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6화 (166/232)

166.

‘괴물…….’

사냥꾼들은 연신 하품을 해대는 카림을 올려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와 율리안이 나란히 서 있으니 자신들이 동화 속에 나오는 난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 자신들을 고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사냥꾼들이 곰 사체를 운반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율리안이 물었다.

“이놈이 마지막인가?”

“네. 맞습니다. 표식이 있는 놈은 이 녀석이 마지막입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야겠군.”

율리안의 말에 카림이 발끈하며 나섰다.

“뭐라고? 이제 사냥감이 다 떨어졌단 말이야?”

카림의 항의에 율리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표식이 있는 곰은 이 녀석이 마지막이야.”

“흔적을 보니까 저 안쪽 숲에도 곰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이참에 씨를 말려버리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아?”

“인간이 이 숲의 주인도 아니잖아. 그리고 안쪽 숲은 곰의 영역이야.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저 녀석들은 인간을 해치지 않아. 우리가 잡는 건 마을을 습격했다는 표식이 있는 놈들 이거나 마을 근처까지 내려온 새로운 놈들뿐이야.”

율리안이 불곰의 목덜미에 크게 흩뿌려진 표식을 가리켰다.

카림이 쯧-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생각보다 시시하군…….”

“편지에도 썼잖아. 네가 생각하는 만큼의 피의 축제는 없을 거라고.”

“뭐. 여긴 네 영지니까 네 법을 따라야지.”

“그렇게 울상 짓지 마. 대신 성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붙어 줄 테니까.”

율리안이 손가락을 뚝뚝 꺾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를 빤히 보던 카림이 피식 웃음을 흐리더니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거 참 기대되는군. 나한테 얻어맞고 부인 앞에서 험한 꼴을 당해도 난 몰라.”

“하! 누가 할 소리.”

“그나저나 난 너보다 그 꼬맹이한테 더 관심이 가던데.”

“꼬맹이……?”

“네 숨겨진 동생 말이야. 이거 원. 올해 알게 된 네 비밀만 해도 몇 가지인지…….”

“릴리가 왜.”

잔뜩 풀어졌던 율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쌀쌀맞은 그의 태도에 카림이 혀를 찼다.

“대단한 천재라서 그렇게 꽁꽁 숨겨두신 건가? 릴리 걔는 호랑이 새끼도 아니고 그냥 호랑이였어.”

“그래서 내 동생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야.”

“한번 키워보고 싶어.”

“뭐?”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가르치고 싶어. 혹시 알아? 제국 최초의 여기사가 될지.”

“그런 위험한 일을 내가 시킬 것 같아?”

“걔가 하고 싶다 하면 너도 별수 없을걸. 그 정도의 재능을 가졌으면 스스로 날뛸 거야. 그러지 말고 내 따분한 일상에 재미 좀 보게 해줘. 그 정도로 쓸 만한 놈은 오랜만에 본단 말이지.”

카림이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율리안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의 말에 약간 혹했다.

아무래도 릴리의 실력이 점차 늘어나서 마땅한 스승을 찾는 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릴리도 좀 더 색다른 걸 배우고 싶다며 조르던 참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이 피맛에 환장하는 전쟁광에게 릴리를 들이미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일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잠시라면…….’

율리안은 카림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거리던 릴리를 떠올렸다.

아마 높은 확률로 성에 돌아가자마자 그와 붙어보고 싶다며 릴리가 먼저 도전장을 내밀 게 분명했다.

율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대신 잠시만이다.”

“그럴 줄 알았어.”

카림은 율리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서 제가 릴리에게 어떤 걸 가르쳐 줄 건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건성으로 그의 말에 대답하면서 군터의 고삐를 잡았다.

* * *

레베카가 마차에서 내리자 살롱을 오르내리던 인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베카에게 알은척을 해왔다.

원래도 유명했지만 근래 들어서 레베카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듯이 올라갔다.

레베카 데본셔였을 때는 @그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요즘은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레베카는 이런 변화가 기꺼웠다.

이전에는 제가 등장할 때마다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물러났다.

그게 아니라면 제플린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말을 끊어내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평범한 사람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럼 언젠가 티파티에 꼭 참석해주시는 거죠?”

레베카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초대장에 눈웃음으로 화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살롱을 만든 목적이 달성되는 날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가 와글거리고 있었다.

살롱은 이제 명실상부 최고의 사교장이었다.

레베카는 인파 속을 느긋하게 거니는 몽블랑 클럽 회원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자고로 바늘은 바늘 더미에 숨기는 게 가장 안전한 법이었다.

제플린의 가신이든 제국을 뒤흔드는 심판자든 라본느 살롱에 발을 디디면 여느 평범한 사람으로 변신하곤 했다.

은밀한 일을 도모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부인께선 이층의 10번 방에 계십니다.”

칸나의 속삭임에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기둥 뒤에 숨어서 정원 쪽을 흘깃거리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은색 장발에 레베카가 눈을 크게 떴다.

“유스타프……?”

레베카의 목소리에 유스타프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쳐다봤다.

“히익! 레, 레베카 님!”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레베카가 의아한 얼굴로 유스타프의 시선이 향하던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정원의 나무를 살펴보고 있는 마가렛이 서 있었다.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가렛과 유스타프를 번갈아 봤다.

유스타프가 잘못을 발각당한 사람처럼 펄쩍 뛰며 말했다.

“오, 오해 마세요! 저는 그저 마가렛이 식물 영양제를 부탁해서 온 것뿐입니다.”

“흐음…… 그래요?”

유스타프는 의심이 가득한 레베카를 향해 영양제 박스를 힘차게 들어 보였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태도에 레베카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그런데 제가 무슨 오해를 하셨다고 하는 걸까요? 전 당신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 걸요. 누가 들으면 당신이 마가렛을…….”

“으아악!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유스타프가 화들짝 놀라며 레베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칸나가 서슬 퍼런 눈을 빛내며 그의 팔을 낚아챘다.

“어딜 손을 대려고.”

“아……. 죄송합니다.”

유스타프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답지 않게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워 레베카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기운내요. 마가렛이 보기에 쌀쌀맞게 보일지 몰라도, 한번 마음을 열면 정말 다정한 사람이거든요. 매너 있게 행동하다 보면 그녀도 마음을 열지 몰라요. 물론 너무 성급하게 다가가진 말고요.”

“저, 정말 그럴까요?”

유스타프가 약간의 희망을 품은 얼굴로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순식간에 우울함이 가신 그의 표정에 레베카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항상 돈을 끌어모으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었지만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email protected]느껴졌다.

레베카는 이 사람이라면 마가렛을 자주 웃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업을 시작한 뒤 마가렛은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항상 과하게 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매사에 머리가 꽃밭인 유스타프라면 메마른 마가렛의 일상에 단비를 내려줄지도 몰랐다.

유스타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아, 지인을 만나려고 잠시 들렀어요. 그렇지, 유스타프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레베카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응접실에@서 카트린느가 발견했던 물약을 꺼내 들었다.

“혹시 이 약의 정체와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안약인가요……?”

유스타프는 병 안에서 찰랑이는 액체를 유심히 바라보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흠……. 대충 봐서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만 정확한 건 더 조사해봐야겠는데요?”

“급한 일은 아니니 천천히 하셔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서 성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이건 보답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마가렛의 마음을 얻으려면 잭을 공략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잭이요? 마가렛의 아들 말입니까?”

“그래요. 그 아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선 절대 마가렛과 연인이 될 수 없을 걸요?”

“여, 연인이라니요! 레베카 님, 억측이십니다!”

상상만 해도 좋은 듯 유스타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레베카는 소리 나게 웃으며 목까지 붉어진 그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 * *

라본느 살롱의 10번 방에 모인 다섯 명의 부인들은 살롱 직원이 차를 따르는 걸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축음기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았더라면 숨 막힐 듯한 적막에 누구 하나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분째 이어지는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엘레나 윈터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오늘은 평소에 모이던 15번 방이 아니네요. 하지만 10번 방도 아름다워요. 이건 드리탄 부인께서 의뢰하신 방인가요?”

엘레나는 방 한쪽에 아름드리 뻗은 물푸레나무를 감탄 어린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인조 잔디가 깔려 있었다.

군데군데 진짜와 구분할 수가 없는 들꽃 조화까지 뿌려져 있어 마치 숲 한가운데서 티타임을 가지는 것 같았다.

엘레나의 질문에 메리 드리탄이 엷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된 방인 듯하네요.”

“아…….”

누가 준비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엘레나가 멋쩍게 입을 다물자 방 안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메리가 고개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차를 들고 있는 이네스를 흘깃 쳐다봤다.

며칠 전, 두문불출하던 그녀가 갑자기 모임에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이네스 데본셔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딸이 실종된 이후로 절망에 빠져 사는 그녀의 모습은 꼭 제플린이 던지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내 말에 거역하면 당신들도 저렇게 만들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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