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72화 (172/232)

172.

“잠시만……. 카트린느가 요하네스 공작 성에 있지 않았는가?”

“예? 그, 그러고 보니 어제 황녀께서 그곳에서 자고 오신다고…….”

“그래서 카트린느가 돌아왔어?”

“그, 그것이…… 아직 오지 않으신 걸로 압니다.”

“뭐야? 당장 요하네스 공작 성으로 사람을 보내게!”

“예! 폐하!”

애브러햄이 허둥지둥 발이 빠른 시종을 찾으러 떠났다.

자히드라가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감이…….

* * *

“푸하하!”

제플린이 책상을 거세게 치며 포복절도를 했다.

“그러니까 율리안은 제 집에 갇혔고, 연금술탑 안에 있던 모든 연금술사가 잡혀갔단 말이지?”

“예.”

베이츠가 즐거워하는 제플린을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뭐, 이걸로 공사는 조금 늦춰지겠지만 율리안 그 자식의 당황한 얼굴을 생각하니 기분은 좋군. 이제 나머지는 신전이 알아서 처리해주는 것만 남았구나. 거지가 된 요하네스 공작이라!”

제플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에 사인을 휘갈겼다.

대부분이 밀린 대금을 결제해달라는 독촉 서류였다.

“곧 미친 듯이 돈이 들어올 테니 이런 푼돈쯤이야 바로 내어주지. 아, 그렇지. 아돌프라 했나. 그 원두 상인은 어쩌고 있나?”

“아무래도 그 건에 관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사탕수수밭 근처의 땅이 비옥하다며 그곳을 조사해야겠다고 하더군요.”

“사탕수수밭이 거기에 있다는 걸 그 인간이 어떻게 알았어?”

“마을 사람 몇몇이 발설한 모양입니다. 인질과 접촉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럼 그 일대를 조사하는 동안만 인질을 동굴에서 못 나오게 하면 되지 않나.”

“하지만 지금은 수확이 한창일 때입니다. 인질들의 발을 묶어둔다면 할당량을 맞출 인력이 모자랄 겁니다.”

“그게 내가 알 바인가?”

제플린이 짜증이 솟구친 얼굴로 베이츠를 바라봤다.

“그 정도도 해결 못해서야 내 밑에서 일할 자격이 있겠어? 마을 사람을 납치해오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해. 어쨌든 인질은 외부인과 만나면 안 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좋아. 역시 네가 가장 말이 잘 통해. 옥타비오였다면 이걸로 한나절은 잔소리했을 텐데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레베카는 어쩌고 있어?”

“요하네스 공작과 함께 감금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불쌍하군. 이래서 집을 나가면 고생이라고들 하는 거야. 부디 레베카가 갇혀 있는 동안 내게 돌아오는 게 현명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군. 오늘 오후에 그녀에게 줄 선물이 배달될 거야. 공작 성으로 바로 가져다주도록 해.”

“예.”

“이제 지혜의 불꽃 그것만 해치우면 돼. 다들 일은 잘하고 있다더냐?”

“일단 실존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이려는 시도는 하고 있답니다만, 인질들이 계속해서 그를 구출하려 들어서 상황이 힘들답니다.”

“인질들이 그를 구출하려 한다고? 거기서 종교라도 창시한 건가?”

“그자를 필두로 주기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보고받기는 했습니다.”

“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 하는군. 인질이면 인질답게 얌전히 지낼 것이지……. 여튼 급한 건 아니니 최선을 다하라고 그래. 빛의 장미와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그것도 같이 전하겠습니다.”

베이츠의 간결한 대답해 제플린이 흡족해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배부른 늙은 고양이처럼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이야. 레베카만 돌아오면 돼. 그녀만 내게로…….”

* * *

공작 성을 유유히 빠져나온 레베카는 오벨리아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수도를 향해 달려갔다.

아마 황제는 아침 일찍부터 공작 성에 들이닥친 비극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카트린느도 공작 성 소속의 연금술사로 함께 잡혀갔다는 사실을 지금쯤이면 보고받았을 것이다.

보고를 받은 그는 무척 당황할 게 뻔했다.

하지만 자히드라는 그리 오래 갈팡질팡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느긋하게 점심을 먹으면서 사태를 관망해볼 것이다.

레베카는 그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을 무렵 기습하듯 황궁을 찾기로 했다.

자히드라라면 분명히 카트린느만 빼오려는 계책을 찾고 있을 테지만, 평소처럼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황권으로 찍어누르기엔 아직 신권의 영향력이 드셌다.

연금술탑의 혐의 또한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그 증거를 뒤집을 만한 카드는 몽블랑 클럽의 정체를 밝히는 게 유일했다.

자히드라가 요하네스 공작을 위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히드라가 신전에게 허리를 굽힐 인물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신전과 황실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이 약해진 쪽이 속절없이 끌려갈 상황이었다.

레베카는 자히드라가 아무런 돌파구가 없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싸매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예상은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그의 허락에 레베카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알현실의 커다란 왕좌에 앉은 자히드라는 여유가 넘치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전 내내 꽤 시달렸는지 볼이 푹 패여 있었고, 눈이 퀭해서 원래도 날카로웠던 눈매가 훨씬 더 매섭게 보였다.

“부인도 요하네스 공작과 함께 감금된 게 아니었나 보군.”

“폐하께서 이 일을 크게 궁금해하실 것 같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침착한 태도를 보아하니 설마 자네가 꾸민 일은 아니겠지? 감히 내 딸을 인질로 삼고 말일세?”

치밀어 오르는 역정을 억지로 참는 듯 의자걸이를 쥔 자히드라의 손이 부들거렸다.

레베카가 차분하게 말했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번 일은 저희가 꾸민 일이 아닙니다. 제플린 데본셔 백작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지요.”

“데본셔? 제플린이 이 일을 주도 했다고?”

“바리니카에게 신성 모독 그림을 그리라 명한 사람이 폐하시라는 걸 제플린은 알고 있습니다. 그걸 빌미로 자신이 몰락할 뻔했으니 폐하께 앙심을 품었겠지요. 제플린은 황녀께서 공작 성 소속의 연금술사인 걸 알아채고는 일을 꾸몄습니다. 이 기회에 율리안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던 건 덤이고요.”

약간의 거짓이 가미됐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향신료는 쳐줘야 황제가 완벽히 제플린을 내칠 것 같았다.

레베카는 아직까지도 황제가 데본셔의 이름에서 자킴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황제는 사치 금지령이 내려진 와중에 제플린이 카지노를 들락거렸는데도 그를 눈감아주었다.

다른 황제파 귀족들에게 거한 벌금을 물린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아무리 인정에 박한 자히드라라도 죽은 절친의 아들을 괴롭히는 게 썩 내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자히드라는 가을 무도회 사건 정도로 그에게 벌을 다 내렸다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레베카는 추측했다.

‘하지만 그걸론 안 되지.’

황제에게 도움을 받을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발목을 잡는 걸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레베카는 점점 커져가는 황제의 분노를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신전과 결탁을 해서 내 딸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 전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어째서 내 딸이 연금술탑의 연금술사들과 어울리고 있었느냔 말이야!”

“진실을 아신다면 반대하실 것 같아 그랬습니다.”

“뭐라?”

“카트린느 황녀께선 연금술에 천재적인 재능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내로라하는 연금술사들이 황녀를 두고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하더이다.”

“카트린느가……?”

그는 카트린느의 연금술을 소꿉장난 정도로 이해한 게 분명했다.

황제가 놀란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리고 황녀께서는 폐하께 도움이 되고 싶어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고 계셨습니다. 황녀께서 공작 성을 자주 찾으셨다는 건 잘 아시겠지요.”

레베카는 줄곧 매고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이게 바로 신의 기사단에 대항할 무기입니다. 카트린느 황녀께서 만드신 것이지요.”

레베카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던 자히드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레베카는 그가 수정구를 더 잘 보게끔 더 높게 들고 말했다.

“신의 기사단을 함부로 해했다간 원성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황녀께선 신성력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상력이 없는 무기를 만드셨습니다. 폐하의 평판까지 생각한 무기이지요.”

“어, 어떻게 그 수정구가 무기가 된다는 말인가.”

“이걸 적진 한가운데 던지면 거대한 섬광과 폭음이 터질 겁니다. 사정거리 안에 있는 이들은 어떤 능력이 있던지 순간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개중에는 기절하는 이도 있겠지요. 전투 중에 잠시 간의 틈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는 황제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걸 카트린느가 발명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황녀님의 능력만으로 일궈낸 것입니다. 이 수정구 말고도 황녀께서 지금 연구하고 계신 무기가 많습니다. 제국에는 무기 연금술사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만, 다행스럽게도 황녀께선 그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황녀님을 연금술탑에 몰래 입적시킨 이유가 될는지요.”

레베카는 그에게 패를 던졌다.

카트린느가 신부로서 가지는 가치보다 연금술사가 됐을 때 얻는 이익이 더 크다는 걸 알려줬다.

‘제발 알아차려라.’

자히드라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레베카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의 손에 끼워진 두툼한 세 개의 반지를 응시했다.

“그래, 그 아이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자히드라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보기 흉하다. 황녀가 연금술사라니……. 당장 그 망할 기사단의 손에서 내 딸을 빼오게! 그리고 다시는 카트린느 황녀와 교류를 하지 말게나. 이제 보니 아주 악영향만 끼치고 있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