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는 아들에게 등을 찔린 아버지가 된 심정이었다. 그를 배신감에 떨게 한 이는 제플린만이 아니었다.
‘빛의 장미가 날 버리다니…….’
제플린은 전적이 있으니 충격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빛의 장미가 제플린을 선택하리란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빛의 장미가 자신을 찾아온 이후로 그는 평생을 바쳤다.
자킴을 죽게 만들고, 오랜 세월 동안 개고생을 해가며 제플린을 길들인 건 자신이었다.
지혜의 불꽃이란 엄청난 비밀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 쓴 휴지 버리듯 쉽게 자신을 내치다니.
제가 그동안 죽였던 쓸모없는 사냥개들과 같아졌다는 사실을 옥타비오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 해.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다행스럽게도 제 목숨을 살려둔 걸 보니 자신에겐 아직 이용 가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제 가치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제플린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대비책이겠군. 데본셔를 책임질 이가 필요할 테니.’
자신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다는 사실에 그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그 순간 감옥 입구가 열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비춰든 햇빛에 옥타비오가 눈을 찌푸렸다.
그의 시야가 밝아지기 전에 바닥에 쇳조각이 구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옥타비오는 더듬더듬 감옥 바닥을 훑었다. 손에 차가운 쇠붙이 두 개와 종이 하나가 느껴졌다.
쇠붙이를 더듬거리던 옥타비오가 고개를 들었다.
“열쇠다!”
옥타비오는 사방을 살피다가 허겁지겁 감옥 문을 열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입구의 단단한 쇠문까지 열어젖혔다.
거대한 데프리아 여신상 뒤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옥타비오는 잠시 눈을 찌푸렸다.
이윽고 눈이 빛에 적응이 되자 그는 여태껏 쥐고 있던 종잇조각을 들여다보았다.
빳빳한 흰색 카드 위에 간결한 문체로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레베카>
* * *
“레오 님께서 행차하신다!”
율리안은 레오를 머리 높이 쳐들고 데본셔 백작가의 현관문을 발로 찼다.
우지끈하고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신의 기사단이 고함을 지르며 들이닥쳤다.
‘작작하라고!’
허공에서 다리를 대롱거리며 레오가 앙칼지게 울었다.
“사특한 기운이 삼층에서 느껴진다고 하신다!”
율리안은 가볍게 레오의 불평을 무시하곤 데본셔 저택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그는 레오를 한쪽 팔에 들고는 예전부터 벼려 왔다는 듯 로비에 있던 조각상이며 그림들을 다 부수기 시작했다.
꼭 화풀이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삽시간에 로비가 엉망이 되었다. 고용인들의 비명소리가 저택 안에 가득 찼다.
제플린이 역정을 낼 생각을 하니 그의 광대가 치솟았다.
“이, 이게 다 무슨 짓입니까!”
그레이스가 계단을 빠르게 오르는 신의 기사단과 율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신의 기사단이 엄숙한 얼굴로 읊조렸다.
“바리니카 그림으로 신성 모독을 꾀한 혐의, 그리고 요하네스 공작의 연금술탑에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혐의를 조사하러 왔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증거는……. 증거는 어딨습니까! 전 듣지도 못한 혐의입니다. 이렇게 다짜고짜 저택에 쳐들어올 수는 없는 법입니다.”
“신의 뜻입니다. 제국의 그 어떤 존재도 신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 그런…….”
그레이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흙발로 더럽혀진 카펫을 보며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그때 삼층 난간을 잡고 선 제플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데본셔 백작.”
율리안이 능글맞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플린은 이 소란이 그의 작품인 걸 깨닫고는 그를 노려봤다.
그는 화를 애써 억누르느라 파르르 떨리는 입매로 말했다.
“다만, 제 무고가 밝혀졌을 때 책임은 무겁게 지셔야 할 겁니다.”
제플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레이스는 울먹거리며 길을 터주었다.
규칙적으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저택을 위협하듯 울려 퍼졌다.
고용인들이 밖으로 나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서재로 들어가는 신의 기사단을 올려다봤다.
레베카가 매수한 자들은 희열에 찬 미소를 남몰래 주고받았다.
서재 문이 닫히자 후들거리며 난간을 잡고 있던 그레이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호통쳤다.
“구경이라도 났어? 다들 어서 치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고용인들을 찬찬히 살피다가 그레이스는 서재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찬찬히 올라갔다.
* * *
“좀 조심히 다뤄주십시오! 여기에 있는 서적들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제플린은 마구잡이로 책을 쓰러트리는 기사들을 보며 부르르 떨었다.
그는 허겁지겁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들을 주워서 한쪽에 쌓아 두느라 바빴다.
구겨진 책 표지를 본 제플린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책을 꺼내 드는 기사의 손을 낚아채며 으르렁거렸다.
“대체 무슨 근거로 여길 뒤지시는 겁니까!”
“신의 뜻입니다.”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하시는군요. 신탁이라도 내려왔단 말입니까? 제플린 데본셔 백작의 서재라도 뒤지라고?”
“그렇습니다. 레오 님의 뜻이 곧 여신의 뜻이니까요.”
“레오?”
제플린은 시선을 돌렸다.
율리안이 레오를 품에 안고 그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황금색 눈 두 쌍이 제플린을 형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요하네스 공작은 무슨 연유로 온 겁니까. 레오 님만 오시면 될 것을.”
“평범한 인간이 레오 님의 뜻을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축복받은 내가 친히 전해줘야지.”
제플린이 코웃음을 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의 기사단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진의를 알 수 없는 요하네스 공작의 한마디만 듣고 백작의 저택에 들이닥쳤단 말입니까? 단체로 뇌를 빼두고 다니는 겁니까?”
그의 노골적인 언사에 기사들이 단체로 칼을 빼들고 그의 목에 겨누었다.
제플린은 원처럼 자신의 목을 빙 둘러싼 칼끝을 말없이 노려봤다.
기사단장인 로이드가 악다문 잇새 사이로 조곤조곤 말을 내뱉었다.
“제플린 데본셔 백작. 저번 가을 무도회 때의 일을 우린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그날에 더럽혀진 데프리아 여신의 이름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율리안이 비릿하게 웃으며 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품에서 레오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잘 피해 갔겠지만 지금은 다를 거야. 데본셔 백작. 진실은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거든.”
“진실이요? 하!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지 궁금하군요.”
제플린이 몸을 틀어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잠겨 있던 책상 서랍을 열쇠로 열고는 제일 위에 있는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걸 보고도 요하네스 공작의 말이 진짜라고 할지 궁금하군요.”
제플린은 로이드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율리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율리안은 어떤 초조한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매를 틀어 올렸다.
‘웃어?’
순간 제플린은 한기가 들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편지를 읽던 로이드가 눈을 들어 제플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분노가 가득한 어투로 명을 내렸다.
“제플린 데본셔 백작을 당장 추포하라!”
명이 떨어지자마자 다섯 명의 장정이 제플린을 덮쳤다.
손이 뒤로 꺾인 제플린이 신음을 흘리며 외쳤다.
“무슨 짓입니까! 그 편지엔 분명 요하네스 공작이…….”
“당신 눈으로 직접 보시오.”
로이드가 그의 눈앞에 서신을 들이밀었다.
제플린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원래라면 율리안의 서신이 있어야 했다. 바리니카에게 벽화를 의뢰하고 그의 거취를 마련해준다는 내용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들이민 편지 속에는 율리안의 연금술탑에 조작한 증거를 심어두라는 제플린의 명이 적혀 있었다.
이건 그가 사냥개에 명을 내렸을 때 썼던 서신이었다.
그가 보낸 서신은 태워버리는 게 사냥개의 원칙이었다.
제플린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그의 서명을 응시하며 도리질을 쳤다.
“말도 안 돼! 이건 모함이야!”
“어라. 이건 뭐지?”
율리안은 제플린이 열었던 서랍을 완전히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서신들을 그의 책상 위로 쏟아냈다.
서신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율리안이 크게 읽었다.
“심판자에게 알린다. 다음 목표는…….”
“뭐야? 그런 거 난 보낸 적 없어!”
율리안이 씨익 웃으며 다음 구절을 읽었다.
“다음 목표는 수도의 대신전이다. 데스라치노 교황을 사로잡아라.”
기사들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이제 신성 모독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심판자는 신의 기사단이 눈을 켜고 찾던 단체였다.
“아무래도 백작을 이단 심판으로 넘겨야겠군.”
로이드가 음산하게 말했다.
제플린이 거세게 반항하며 몸부림을 쳤다.
“이건 모함이야!”
“변명은 신의 감옥에 가서 마저 하도록 하십시오.”
“내가 순순히 끌려갈 것 같아?”
제플린은 거세게 기사단을 밀쳐버리고 문밖으로 도망쳤다.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그는 기사들을 요리조리 피했다.
하지만 곧이어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낚아챘다[email protected]곧이어 누군가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드디어 네놈 면상을 구겨줄 수 있겠어.”
순간 제플린은 눈앞에 별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율리안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제플린의 등을 율리안이 발로 꾹 밟았다.
그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서렸다.
“그러게 왜 남의 아내를 탐내.”
제플린이 바둥거리며 소리쳤다.
“레베카가 왜 네 아내야! 그녀는 내 거야! 내 거라고!”
율리안이 질린다는 듯 그의 등을 더 세게 밟았다.
“아악!”
“분수를 모르는 벌레는 밟아줘야 제 맛이지.”
“저희가 연행하겠습니다.”
이러다간 율리안이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에 로이드가 서둘러 그를 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