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베이츠군.”
무미건조한 필체를 보며 율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처음 찾아왔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일을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다니.”
“첫 번째 사냥개로 살아남은 사람이니 이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레베카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제 시작이네. 제플린이 미끼를 아주 단단히 물었어.”
율리안이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겠어?”
“응? 뭐가 말이야?”
“알리시아 그 여자를 그냥 이대로 편히 보내주는 거 말이야.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베이츠의 제안을 거절하도록 하지. 그의 도움 없어도 성공할 수 있어.”
레베카는 가만히 도리질을 쳤다.
“괜찮아. 알리시아에 대한 복수는 이 정도면 충분해.”
“복수? 당신이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그냥…… 그런 게 있어.”
레베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율리안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레베카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베이츠가 있어서 일이 수월해진 것도 사실이잖아. 그가 주겠다고 했던 선물도 남아 있고.”
“그건 그렇지만……. 뭐, 당신이 상관없다면 나도 좋아.”
“그럼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그래. 제플린 그 자식의 면상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구겨줘야겠어.”
율리안이 형형한 눈을 빛내며 손마디를 우두둑 꺾었다.
그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얄궂게 웃어 보이는 그를 따라 레베카도 실없이 웃고 말았다.
* * *
흔들거리는 갑판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아돌프는 멍하니 수평선 끝에 보이는 섬을 바라봤다.
며칠간의 항해는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한 점이 없었고 파도는 잔잔했다.
거기다가 적절하게 부는 바람에 예상보다 더 일찍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치 신이 가호를 내리듯 순탄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분위기도 아돌프의 긴장을 씻어주진 못했다.
그는 갑판 한쪽에 자리 잡은 열다섯 명의 장정을 흘깃 바라봤다.
그들은 인부처럼 위장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 유명한 요하네스 공작의 그림자 기사단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찾아왔어요.’
레베카가 처음 그의 가게를 방문했을 때 아돌프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요 몇 달간 사업이 날개 돋친 듯 잘되는 게 우연일 것 같진 않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로 가세가 많이 기울였다.
아이들을 보며 힘을 내야 했지만 아내와 함께 꾸려가던 가게에 발을 디딜 때마다 괴로운 추억이 떠올랐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가게를 열었을 땐 이미 유행에 한참 뒤처지고 난 뒤였다.
그는 부랴부랴 시류에 편승하려고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돌프가 손을 대는 원두들은 거짓말같이 유행이 끝나버렸다.
그는 언제나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원두를 팔아넘겨야만 했다.
그날도 팔지 못한 원두를 처분하러 거래처에 가는 길이었다.
한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 아버지를 찾아가야 한다고 대뜸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부모의 부재가 아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흔쾌히 그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요하네스 공작 부인이었다니.
게다가 그녀는 자신에게 봉가니산 원두를 유통하도록 도와준 타니샤 상회의 뒷배였다.
아돌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손을 달달 떨며 레베카의 제안에 귀를 기울였다.
‘일을 하나 해주셨으면 해요. 화산섬에 원두를 심는 일인데, 조금 위험할 수도 있어요.’
‘화산섬에 원두를……?’
‘예. 어떤 섬이 원두를 심을 만한 아주 적합한 위치이니 꼭 조사하고 싶다고 데본셔 백작에게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이건 표면적인 핑계일 뿐이고, 토양 조사단인 척 섬에 제 사람들을 잠시 체류하게 해줬으면 해요.’
‘예……?’
‘참 두서없는 부탁이란 건 잘 알아요. 하지만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니 꼭 협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부담스럽고 위험한 일이니 거절하셔도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일이 끝나면 충분한 보상을…….’
‘하겠…… 습니다.’
망설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돌프는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약간의 호의에 대한 대가치고 레베카가 자신에게 베푼 건 과한 것이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번듯한 아카데미에 보낼 수 있었고 빚도 다 갚았다. 큰딸의 지참금도 넉넉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화산섬에 원두를 심는 것에 호기심이 일기도 했고, 많은 사람을 구한다는 일이라고 하니 의협심이 샘솟았다. 때문에 아돌프는 두려웠지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탕수수밭 근처를 공략하라고 했었지…….’
아돌프를 침을 꿀꺽 삼키며 비장하게 선착장에 발을 내디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허름한 인부 옷을 입은 버틀리가 아돌프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돌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황금 왕관 모양의 리조트를 올려다봤다.
* * *
카트린느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황제의 온실 정원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딸을 부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과 자히드라 황제는 그리 살가운 부녀지간이 아니었다.
레베카가 곧 부황이 추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카트린느 황녀께서 오셨습니다.”
“카트린느.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구나.”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카트린느가 떨리는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자 자히드라의 눈매가 서글서글하게 풀어졌다.
“그런 인사치레는 그만하고 얼른 자리에 앉거라. 네가 좋아하는 라본느 살롱의 케이크를 공수해 왔다.”
“가, 감사합니다.”
부황과의 독대는 언제나 살 떨리는 자리였다.
그녀는 습관처럼 자신에게 흠 잡힐 데가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검열했다.
“요즘 요하네스 공작 부인과 자주 어울린다고 들었다. 그녀에게 배운 거라도 있니?”
웃고 있는 입과 다르게 첨예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에 카트린느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분명 뭔가를 알고서 캐묻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카트린느는 순순히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부인께선 놀라울 만큼의 깊은 지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제게 새롭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셨지요.”
“새롭게 세상을 보는 능력이라……. 구체적으로 네게 어떤 도움이 됐다는 거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이요.’
카트린느는 그리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실을 삼켰다.
자신을 도구로만 보는 부황은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카트린느는 자히드라의 날이 선 눈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을 위한 희생이 얼마나 숭고한지, 그리고 사사로운 연심이나 투기심에 휘둘리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배웠습니다. 부인이 가져야 할 덕목도요.”
자히드라는 흔들리지 않는 카트린느의 눈동자에 잠시 놀랐다.
카트린느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이렇게 오래 눈을 마주친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다른 황녀들이 그렇듯 카트린느는 자히드라에게 그저 예쁘장하고 얌전한 딸이었다.
특출난 재능은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카트린느의 장점이 되었다.
재능이 많다는 건 오를 수 없는 나무를 탐할 수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에 레베카의 일정과 카트린느가 공작 성을 방문한 시간이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걸 보고받았다.
분명 뭔가 꾸미는 것 같기는 했다만 자히드라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트린느도 조만간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결혼식을 앞둔 여자의 소소한 일탈 정도일 거라 자히드라는 추측했다.
그가 아는 자신의 딸은 큰 사건을 벌일 만한 그릇이 못 되었다.
그가 레베카에게 카트린느를 보냈던 건 심약한 카트린느가 타국에 가더라도 당당히 로탄더스 제국의 위엄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지금 카트린느의 단단한 눈빛을 보니 자신의 바람이 얼추 이루어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일탈을 돕는 이가 레베카라는 점이었다.
그녀가 카트린느를 구워삶아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슬그머니 들었다.
‘혹시 모르니 단속을 해야겠지. 헛된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자히드라가 손가락을 두어 번 튕겼다.
“그걸 가져오도록.”
카트린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커다란 테이블을 밀고 들어오는 하인들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어마어마한 금화가 쌓여 있었다.
하인이 빳빳한 서류철을 카트린느 앞에 놓아두었다.
자히드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금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1골드면 평민 가족이 한 달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지.”
“그런가요……?”
“저 테이블 위에 놓인 금화가 얼마일 것 같으냐.”
“글쎄요. 어림잡아 3천 골드 정도……?”
“5천 골드다.”
자히드라가 금화 던지기를 그만두고는 카트린느를 매섭게 바라봤다.
부황의 눈빛에 카트린느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네 앞에 놓인 서류는 카리바나 왕국의 다이아몬드 광산 소유권을 인정하는 서류지. 그곳에 네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예?”
카트린느는 멍하니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그의 말대로 서류에는 카리바나의 다섯 번째 왕자가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을 카트린느에게 이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순간 카트린느는 황제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게 네 가치다.”
자히드라가 그녀를 관통하듯이 바라봤다.
카트린느는 턱하고 숨이 막혔다.
“5천 명이 한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과 다이아몬드 광산. 그게 네 가치란 말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 다 네 공이란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네가 자라는 동안 입고 먹은 것 중 무엇 하나 네 손으로 일궈낸 게 없어. 이건 그 빚을 갚는 일환이다. 그리고 나는 네가 이 의무를 저버리는 걸 용납할 생각이 없다.”
협박에 가까운 경고였다.
카느린느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마땅히 기뻐했을 것이다. 도움이 되었다고, 황제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달라졌다. 그녀의 세상은 좀 더 넓어졌다.
수치스러웠다. 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카트린느는 더더욱 결심을 다졌다.
매일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무기를 만들어 내겠노라고, 그래서 당신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지는 걸 꼭 보겠노라고 다짐하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예. 그 말 꼭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