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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74화 (174/232)

174.

“진짜 자네들이 제국 최고의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어디 정신머리가 나간 사람들이 아니고?”

카림이 입을 떡하고 벌린 채 감옥 안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연금술사들을 바라봤다.

감옥의 바닥이며 벽이며 모조리 카림이 이해할 수 없는 공식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분필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감옥 안을 가득하게 메웠다.

“야! 여긴 내 자리야!”

“지금 상황에 네 자리 내 자리가 어딨어.”

그중에는 얼마 남지 않은 여유 공간을 차지하려는 다툼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자신이 잡혀 왔다는 자각 자체가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카트린느가 웃으면서 카림에게 말했다.

“경이 이해하게. 휴가가 벌칙인 사람들이야. 그리고 요하네스 공작을 무척이나 믿는 것 같더군. 공작이 자신들이 고문받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다면서 말이야. 그러니 이렇게 천하태평인 거지.”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요.”

“어떻게 말인가?”

“거기 구석에서 잘 지켜보십시오. 황녀께서 입만 여시지 않으면 오늘 안으로 빠져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저 멀리서 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기사 한 명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카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날뛰어보실까.”

카림은 어깨를 빙빙 돌리면서 철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거대한 몸이 문을 막아서니 마치 바윗덩어리가 입구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부터 조사를 받으려고 제 발로 나온 겁니까.”

기사가 카림을 보고 움찔하며 말했다.

그의 덩치가 여느 연금술사들과 달리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카림이 목을 이리저리 비틀며 읊조렸다.

“아니. 방해하려고 나온 건데. 당신들은 여기서 단 한 명도 빼가지 못할 거야.”

“무력을 쓰게 하지 마십시오.”

“한번 써봐. 재밌겠네.”

카림이 씨익 웃더니 가면을 잡아 뜯었다. 마치 살갗이 벗겨지는 것처럼 살구색 덩어리가 그의 얼굴에서 뜯겨 나왔다.

“휴.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어느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기사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는 그의 흑청색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보고 소리쳤다.

제국에서 그를 모르는 자는 드물었다.

“라트라니스 공작? 공작께서 여기 왜 계십니까!”

“나도 그게 참 궁금하단 말이지. 난 그저 변장 숨바꼭질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인데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지 뭔가.”

“그럼 그때 알리시지 그러셨습니까.”

“경황이 없어서 말이네. 자네들이 오죽 무서웠어야지. 그 유명하신 신의 기사단 아니신가.”

감옥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여유롭게 웃는 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일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기사가 한숨을 내쉬고 차선책을 내밀었다.

“그럼 공작께선 가장 마지막으로 조사를 받는 걸로 하지요. 다른 이들부터 조사하겠습니다.”

“그것도 안 돼. 숨바꼭질을 같이 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니 말이야.”

“예?”

카림이 그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기사는 조금 꺼림칙한 얼굴이었지만 상대가 라트라니스 공작이었다.

그는 별수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카림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 안에 카트린느 황녀께서 계시거든.”

“뭐라고요?”

기사가 얼굴을 들어 감옥 안을 샅샅이 훑었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황녀의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카림이 예상했다는 듯 여유롭게 손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찾아도 소용없어. 황녀께서도 변장을 하고 계시니까 말일세.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나도 잘 모르네. 여기 연금술사들의 몸매가 다 삐쩍 말라서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아.”

“그럼 황녀께서 직접 신분을 밝히시면 될 일입니다!”

“문제가 말이야. 황녀께서 그걸 거부하고 계신 것 같아. 역할에 아주 심취하신 모양이로군. 요약하자면 저 중 아무나 황녀가 될 수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연금술사들의 혐의가 무겁습니다. 황녀이신지 아닌지는 조사를 하다 보면 밝혀지겠지요.”

“오호라. 역시 황제 따윈 무서워하지 않는 신전의 충성스러운 개들은 다르군.”

“말씀을 삼가십시오. 이 이상 함부로 하셨다간 신전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주 꽉 막힌 작자로구먼.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나, 카림 라트라니스 공작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몸. 황녀께 해가 되는 일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는 없어.”

“아무리 공작이라 하더라도 무장한 신의 기사단을 당할 수 없을 테지요.”

“아, 내가 무기가 있다고 말 안 했나?”

카림이 씨익 웃더니 허리춤에 있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자 거대한 대검이 딸려 나왔다.

그의 가슴께까지 오는 커다란 대검은 카림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였다.

카림이 대검을 목에 걸쳤다.

“연금술사들이 아주 쓸 만한 걸 선물로 주었거든. 어떤가. 이래도 나와 대적할 생각이거든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지.”

기사가 멍하니 카림을 올려다보았다.

수적으로 밀어붙이면 승산이 없지는 않겠지만 엄청난 희생이 뒤따를 것이다.

그가 자신의 결정권을 벗어난 일이 되어버렸다는 걸 자각하려는 찰나, 또 다른 기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교황 성하께서 조사를 잠시 미루라고 명하셨네. 아무래도 황녀께서 감옥 안에 계신 모양이야. 그 탓에 황제가 신전을 아주 들쑤셨다고 하더군.”

“아무리 황제라도 감히 성역을 침범하다니…….”

“어쨌든 명은 명이니 조사는 나중에 재개해야겠어.”

둘의 대화를 엿듣던 카림이 능글맞게 웃었다.

“아무래도 뜻대로 안 된 것 같은데?”

카림의 도발에 기사가 발끈하며 말했다.

“잠시 유예하는 것뿐입니다. 부디 얌전히 계시길 바랍니다.”

두 명의 기사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망토를 휘날리며 자리를 떴다.

카림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섰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카트린느는 그의 치켜든 턱을 멍하니 바라보며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애써 집어삼켰다.

예전에 봤을 땐 압도적인 덩치에 밀려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광대처럼 웃긴 사람이었다.

카트린느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사가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황제가 신전을 아주 들쑤셨다.’

카트린느는 레베카의 설득이 통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녀는 희망이 가득한 눈을 들어 올렸다. 서늘한 감옥 안이 더 이상 불쾌하지 않았다.

* * *

율리안에게 내려진 건 감금령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방 안에 갇힌 것은 아니었다. 성안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방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걸 택했다.

‘레베카가 돌아왔다가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성은 미로처럼 넓고 복잡했다. 어릴 적 그는 성안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는 레베카의 누웠던 자리를 쓸어보았다.

그녀의 온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본래 아무도 없던 것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빈자리에 어딘가 쓸쓸해졌다. 이 자리가 조만간 다시 채워질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레베카는 분명히 그와 같이 살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에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을 부어도 차지 않는 구멍 난 물병처럼 그의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허전했다.

레베카를 안고 있을 때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행복하면서도 불안했다.

그녀에게 사랑한단 확답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인 걸까.

‘율리안. 나는…….’

성급하게 입부터 들이대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대답을 마저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율리안은 자신이 똑같은 짓을 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몰라 두려웠다.

‘아니야. 그녀는 날 사랑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은가.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착각이라면?’

레베카는 원래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보여주는 웃음이 만약 남편을 향한 의무적인 친절에 불과한 것이라면?

창과 방패의 싸움처럼 그녀의 마음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하지만 감히 그녀에게 마음을 물어보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차오르는 불안감에 그는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고 싶어. 레베카.”

그동안 했던 수많은 고뇌는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베카 그 여자는 자신을 나락을 빠뜨렸다가 천상으로 끌고 가곤 했다.

거짓말처럼 그의 모든 신경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를 안지 못해 앓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를 바라볼 땐 바늘로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팠다.

그럼에도 그 아픔조차 황홀했다.

이게 정상인가?

이게 사랑이야?

“율리안!”

침실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반갑게 불렀다. 문에서 등을 돌려 누워 있던 그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율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베카가 그에게 안겨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흥분으로 고양되어 있었다.

“황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어! 정말 무서워서 다리가 덜덜 떨렸지 뭐야. 그래도 해냈어!”

레베카는 기쁨에 겨워 그에 품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몸에서 찬바람 냄새가 났다.

율리안은 숨을 쉬는 것을 잊은 채 그녀의 동그란 머리꼭지를 정신없이 바라봤다.

“율리안?”

한동안 그가 말이 없자 레베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보석 같은 그녀의 눈동자에 율리안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레베카가 경악해서 그의 팔을 찰싹 내리쳤다.

“숨 막혀, 율리안! 게다가 지금 밑에는 신의 기사단이 와 있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다는데.”

그 말에 발버둥 치던 레베카는 반항을 멈추었다. 그러곤 그의 등허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율리안은 그녀의 정수리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이건 사랑이 아닐 리가 없다고.

설사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중요한 건 자신이 지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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