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독립하고자 했다면 시도라도 해보았겠지요. 하지만 여기 모이신 부인들의 남편 중 그걸 계획이라도 했던 분이 있나요? 오랜 시간 동안 제플린의 개로 살아온 남편들이 쉽게 이 제안을 수락할까요? 전 아니라고 봐요. 재수 없으면 우리의 계획을 일러바칠 수도 있겠군요.”
레베카가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며 덧붙였다.
“말 그대로 손해 볼 것 없습니다. 계획이 실패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공으로 생활비를 얻게 되는 것뿐이고, 만약 제 계획이 성공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독립된 사업체를 가지게 되는 거겠죠.”
나디아가 아직도 의심을 걷지 못한 눈으로 레베카에게 물었다.
“물론 저희는 큰 손해를 보지 않겠지만 레베카 님께선 적지 않은 금전적 손해를 보시게 되는 거잖아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요?”
“왜겠어요?”
레베카가 넌지시 물어왔다.
발렌티나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보, 복수…….”
“그래요. 전 복수를 위해 다시 태어났답니다. 그러니 제플린을 응징할 수 있는 일에 아까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레베카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자, 그럼 이제 선택하세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레베카가 느긋하게 손깍지를 끼고서 부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서로를 바라보던 부인들의 입매가 결연하게 굳었다.
* * *
“메리, 잠깐만요.”
살 떨리는 모임이 끝나자 부인들은 계약서를 소중히 품에 안고 삼삼오오 집으로 향했다.
레베카는 뒤늦게 일어서는 메리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준비했던 봉투 하나를 건넸다.
메리는 영문도 모른 채로 떨떠름하게 봉투를 받아들었다.
“아까 보니 커피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기에 원두를 챙겨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왜 저에게만……?”
“대신 이걸 제플린에게 전해주세요.”
레베카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메리가 멍하니 명함을 바라봤다.
<원두 상인 아돌프>
처음 보는 이름의 상인이었다.
그녀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베카가 말을 이었다.
“화산섬에 있는 리조트를 드리탄 가문이 운영한다고 들었어요. 물론 그 섬은 제플린의 소유겠지만요. 오늘 부인께서 마신 커피는 곧 제국을 강타할 거예요. 제일 먼저 선점한 사람이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원두 사업까지 할 여력은 없습니다.”
“굳이 직접 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저 제플린에게 사업 제안을 해주시면 됩니다. 거기 적힌 원두 상인은 봉가니산 원두를 제국에 최초로 유통한 사람이에요. 제가 드린 원두와 함께 이 자를 알려주기만 해도 제플린은 흔쾌히 사업을 벌일 게 분명해요. 돈이 급할 테니까요.”
“그, 그것만 하면 되나요?”
메리의 불안한 눈빛에 레베카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사근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인께선 평소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조만간 사람을 보낼게요. 매달 드릴 생활비와 함께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이만…….”
레베카는 메리의 등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모두가 방을 나간 지 한참 뒤에야 레베카는 살롱을 나섰다.
회중시계를 들여다본 칸나가 레베카에게 속삭였다.
“곧 카트린느 황녀님을 모실 시간입니다.”
“그래. 얼른 가자꾸나.”
그녀의 뒤를 따르던 칸나가 레베카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물었다.
“저어……. 한 가지 의문 사항이 있습니다.”
“말해보렴.”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시고 방문하면 황녀님과 레베카 님께서 지금 성에 함께 있다는 알리바이가 깨지지 않습니까?”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구나.”
칸나의 질문에 레베카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을 사뿐히 밟으며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거야.”
“네?”
“이제 무기 시제품도 나왔겠다, 황제께서 슬슬 우리 황녀님의 뒷조사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비밀로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물론 공식적으론 비밀이지. 황제께서 진실을 알게 되어도 비밀에 부치실 거야. 지금쯤이면 카리바나 왕국과 협상이 거의 끝났을 텐데, 신붓감이 스캔들에 휘말리면 폐하의 체면이 구겨지시지 않겠니?”
“예.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지요.”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레베카가 빙글 몸을 돌려 칸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매가 단단해졌다.
“지금은 폐하께서 스스로 의심을 하셔야 할 때야. 과연 카트린느가 적절한 신부인지, 이러다가 배상금을 물어내야 하지는 않을지 고민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서 협상을 질질 끌도록 만들어야 해. 그리고 도장을 찍기 전에 카트린느가 아주 형편없는 신부이자 제국 최고의 무기 연금술사란 걸 알려드릴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끌 게 아니라 바로 사실을 알려드리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협상을 당장 중단하시게요.”
“자히드라 황제는 아주 신중한 사람이야. 카리바나 왕국에서 아마 막대한 이득을 제시했을 테지.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결과물을 눈앞에 가져다주지 않는 이상 황제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게 설령 딸이라고 해도 말이지.”
“혹시나 그때까지 무기가 완성되지 않으면요?”
“비장의 카드를 써야겠지.”
레베카는 잠시 손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없도록 기도라도 올리자꾸나. 신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 *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그동안 연금술탑에는 신성 모독 증거가 차곡차곡 쌓여 갔고, 데본셔 백작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은보화가 잔뜩 쌓여 있던 제플린의 창고 또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이번 달 수입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거지?”
제플린이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가신들의 상납금을 모아온 엘윈을 노려봤다.
“사업의 성과가 전체적으로 저조합니다. 아무래도 상납금이 과하다 보니 적절한 곳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해 와야 할 것 아니야! 이러다간 분수대도 설치 못 하게 생겼어!”
제플린이 사납게 짖듯이 소리쳤다.
엘윈은 그가 던지는 책을 능숙하게 피하면서 제플린을 흘깃 바라봤다.
백작은 예전엔 그래도 총기란 게 보이던 사람이었다.
가끔은 자신이 감탄할 정도로 예리하게 사업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옥타비오가 감옥에 갇히고 레베카마저 잃은 그는 집착에 미쳐버린 사람 같았다.
분명히 적자투성이인 장부를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아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무슨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이제야말로 미친 게 분명했다.
‘미칠 거라면 내 딸이나 곱게 내놓고 미치든가…….’
엘윈이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제플린이 머리를 싸매더니 책상을 팔꿈치로 쿵쿵 내리찍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율리안이 망해도 레베카를 설득할 수가 없잖아.”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제플린의 목소리에 엘윈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해괴한 짓거리가 레베카를 다시 데려오려고 벌이는 거였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이 이 정도로 강렬할 수가 있나.
아니, 이건 집착을 넘어서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다.
엘윈의 뜨악한 표정을 보고 제플린이 미간을 모았다.
“왜? 불만 있어?”
“아, 아닙니다.”
“하……. 어디 돈이 나올 구석이 없나. 숙부님, 무슨 계책이 없으십니까? 저는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계책이라 하시면……. 아! 그렇지. 저번에 드리탄 남작이 가져온 원두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한번 마셔봤는데 확실히 맛이 독보적이었습니다. 봉가니산 원두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요.”
“원두?”
“예. 화산섬에서만 자란다는 원두 말입니다.”
“그렇지……. 그게 있었지.”
제플린은 서랍을 열더니 명함을 모아둔 금색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케이스의 뚜껑을 열자 제일 윗면에 아돌프의 명함이 보였다.
제플린은 명함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서 있던 베이츠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하명하십시오.”
“저번에 조사하라 했던 아돌프란 상인은 어떻게 됐지?”
베이츠가 엘윈을 흘깃 곁눈질하며 말했다.
“딱히 신변에 이상한 사항은 없었습니다. 부인을 병으로 일찍 여의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는 평범한 상인입니다. 다만 상품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자인 건 확실합니다. 봉가니산 원두도 그자가 가장 먼저 유통했다는 게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최근에 화산 커피에 투자할 투자자를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제플린이 명함을 책상에 세우고 빙그르르 돌렸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퍼져나갔다.
“그래서 누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하던가?”
“잔챙이들부터 거물까지 다양합니다. 지금까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로는 헬렌 몬타나, 살바도르 윈스터 교수와 서몬드 백작, 그리고 요하네스 공작이 있습니다.”
“요하네스 공작이라고?”
제플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확정된 건 아직 없겠지?”
“예. 아돌프라는 그 상인은 아주 신중한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조만간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요하네스 공작이 지분을 가장 많이…….”
“안 돼!”
제플린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지금 당장 아돌프란 인간을 내 앞에 데리고 와. 나에게 아주 질 좋은 화산섬이 많이 있다고 꼬드겨서 말이야. 화산섬을 제공하는 대신 독점계약을 맺고 싶다고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베이츠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서재를 나섰다.
엘윈은 놀란 눈으로 베이츠의 뒷모습을 좇았다.
드리탄 남작이 며칠 동안 설득해도 미동도 하지 않던 제플린이 단번에 넘어왔다.
설마 베이츠까지 레베카의 편으로 돌아선 것일까.
엘윈은 삐걱거리며 제플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플린은 그의 충성스런 수하가 물어다 줄 막대한 재산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의 어깨 위로 싸늘한 가을 공기가 내려앉았다.
이제 정말 제플린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