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레베카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속이 타는 걸 애써 숨기면서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하오나 폐하. 그녀는 제국의 발전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다른 나라는 일찌감치 연금술 무기 개발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간 제국은 신전의 압박 때문에 연구하지 못하던 걸 폐하 대에 이르러서야…….”
“시끄럽다! 그녀의 자리를 대체할 인재는 언젠가 등장할 테지. 황실 가족은 제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요즘 제국에 이상한 바람이 불어서 골이 아플 지경이야. 여자가 사업이니 뭐니 한다고 설치고 있지 않는가! 그건 질서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일이야. 그런데 황녀마저 거기에 동참했다가 어떤 혼란이 올지 알 수 없는 일일세.”
‘이 멍청한…….’
강경한 황제의 태도에 레베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확실히 황제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체면치레보다 실리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똑똑하다는 게 곧 현명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히드라에게 실리란 아무리 허울 좋은 구실을 가져다댄다고 해도 그건 결국 자신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실리는 그가 가진 상식선 안에서 움직였다.
자히드라의 상식으로는 황녀가 신부가 아니라 학자가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레베카는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는 자히드라의 입매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는데…….
레베카는 수정구를 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수정구가 바닥으로 떨어져 그대로 박살이 났다.
쨍그랑-
“이, 이게 무슨……!”
황제가 황급히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레베카가 그 모습을 조소하듯 바라보았다.
“이건 가짜입니다. 제가 황궁에 오면서 감히 무기를 들고 오겠습니까?”
살며시 눈을 뜬 자히드라가 속았단 걸 깨닫자 얼굴을 붉혔다.
그가 의자 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감히! 짐을 능멸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폐하께서도 이 수정구의 위력을 인정하신 게 아닙니까? 그러니 피하셨던 것이지요.”
“무엄하다! 당장 여기서 나가거라!”
“카리바나 왕국에서 곧 내전이 일어날 겁니다.”
자히드라가 멈칫했다.
레베카가 약간의 경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는 걸 황제께서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제국과 혼사를 맺은 왕자가 내전에서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 그걸 빌미로 막대한 신부대를 받아내신 것 아닙니까. 게다가 만약 운이 나빠 그곳에서 황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심심치 않은 위로금까지 받아낼 수 있으니 완전히 남는 장사지요. 한 명의 목숨값으로 아주 큰돈이 오갈 테니까요.”
“나를 그렇게 나쁜 아비로 보다니 유감이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레베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는지 자히드라의 기세가 잠시 누그러졌다.
“하지만 페하. 카리바나 왕국이 내전을 끝내고 안정을 되찾은 후의 목표는 어디겠습니까. 이 탐스러운 로탄더스 제국이 아니겠습니까.”
“…….”
“제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지난날의 영광입니다. 신전의 영향력 아래 황실 군대의 힘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총과 칼로 전쟁을 벌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대량 살상 무기를 각국에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제국은 늦어도 한참 늦었습니다.”
자히드라는 이제 놀라움을 너머 약간의 의심이 섞인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어떻게 방 안에 갇혀 지내던 여인이 저 정도의 통찰력을 지닐 수 있을까.
그녀에게 정말 예지력 따위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답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메웠다.
레베카가 냉엄한 얼굴로 말했다.
“제국이 그 흐름을 빨리 따라가지 못한다면 아주 보기 좋은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황녀건 황자이건 천민이건 간에 지금 제국엔 인재가 필요합니다!”
지난 생에서 레베카가 죽을 때 즈음에 여러 왕국에선 잇달아 영토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카트린느 황녀의 유품으로 제국에 연금술 무기 연구가 활발해지지 않았더라면 제국은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레베카는 소중한 사람들을 전쟁을 내몰 생각도 없고, 카트린느가 유품으로 연구 업적을 남기게 둘 생각도 없었다.
자히드라가 골이 아픈 듯 이마를 세게 짚었다.
“옳은 말이긴 하다만 벌써 도장을 찍었네. 카리바나 왕국의 사신이 지금쯤이면 배를 타고 가고 있을 거야.”
“위약금과 제국의 안위 중에 선택을 하지 못하고 계시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쉽게 결정을 내리실 수 있도록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해보게.”
“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시겠다 약조하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그걸 쓰겠습니다.”
“지금…… 카트린느를 위해 그걸 쓰겠단 말인가?”
“맞습니다. 카트린느 황녀의 혼사를 물러주시고, 그녀가 공작 성의 전속 연금술사가 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자히드라는 레베카의 말이 농인가 싶어 멍한 얼굴로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만큼 믿기 힘든 언사였다.
자신이 레베카에게 주었던 소원권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다.
한 영지를 떼어내 줄 수도 있고, 정적을 숙청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황녀의 안위를 위해 선택했다.
‘아니지…… 아니야.’
자히드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레베카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는 지금껏 레베카가 자신과 같은 부류일 거라 생각해왔다. 그 판단은 지금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만약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건 훗날에 크게 얻을 이익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레베카도 그와 다르지 않을 터.
그런 레베카가 카트린느를 이렇게까지 두둔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얻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카트린느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로군.’
자히드라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분기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계산을 두들기는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좋다. 대신 황녀를 공작 성 소속이 아닌 황실 전속 연금술사로 임명하는 걸로 하지.”
레베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황제가 카트린느의 가치를 다시 책정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연금술탑보다 황제의 비호 아래에 있는 게 카트린느에겐 더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황제를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공작 성 소속으로 임명하게 해달라 청했다.
레베카는 퍽 아쉽다는 듯 눈을 휘며 말했다.
“연금술탑에 꼭 모시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군요. 알겠습니다. 대신 정기적으로 연금술탑에 들러 공동연구를 진행하도록 해주십시오.”
“그 정도의 청은 들어주지. 그곳엔 뛰어난 연금술사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들을 스승으로 둔다면 그 아이에게도 좋을 테지. 한데 소원을 정말 내 딸에게 허비해도 되겠는가? 자네가 앞으로 할 일에 내 도움이 많이 필요할 텐데.”
“충분합니다. 황녀께선 그 ‘앞일’에 아주 큰 역할을 하실 테니까요. 그저 침묵해주시겠다는 그날의 약조만 지켜주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저를 믿어주시고요.”
“침묵이라! 건방지군. 그럼 네가 짐에게 약조한 것도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누구의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리고 전 황제 폐하께 제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증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합니까?”
“그깟 목숨 필요하지도 않았다만 네 포부는 잘 알겠다. 애브러햄!”
황제의 부름에 알현실로 애브러햄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지금 당장 백지 계약서를 가져오게. 그리고 카리바나 왕국으로 급한 전보를 띄워. 카트린느 황녀의 혼담을 깨겠다고. 위약금은 심심치 않게 물도록 하지.”
“예……?”
“한시를 다투는 일일세. 얼른 가게나.”
“아, 알겠습니다!”
오늘만큼 그가 황궁에서 많이 뛰어다녔던 적은 없었다.
애브러햄은 새 같은 다리를 낭창하게 휘두르며 황명을 전하러 달려갔다.
인자한 얼굴을 되찾은 자히드라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군. 난 자네라는 패에 큰돈을 걸었네. 카트린느의 신부대만큼의 이익을 내가 얻지 못한다면 자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변상해드리도록 하지요.”
“그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만큼은 따라올 자가 없겠군. 자, 그럼 카트린느를 신의 기사단에서 어떻게 빼 올 것인지 들어볼까.”
“우선 귀찮은 일을 하나 해주셔야겠습니다.”
“또 내게 시킬 일이 남았단 말이냐. 이거 참 무례한 사람이로군.”
“이건 황제께서도 즐거워하실 일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자네들이 벌인 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죽을 지경이야.”
자히드라가 관자놀이를 연신 문질렀다.
레베카는 다소곳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입을 열었다.
“카리바나 왕국과의 혼사가 무산이 되었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재산을 건든 신전을 찾아가 황녀를 당장 돌려 달라 하시면 됩니다. 각종 협박과 고성을 곁들여서 말이지요.”
“하지만 카트린느가 연금술사로 거기 가 있었던 건 어찌 설명하라고.”
“간단합니다. 황녀께선 저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고 하십시오. 변장한 황녀님을 찾아내는 게 게임의 목적이었다고요. 이럴 줄 알고 황녀님을 미리 변장시켜두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황녀님과 제 사이가 친밀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일 테니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혐의를 벗을 확실한 방법이 있나 보군.”
“여부가 있겠습니다.”
“좋다. 자네의 제안대로 하도록 하지. 내 딸을 안전하게 빼오기만 하게.”
“역시 영민하십니다.”
레베카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는 추기경이 가장 몸서리칠 만한 말을 고민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신의 기사단은 잡아 온 연금술사들을 커다란 감옥 안으로 한데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한 명씩 끌어내 심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문실에선 날카로운 기구들을 갈고 있었고, 심문관은 신성력으로 연금술사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계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좁은 철문을 열어 가녀린 연금술사들을 빼 오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