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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7화 (167/232)

167.

그가 샬럿을 납치한 건 일종의 본보기였다.

자신들은 운이 좋아서 자식들을 빼앗기지 않았을 뿐이라고, 수가 틀리면 언제든지 그들의 자식을 데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처음 샬럿이 실종됐을 때 다들 황제께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곧 제플린이 아무 증거도 남기지 않은데다가 그가 가문의 자금줄까지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플린의 패악이 더 심해진 지금 이네스가 스스로 죽지는 않았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이네스의 얼굴은 예상외로 무척 밝았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값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치고서 활기차게 안부를 물어왔다.

‘다들 잘 지냈어요? 너무 오랜만에 봬서 그런지 얼굴이 가물가물할 정도예요. 그래도 다들 아름다운 건 여전하시네요.’

메리는 드디어 저 여자가 미쳤나 싶었다.

하지만 이후로 이네스는 모임에 계속해서 참석했고 그때마다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등장했다.

‘다들 사정 아는데 제가 계산할게요.’

모임의 모든 비용을 감당하는 건 물론이고, 심심치 않게 선물까지 해왔다.

이쯤 되니 다들 이네스의 재력의 원천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3할 정도의 수수료를 받아 가던 제플린은 최근 온갖 핑계를 대며 수입의 6할을 가져갔다.

직원들의 월급을 챙겨주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니 데본셔가의 가신들은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몇 재산을 처분한 집도 있었다.

이네스도 분명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디서 그런 돈이 나왔는지 추궁하자 이네스가 말했다.

‘레베카요. 레베카 공작 부인께서 살 길을 열어주셨어요.’

메리는 순간 멍해졌다.

레베카? 내가 아는 그 레베카?

이네스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그저 라본느 살롱에 레베카를 찾는다고 언질만 줘보라고 조언했다.

뭣하면 자신이 대신 말해주겠다고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메리는 처음에 이네스의 제안이 사기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갑자기 돈이 많아진 친구의 제안은 의심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무려 요하네스 공작 부인이었다.

레베카가 제플린의 아내였다면 당연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이제 그녀의 입지는 달라져 있었다.

레베카가 뭐가 아쉬워서 자신들에게 사기를 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들에게 접근하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복수…….’

이곳에 앉은 모든 부인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최근 들어 시작된 제플린의 몰락이 분명 우연은 아닐 거라고.

남편은 지나친 상상이라 일축했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칼을 품은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해내는지.

차를 기울이며 부인들은 제각각 레베카의 큰 그림을 예상해봤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레베카가 그녀들을 돌아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레베카 오벨리아입니다.”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다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꺄악!”

그 탓에 차가 엎질러져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레베카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차를 다시 내와 달라 부탁해 주겠니? 아, 아니다. 커피가 좋겠구나.”

칸나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부인들이 레베카의 유려한 손짓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다들 어떠신가요. 제가 새로 발견한 원두입니다. 화산 지역에서 자란 원두로, 스모키한 향이 일품이지요.”

레베카의 말에 다들 새로 내온 커피를 홀짝였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향긋한 훈연향이 입 안 가득히 퍼졌다.

어느새 레베카의 옆자리를 차지한 이네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너무 좋네요. 역시 레베카 님은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처음 엘윈이 샬럿을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이네스는 믿지 않았다.

기약 없는 희망은 이제 질렸다. 샬럿은 죽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를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이네스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집 안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엘윈이 뭐라고 지껄이든지 이네스를 두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가 샬럿의 편지에 암호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고 왔을 때, 이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장식이라 생각했던 꽃 그림이 샬럿의 메시지였다.

내 딸이, 내 새끼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자신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모란 작자들은 삶을 놓아버리려고 했다니.

이네스를 편지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이 다 말라버릴 정도로 울고 나서 그녀는 식당으로 향했다.

저택에 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모조리 입에 집어넣었다.

뼈밖에 없던 그녀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샬럿이 살아 있고 그곳을 빠져나오고자 한다면 도와줘야 했다.

나는 그 아이의 엄마니까.

“이네스가 언제부터 레베카 님과 인연을 맺었을까요?”

엘레나가 레베카와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이네스를 보고 메리에게 속닥거렸다.

“글쎄. 이유는 모르지만 분명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시체 같던 이네스가 저렇게 펄펄 날아다니는 걸 봐. 꼭 레베카 님이 샬럿을 구해주기라도 한 것 같잖아.”

“설마…….”

엘레나는 멍하니 레베카의 인자한 얼굴을 응시했다.

몇 달 새 그녀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싶었다.

엘레나는 레베카의 얼굴을 요목조목 관찰하다가 그만 레베카와 눈이 마주쳤다.

레베카가 빙긋이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엘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녀는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레베카가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고 유혹하기라도 하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았다.

‘아직 경계하고 있군.’

레베카는 아직도 얼떨떨하게 자신을 흘깃거리는 부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자리에 데본셔가 가신들의 모든 부인을 초대한 것은 아니었다.

레베카가 부른 건 알리시아와 제플린의 결혼식 날 그녀를 끝까지 배웅해주었던 부인들이었다.

제플린에게 반항하려는 불씨를 품고 있는 사람들.

레베카는 그 불씨에 장작을 밀어 넣고 풀무질을 해줄 생각이었다.

“제가 이렇게 당신들을 부른 이유가 궁금하시겠지요.”

“이네스 말로는 저희에게 살길을 열어주시겠다고…….”

메리가 먼저 용기 있게 입을 열었다.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제가 데본셔가에 있는 동안 여러분들이 제게 보여줬던 호의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에 보답하고자 여러분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고 합니다. 아, 물론 자선사업은 아니니 동정을 한다고 생각해서 기분 나빠 하지는 마세요. 제게 득이 되는 점도 있거든요.”

“호의라니요. 저희는 해드린 게 없는데…….”

엘레나가 말끝을 흐렸다.

자신들은 방관자였다.

레베카가 괴롭힘을 당할 동안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가끔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몰랐다.

이전 생에서 레베카가 가신들의 모임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것을.

레베카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로해주는 이들의 눈빛에 힘을 얻곤 했다.

특히 엘레나는 뒤에서 몰래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들에겐 잠시간 베푼 선행이었을지는 몰라도 레베카에겐 큰 의미였다.

“아니요. 당신들은 제게 위로를 해주셨지요. 제플린에게 들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러니…….”

레베카는 잠시 말을 끊고 칸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칸나가 서류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 다섯 명의 부인 앞에 차례로 놓았다.

“이네스, 메리, 엘레나, 발렌티나, 그리고 나디아. 저는 당신들에게 독립을 제안합니다.”

“도, 독립이요?”

이네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도 처음 듣는 소리인 듯싶었다.

다들 정신없이 계약서를 훑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들으세요. 이건 제플린 이외에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계약입니다. 우선 여러분께서 맡고 계신 사업을 망쳐놓으세요.”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나디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사업을 망쳐놓으라니요?”

“한 번에는 말고 차근차근 수입을 줄여가란 말입니다. 그로 인해 입는 손해는 제가 보상하도록 하지요. 여러분의 생활비를 보장하겠습니다.”

“하지만 백작님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예요.”

“그건 걱정 마세요. 여러분들의 집에 숨어든 사냥개들은 이미 제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이 제플린에게 보고할 말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아무 이상이 없다.”

레베카는 그 증거로 사냥개들에게서 받아낸 충성 서약을 보여줬다.

“맙소사! 산체스가 사냥개였다고?”

발렌티나가 제 집사의 이름이 적힌 서약서를 받아들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배신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충격을 받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그들은 이제 목줄 풀린 사냥개가 될 테니까요. 곧 인간의 몸이 되어 자유를 찾아 떠나겠지요.”

“목줄을 풀다니…….”

“제플린이 인질들을 잡아둔 본거지를 찾았습니다. 저희는 그들을 구출할 예정이에요.”

모두가 일제히 이네스를 바라봤다. 이네스가 눈물 맺힌 시선을 떨구었다.

나디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하, 하지만 이런 엄청난 일을 저희에게 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희가 레베카 님의 계획을 발설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러실 건가요?”

레베카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나디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디아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제, 제가 꼭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왜냐하면 여러분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니 발설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를 자세히 봐주세요. 제플린 데본셔가 감옥에 수감되는 순간 저는 그의 사업 전부를 매수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기겠습니다. 제플린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거든요. 애초에 여러분들이 일궈낸 사업이니 여러분이 가지는 게 순리겠지요.”

엄청난 제안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엘레나가 말했다.

“이런 중대한 일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어요. 남편에게 허락을 맡아야 해요.”

“맞습니다. 여러분의 사인은 아무런 효력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라면 도장을 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남편에게 말하지 않겠어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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