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요하네스 공작을 감시하러 성안에 주둔한 신의 기사단은 예상치 못한 대접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이것도 드시고 저것도 드십시오. 커피를 더 내어드릴까요?”
잔뜩 경직된 자세로 현관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벨마가 트롤리를 끌고 다가왔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와 함께 화려한 다과를 연신 권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딱딱하게 말을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감시를 하러 온 것이지 한가하게 티타임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벨마가 단번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건 공작께서 내어드리는 게 아니라 레오 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신의 뜻을 위해 밤낮 고생하시는 분들을 융숭하게 대접해드리라 하셨다고요.”
“레, 레오 님께서 말입니까?”
“당연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뭣하러 공작님을 위협하는 여러분들을 살뜰히 챙기겠어요. 지금 혹시 레오 님의 성의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벨마의 으름장에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마지못해 앙증맞은 케이크 접시를 들어 올렸다.
갑옷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로비 안을 메웠다.
그때 위층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요청하세요. 어젯밤부터 일을 하셨다고 했으니 많이 피곤하실 테죠.”
“공작 부인!”
기사들이 계단을 천천히 타고 내려오는 레베카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그녀가 성녀의 그릇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진짜 성녀는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신성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레베카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호의가 가득 담겼다.
사실 이 신성한 공작 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들은 묘하게 들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그리고 레베카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의 사자께 인사는 올리셨나요?”
“저, 저희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레오는 살아 있는 신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데프리아 여신이 삶의 모든 것인 그들에게 레오의 의미는 컸다.
그들은 레오가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웃으며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 오신 거 한번 뵙고 가세요. 레오 님께서도 여러분을 반기실 겁니다.”
레베카가 슬쩍 웃으며 위를 손짓했다.
무심코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기사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레오 님께서 너희를 봐야겠다고 하시니 예를 갖춰라.”
엄중한 목소리에 기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율리안이 레오를 품에 안고서 계단 끝에 서 있었다.
“신의 사자시여!”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갑옷이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내가 이런 거 부담스럽다고 했잖아.’
레오가 심기불편하다는 듯 꼬리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아, 이번만 참아줘. 개박하 술 줄 테니까.”
‘……이번 한 번만이다.’
레오는 인심 썼다는 듯 그의 품에서 폴짝 내려왔다.
그리고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와 기사들 앞에 섰다.
“레…… 레오 님.”
기사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레베카의 귀까지 들려왔다.
신의 기사를 준비하는 고아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레오의 존재였다.
그는 신의 은총의 근간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존재이자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였다.
평생 소원이 레오의 털이 옷에 묻는 것이라고 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그들의 레오를 향한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레오의 휘날리는 털조차 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레오는 언제나 공작 성에 머물렀다.
율리안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세 마리의 고양이 중에 레오가 없다는 사실은 신성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는 행사가 있는 날마저 삼엄한 경비와 더불어 율리안이 그를 내내 안고 있었다.
그런 레오가 실물로 자신들의 눈앞에 있었다.
레오가 그들을 축복하듯이 한명 한명의 무릎에 머리를 비볐다.
기사들은 거의 졸도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기까지 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강철로 만들어진 사람 같던 이들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이래서 싫었다고.’
레오가 한숨을 짧게 내쉬며 제 앞에 엎드려 있는 인간들을 내려다봤다.
공작 성 사람들의 얼굴 위로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레오가 신의 사자란 사실을 잊은 적은 없었지만, 그와 살을 부딪치고 살다 보니 특별한 존재였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레베카도 그동안 레오를 귀여운 고양이 정도로 취급했던 세월이 떠올라 조금 머쓱해졌다.
“아주 꼴값들을 떨고 있군.”
어느새 계단을 타고 내려온 율리안이 차가운 시선으로 신의 기사단의 너른 등짝을 훑었다.
긴 세월 동안 제 가문을 괴롭혀 온 저주를 숭배하는 모습을 보니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떠받드는 신성이 실은 요하네스 공작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것임을 저들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레베카는 율리안의 일그러진 얼굴을 흘깃 바라봤다.
그의 괴로움이 느껴져 그녀는 조용히 율리안의 손을 잡았다.
보드라운 온기가 전해지자 율리안이 흠칫 놀라며 레베카를 내려다봤다.
“모든 게 곧 끝날 거야.”
그녀의 말 한마디에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차차 풀어졌다.
레베카의 다정한 눈길을 마주본 율리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나에겐 이제 레베카가 있어.’
그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애옹-
레오가 신호를 보내듯 길게 울었다.
“시, 신의 사자께서 계시를!”
신의 기사단은 레오의 울음소리마저 외울 기세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율리안이 레오의 뒤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렇다. 신의 사자께서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하신다.”
“서, 성하를 모셔오겠나이다. 하찮은 저희가 어찌 신의 말을 듣겠습니까.”
애옹- 애옹-
레오가 대답하듯 울었다.
율리안이 그의 말을 번역했다.
“아니, 레오 님께선 한시가 급한 일이라고 하시는군. 그러니 잔말 말고 귀를 기울이도록.”
“하명하십시오!”
“연금술탑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은 요하네스 공작이 벌인 일이 아니다.”
“예?”
기사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율리안이 레오를 이용해서 사건을 덮으려는 시도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한 줄기 의심이 들었다.
율리안이 신의 축복을 받은 요하네스 공작이라고는 하나 그도 한낱 인간이었다.
인간이 욕심 앞에서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 그들은 잘 알았다.
그들의 눈에 의심이 비쳐들었다.
캬악!
그때 레오가 앞발로 엎드려 있는 기사들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율리안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레오의 성난 뒤통수를 바라보며 몰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겨우 웃음을 참아낸 그는 심호흡을 하며 제법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찌 감히 나의 말에 의심을 하는가! 내 신실한 종의 결백은 내가 증명하겠다!”
“저, 저희가 어리석어 실수를 범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렇다면 진범을 알고 계십니까.”
“난 알지 못한다.”
“예……?”
“다만 여신께서 준비해놓으신 길을 따를 뿐이다.”
레오가 잘생긴 턱을 치켜들며 그들을 고고하게 내려다봤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윤기가 흐르는 까만 털 사이에서 신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아…….”
기사들은 신성한 기운에 취하기라도 한 듯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야. 이거 언제까지 계속해야 해.’
기사들의 눈물이 불편한 듯 레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봐.’
율리안은 속으로 그를 달래며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난 그 미천한 인간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너희를 인도할 수는 있다. 나를 따라오겠느냐.”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기사들의 우렁찬 외침에 율리안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레오를 번쩍 들었다.
“자! 그럼 나를 따르라, 신의 기사단이여.”
막 떠나려는 그들의 앞을 레베카가 막아섰다.
“하지만 공작님께선 지금 감금령인 상태인데 나가셔도 괜찮겠습니까.”
기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희는 교황 성하의 명을 받는 기사단입니다. 하지만 교황 성하께 명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데프리아 여신님입니다. 그의 사자께서 직접 하시는 일에 저희가 어떤 의문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당신들의 신실함에 탄복했습니다.”
레베카는 율리안이 합법적으로 공작 성 밖을 나가게 됐다는 걸 확답받은 뒤 길을 터주었다.
이어서 레베카가 멍하니 서 있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얼른 가서 말을 준비시키거라. 레오 님께서 길을 인도한다 하셨으니 말이 더 편하실 게다.”
레베카의 말에 하인들이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사들은 레베카에게 감사를 표했다.
빠르게 말이 준비되자 그들은 폭풍처럼 공작 성을 빠져나갔다.
레베카는 흑마를 타고 달려 나가는 율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나도 같이 가지 않아도 돼?’
‘전에 말했지. 널 지켜주겠다고. 네가 그곳에 다시 돌아가서 고통받을 이유 하나도 없어. 네가 제플린과 만나야 할 때는 오직 마지막, 당신의 손으로 그를 끝장낼 때뿐이야.’
마치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는 율리안이 고마웠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레베카는 문득 추워져서 팔을 감싸 안았다.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어느새 다가온 칸나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레베카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레베카는 그녀를 향해 잔잔하게 미소를 보이며 발을 돌렸다.
* * *
빛의 전당이란 이름과 달리 지하에는 한 줄기의 빛도 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옥타비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제 앞을 지나가는 쥐를 발로 뭉개버렸다. 단말마의 비명 뒤에 쥐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제플린 데본셔…….’
그는 쥐가 제플린이라도 된 듯 한껏 화풀이를 하다가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그가 던진 곳엔 쥐의 사체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처음 이곳에 갇혔을 때는 그저 악몽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제게 닥친 절망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차갑고 축축한 이곳은 현실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