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늦은 밤에도 연금술탑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물약이 끓는 소리, 깃펜을 휘갈기는 소리, 구겨진 종이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탑 안을 가득 메웠다.
개중에는 서로 자신의 공식이 맞다고 우격다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마다의 실험을 부여잡고 다들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지나가는 연금술사들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무리가 있었다.
“생각보다 위력이 강하진 않군요. 빛의 마석의 회전속도를 좀 더 올려보는 게 어떨까요?”
“그걸 이 수정구가 견딜 수 있을까? 분명 깨질 거야.”
아펠리와 카트린느가 머리를 맞대고 손바닥만 한 수정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몸을 바짝 낮춰 살아온 덕분에 카트린느는 어렵지 않게 외박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레베카의 부탁에 따라 그녀는 오늘 요하네스 공작 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요하네스 성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고 방에 틀어박혔다.
방해하지 말라는 전언을 고용인들에게 전한 뒤 카트린느는 몰래 연금술탑으로 빠져나왔다.
조금 무서운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었지만 카트린느는 밤새도록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비록 언젠가 깨질지 모르는 평화였지만 카트린느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재생 마석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수정구에 재생 마석을 입혀두는 거예요. 그러면 빛의 마석이 아무리 빠르게 회전해도 수정구가 쉽게 깨지지 않을 거예요.”
“흥미로운 의견이군. 당장 실험해보지.”
아펠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수정구를 실험대 위로 옮겼다.
그때 삼층 계단에서 나딘이 손을 흔들며 내려왔다.
“어이, 카린! 저번에 부탁한 거 완성했어.”
나딘은 길쭉한 이지창을 카트린느에게 내밀었다. 창끝에 불쑥 솟은 두 개의 막대기가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벌써요? 감사합니다!”
“번개 마석을 사람의 땀으로 운용할 생각을 하다니 아주 훌륭해.”
“그럼 시범적으로 사용해 볼까요?”
카트린느가 손잡이 부분에 달린 자그마한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뒤에 두 개의 막대기에서 푸른 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카트린느는 아무 망설임 없이 막대기에 손을 가져다댔다.
나딘이 기겁하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그러다가 감전돼!”
잠시 찌릿하며 카트린느의 팔이 저려 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카트린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정도로는 사람을 기절시킬 수 없어요. 출력을 좀 더 높일 방도를 찾아야겠어요. 게다가 반응 속도도 느리고요.”
“넌 정말…….”
나딘은 살신성인으로 연구에 임하는 카트린느의 태도에 제법 감동한 눈치였다.
그가 다시 이지창을 받아들고 비장하게 말했다.
“좋아. 열심히 해볼게.”
“고마워요. 저도 좀 더 고민해볼게요.”
카트린느는 존경하는 눈빛을 가득 담아 나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숨을 돌릴까 싶어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비릿한 종이냄새와 먼지가 한데 뒤섞여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알싸한 약품 냄새마저 무척이나 좋았다.
그녀는 이층 난간에 서서 열정이 가득한 연금술탑을 내려다봤다.
이곳에서 평생 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르렁-
그런 그녀의 감상을 방해하는 불청객이 있었다.
카트린느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코까지 골며 잠에 빠진 사내가 있었다.
그의 거대한 덩치에 의자가 부서지지 않은 게 용했다.
‘라트라니스 공작이라고 했지.’
무도한 자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경우가 없을지는 몰랐다.
어떻게 신성한 지식의 보고에서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레베카가 오늘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더라면 카트린느는 그를 내쫓고도 남았을 것이다.
카트린느는 그를 흘겨보다가 머리를 다시 질끈 묶고는 아펠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참 연구에 다시 집중하고 있는데 일층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마치 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연금술탑에선 종종 있는 소음이었기에 카트린느는 대수롭지 않게 연구를 계속했다.
그때 여태껏 잠만 자고 있던 카림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오셨군.”
그의 말에 카트린느가 화들짝 놀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단이 물밀듯이 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신의 기사단이다! 신성 모독죄 혐의가 있으니 조사에 협조하길 바란다!”
곧이어 연금술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한 시간은 더 빨리 들이닥쳤다.
카트린느는 서둘러 실험대 위의 수정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거참 비열하게도 모두가 잠든 밤을 택해 급습하다니. 이름이 아깝군.”
카림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가면 두 개를 손에 들었다.
그중 하나를 쓰자 가면이 일그러지더니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중장년의 남성의 얼굴로 변했다.
“이야. 감쪽같군.”
카림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의 시선은 황급히 수정구를 숨기고 있는 카트린느를 향했다.
그는 나머지 가면 하나를 들고서 카트린느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카트린느가 고개를 들었다.
카트린느가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카림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얼굴에 가면을 씌웠다.
가면이 이리저리 요동치더니 카트린느의 얼굴이 곧 곱상하게 생긴 사내의 얼굴로 변했다.
“이, 이게 무슨 무례인가!”
카트린느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림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좋아. 절색의 황녀인지 아무도 모르겠군.”
“뭐?”
카림은 연금술탑 소속을 증명하는 로브를 머리끝까지 눌러썼다.
“지금부터 신분을 철저하게 숨기셔야 될 겁니다. 붙잡혀 가기 전에 우리의 신분을 들키면 곤란하니까요.”
곧이어 사방에서 신의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여기도 증거가 있습니다!”
순식간에 일층 로비 한가운데에 신성 모독의 증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지금부터 모두를 연행하겠다! 얌전히 따른다면 무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을 거야!”
영문을 모르는 채 잡혀가는 연금술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치 과거의 연금술사 박해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 신변에 대한 걱정보다는 조사를 받는 동안 중단될 연구를 걱정했다.
몇몇 사람들은 공식을 빼곡하게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황급히 쑤셔 넣었다.
바닥에 공식을 그려보겠다고 수갑을 찬 손으로 분필을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카림이 그 광경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제국의 미치광이들이 죄다 여기에 모여 있었군.”
* * *
레베카는 창문 밖을 슬쩍 내다봤다.
손님용 흰색 마차 여러 대가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 자그마한 마차 안에 건장한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양이는 신의 자식이니까 얌전히 마차에 올라탔나 보구나.’
신앙심만큼은 끔찍하리만치 잘 지키는 자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요하네스 공작을 추포하라는 명령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저자들이 내 성 안에 들어오다니. 취임식 이후로 처음이군 그래.”
율리안이 레베카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레베카는 그의 온기를 만끽하며 조금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역시 연금술사들에게 사건에 대해 말해줬어야 했던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고 잡혀가는 셈이잖아.”
“아니, 그들은 연기에 아주 젬병이야. 게다가 연구 시간을 뺏는 일이니 분명히 협조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신의 기사단은 고문도 스스럼없이 한다며.”
“아, 그건 걱정 마. 든든한 경호원 한 명을 보냈잖아. 그리고 내 연금술사들의 신경줄은 아주 굵다고. 새로운 환경에 있으니 영감이 더 많이 떠오른다고 좋아할 미친놈도 있을 걸.”
“그래도…….”
“난 내 연금술사들을 믿어. 그러니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돼.”
말을 마친 그는 레베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냄새를 당분간 못 맡는다니 아쉽군.”
“누가 들으면 일주일 동안 헤어지는 사람인 줄 알겠어. 내일이면 돌아올 거야.”
“그래도…….”
잔뜩 아쉬워하는 그의 숨결이 목을 간지럽혔다.
레베카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짧지만 강렬한 키스였다.
율리안은 아쉬운 듯 멀어져가는 레베카의 입술을 바라봤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야.”
기사단이 현관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는 서둘러 외투를 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칸나와 함께 뒷문을 지나 준비되어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율리안이 그녀를 배웅했다.
“답답하더라도 성질 죽이고 있어야 해. 알겠지?”
레베카가 싱긋 웃으며 율리안의 볼을 몇 번 토닥였다.
율리안은 하얀 입김을 뿜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칸나가 굳은 얼굴로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율리안은 별다른 반항 없이 레베카의 손을 놓아주었다.
칸나가 문을 닫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율리안은 세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감금되러 가보실까.”
* * *
다음 날,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받고 있던 자히드라에게 애브러햄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폐,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을 떨어.”
“요하네스 공작이……. 요하네스 공작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똑바로 말하게.”
“신의 기사단이 요하네스 공작을 자택 감금했습니다!”
“뭐라고?”
자히드라가 하인에게 눈짓을 했다.
하인들이 서둘러 그에게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신의 기사단이 왜 요하네스 공작을 감금한단 말이야.”
“그, 그게……. 공작의 연금술탑에서 바리니카의 그림을 뿌렸다는 증거가 나온 모양입니다. 신의 기사단은 연금술사를 그 ‘심판자’라고 낙인찍고 수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게 어떻게 거기서 나와!”
“그러니까 말입니다. 모함이 분명한데 증거가 워낙 명확해서…….”
“빌어먹을…….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원. 일단 집무실로 가세.”
자히드라는 마지막 옷가지를 걸쳐 입고 서둘러 침실 밖을 나섰다. 애브러햄이 종종걸음을 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빠르게 집무실로 향하던 자히드라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