안 요하네스라도 내 장단에 기꺼이 맞춰주겠냐고 물은 거야.”

카림이 멀거니 율리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딱히 시답잖은 농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진심이야……?”

“뭐, 아직은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된다면 나야 좋지.”

카림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되면 체면치레 같은 거 버리고, 네놈과 한바탕 제대로 붙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갈 곳 없어지면 북부로 오라고. 부인께서 척박한 내 영지를 좋아하실진 모르겠다만.”

대수롭지 않게 흘러버리는 그의 태도에 율리안도 덩달아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레베카를 그런 험악한 곳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어. 공작 작위를 잃더라도 그녀를 고생시킬 일은 없을 만큼 돈은 썩어 넘칠 거야.”

카림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아. 그러셔. 네놈의 그 돈 자랑에는 이골이 났어. 그렇게 돈이 넘치면 이 비렁뱅이 군인에게 적선이나 해주시지 그래.”

“그저 주기는 어렵고……. 네 기사단을 빌려주는 조건은 어때?”

“나야 좋지만 어쩌려고? 우리 둘의 결탁은 황제가 법으로까지 금지해 뒀잖아. 넌 무력을 얻지 못하고, 난 돈을 벌지 못하지.”

카림이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마음만 먹으면 율리안과 손을 잡고 이 나라쯤은 뒤흔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첫째로 율리안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할 이유는 없었고, 둘째로 자신 역시 나고 자란 나라를 배신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카림은 율리안과 달리 어릴 적부터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배웠다.

때문에 그의 마음 한구석엔 로티카나 황실에 대한 충성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율리안은 카림의 찡그린 눈매를 슬쩍 보며 말했다.

“네게 감사를 표할 만한 일을 만들면 되지. 그런 단순한 선물마저 황제가 반대할 리는 없을 테니까. 여기로 내려온 게 내 초대 때문만은 아닐 텐데.”

“당연히 네 초대 때문이지 이런 울렁거리는 곳에 또 무슨 일이 있다고 내가 오겠어.”

“곧 겨울이 다가오지 않나. 올해 북부에 유례없는 흉년이 찾아왔다고 들었어. 식량을 수급할 곳을 찾으러 온 거 아닌가?”

카림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구걸 같은 걸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율리안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가 왜 너한테 공짜로 식량을 주겠어.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거든.”

“그럼 대체 뭔 생각이야?”

“아까 말했잖아. 내가 고맙다고 할 만한 일을 해달라고.”

“답답하게 굴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

“난 제플린 데본셔를 아주 나락으로 처박을 생각이야. 거기에 동참해 줬으면 해.”

카림이 눈을 크게 떴다.

율리안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삼자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라서 말이지. 내 연금술탑을 빼앗길 뻔한 일을 해결해준다면 그 보상으로 적절한 선물을 주도록 하지. 선물이 과하단 생각이 든다면 언젠가 위험에 처한 나를 도와주면 돼. 명분은 내가 만들어주지.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같은데, 어떤가?”

“위험에 처하다니? 감히 누가 요하네스 공작을 위협한다는 거야.”

“그건…….”

그 순간 사냥개들이 격렬하게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횡포한 곰의 울부짖음도 함께였다.

나동그라지는 사냥개들의 비명과 함께 사냥꾼 한 명이 외쳤다.

“젠장! 놈이 눈치챘습니다. 그쪽으로 달려가니 얼른 피하십시오!”

율리안의 대답을 성마르게 기다리고 있던 카림이 순식간에 눈을 번뜩였다.

“제일 강한 인간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보군. 아주 영리한 녀석이야.”

“그럴 여유 부릴 시간 없어!”

땅이 흔들릴 정도로 육중한 불곰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목을 긁는 듯한 굵직한 울음에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율리안과 카림은 잽싸게 나무에 올라 불곰을 피했다.

스스로의 속도를 주체 못한 곰이 주춤거리며 몸을 돌리는 사이 율리안이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율리안을 발견한 곰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율리안이 자처해서 미끼가 되는 사이 카림이 기다렸다는 듯 나무에서 뛰어내려 곰의 몸뚱이에 올라탔다.

“엄청난 놈이군 그래!”

카림은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그는 허벅지로 곰의 몸통을 단단히 고정하고는 맨손으로 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곰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율리안은 도망간 사냥꾼이 떨어트린 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카림! 한 방에 끝내!”

카림은 율리안이 던진 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요동치는 곰의 급소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굉음과 함께 드디어 불곰이 쓰러졌다.

“쯧……. 생각보다 싱거웠어.”

카림은 입맛을 다시며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율리안은 그 모습을 찡그리며 쳐다보다가 아직까지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사냥꾼들에게 소리쳤다.

“뒤처리라도 하지 그래?”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사냥꾼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사냥꾼들은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몸에 검은색 표식이 그려져 있는 불곰의 사체를 멀거니 바라봤다.

아직도 카림이 맨손으로 곰의 머리를 내리치던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특히 그 희열에 가득 찬 붉은 눈동자와 치솟은 입꼬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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