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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9화 (169/232)

169.

“그것밖에 안 돼? 거기선 오기를 부리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해야지.”

카림이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릴리의 목에 목검을 겨누었다.

“넌 방금 뒈졌어. 꼬맹아.”

“꼬맹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럼 땅꼬마.”

“으아아악!”

릴리가 득달같이 화를 내며 카림에게 덤벼들었다.

분기에 차서 이성을 잃은 줄 알았더니 오히려 그녀는 아까보다 한층 더 예리하게 공격을 가해왔다.

쉴 새 없이 베고 찌르며 목과 가슴 등의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카림은 여유롭게 피해냈다.

몇 분간 비슷한 공격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카림은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목검조차 건들지 못할 것 같자 릴리는 잠시 한 발짝 물러섰다.

“뭐야, 벌써 포기하는 거야?”

릴리는 카림의 도발에 대답하지 않은 채 크게 스텝을 밟으며 검을 찔러왔다.

‘동작이 쓸데없이 크군.’

카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피하려 했다.

그 순간 릴리의 자세가 낮아지며 그가 몸을 트는 방향으로 회전하며 검을 휘둘러 왔다.

‘이건 피할 수 없겠는데……?’

카림이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는 허리춤을 베어 들어오는 릴리의 목검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카림이 목검을 몸 뒤편으로 꺾으며 간신히 릴리의 공격을 막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놀라운 속도였다. 신장 차이를 고려한 아주 적절한 공격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평범한 기사였다면 속절없이 그녀에게 허리를 내어줘야 했을 것이다.

타악-

큰 충격음이 들려왔다. 둘은 검을 맞댄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를 바라보는 릴리의 눈빛은 냉정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카림이 뒤로 돌아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카림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표정에서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굉장하군, 내가 방심했다 쳐도 이렇게 빠른 몸놀림과 판단력이라니…….’

그녀를 가르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조금만 가르쳐도 릴리는 스펀지처럼 그의 가르침을 흡수했다.

가끔은 변형시키기도 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카림은 구슬 같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는 릴리를 보며 비뚜름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릴리가 숨을 헉헉 내쉬었다. 그녀의 체력이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카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계를 돌파해야 성장이 있는 법이었다.

여태껏 그녀의 스승들은 율리안의 눈살에 못 이겨 대충 봐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림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여기 있는 짧은 시간 동안 릴리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릴리도 지쳤다는 소리를 죽어도 하지 않았다.

오기가 가득한 눈을 빛내며 릴리가 목검을 다시 손에 쥐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 벌써 몇 시간째야…….”

연무장 한쪽의 나무 그늘 밑에서 레베카와 율리안이 둘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잔뜩 지쳐 보이는 릴리를 보고 레베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율리안도 인상을 찡그리며 릴리를 바라봤다.

“그랬다간 릴리가 또 연습을 방해했다고 길길이 날뛸 거야. 카림이 알아서 하겠지…….”

그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 노파심에 릴리의 흥을 깨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에 눈이 멀어 그녀를 가두는 건 이제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율리안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릴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그래도 믿어주는 게 맞는 거겠지?”

율리안의 어깨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져 왔다. 레베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에서 물씬 풍겨오는 비누 냄새에 코를 움칫거렸다.

레베카가 넌지시 팔짱까지 껴오자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아카데미 수업을 참관하는 학부모가 된 것 같지 않아?”

레베카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율리안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문득 율리안은 레베카를 닮은 딸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레베카처럼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며 아빠라고 부른다면 자신은 아마 녹아내릴 것이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아빠가 되겠지.

과연 자신이 부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싶더라도 레베카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다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

율리안은 레베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릴리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자그마한 비명을 내지르는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잔머리마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구나.’

율리안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애정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그의 애정을 모조리 표현했다간 레베카가 질려서 그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에 그쳐야만 했다.

“으응? 뭐야?”

레베카가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나뭇잎 그림자가 레베카 얼굴 위로 드리웠다.

빛과 어둠이 한데 얽혀 그녀는 꼭 얼룩덜룩한 가면을 쓴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레베카의 광대뼈 언저리가 꽃잎을 뿌려놓은 것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율리안은 그 예쁜 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본 분홍색 중 단연코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는 분홍빛이 그녀의 얼굴 전체에 퍼지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광대뼈를 엄지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그리고 안달 난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지금만큼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어.”

그의 눈이 살풋 접혀 들었다.

레베카는 그의 눈웃음을 마음껏 만끽하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화답하듯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나도 그래,”

“레베카…….”

율리안이 수줍게 웃다가 다시금 그녀의 입에 짧게 입을 맞췄다.

레베카도 지지 않으려는 듯 그의 입에 입술을 가져갔다.

둘은 공방을 주고받듯 짧은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맞춰 입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무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입술을 맞대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더니 점점 농밀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가 뭉근한 살덩이를 그녀의 입 안으로 넣으려는 순간 민망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커흠…… 흠…….”

레베카가 화들짝 놀라며 율리안의 목에 두른 팔을 떼어냈다.

“크, 크로아! 그러니까 이건…….”

레베카가 횡설수설하는 동안 율리안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솔직히 말해봐. 나 몰래 무슨 특명이라도 받은 게 확실하지? 우리를 방해하라는?”

“저도 기다리다가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저길 보세요. 어린 여동생분 앞에서 할 법한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크로아가 연무장 쪽을 가리켰다.

휘익-

카림이 빈정거리며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릴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앵두 같은 눈동자가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뭘 봐! 하던 거나 마저 해!”

율리안이 머리끝까지 빨개진 채로 두 사람을 향해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 자네들도 하던 거 마저 해!”

카림이 낄낄거리며 목검을 붕붕 휘둘렀다. 그러더니 릴리에게 뭐라고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릴리가 단번에 환한 미소를 짓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오빠! 나 조카 보고 싶어! 그러니까 오늘은 책 읽어주러 안 와도 돼!”

“푸흡!”

크로아가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율리안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릴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카림을 그녀의 스승으로 삼은 건 잘못된 결정인 것 같았다.

카림이 또다시 릴리에게 대화를 걸자 율리안이 이마를 짚었다.

“이거 완전 카림한테 물들어버렸잖아. 야!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하는…….”

레베카가 그의 옷자락을 다급히 잡아당기는 바람에 율리안은 고함치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얼굴이 자줏빛으로 변한 레베카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제 그, 그만해…….”

율리안은 멍하니 레베카를 바라봤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눈을 끔뻑거렸다.

레베카는 늘 냉정하거나 짓궂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얼굴을 붉히고 있다니.

율리안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더 알고 싶었다.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레베카의 얼굴을 남김없이 눈 안에 담고 싶었다.

그는 이미 릴리의 충격적인 발언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레베카, 당신 정말이지 너무 예뻐…….”

율리안이 다시금 레베카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레베카가 질색하며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좋기는 했다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다.

레베카는 구경거리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정말! 그만하라니까!”

“이렇게 흘기는 것까지 예쁠 수가 있나.”

율리안은 놔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안은 두 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레베카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율리안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낮게 읊조렸다.

“안 놔줄 거야.”

레베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요망해……. 아주 요망하다고!’

온몸에 누가 불을 지른 것처럼 오금이 저려 왔다.

레베카는 그의 내리깐 속눈썹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대로 그냥 침실로 끌고 가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예, 예. 두 분의 깊은 애정은 잘 확인했고요. 자, 여기 서신 받으십시오. 아주아주 급한 서신 같지만 두 분께 붙은 불을 빨리 끄는 게 더 급할 것 같군요. 그럼 미천한 방해꾼은 사라지겠습니다!”

크로아는 질린다는 얼굴로 서신을 율리안에게 던지듯이 건네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서, 서신이 왔네. 이걸 확인해야지. 급한 거라잖아.”

레베카가 율리안의 손에서 서신을 빼앗아 들고 얼른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율리안은 끙끙거리며 싫은 소리를 하다가 마지못해 그녀와 함께 서신을 읽었다.

<커피 배달 성공. 습격은 일주일 후에 있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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