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율리안은 혀를 한 번 쯧- 차더니 순순히 그를 기사단에 넘겨줬다.
제플린의 두 손이 단단히 포박됐다. 그는 끌려가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신을 챙기며 로이드가 율리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슨.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레오 님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지요.”
로이드가 한껏 존경하는 눈빛을 담아 다시 한번 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레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레오가 그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인사를 받아준다는 의미였다.
로이드는 벅찬 얼굴로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베이츠! 어서 나를 보호해라. 어서!”
밑에서 난리를 치는 제플린의 고함이 들려왔다. 로이드가 미간을 팍 찌푸리곤 서둘러 서재를 나섰다.
“끝이 참 보기 흉하군.”
율리안도 그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앞으로 나갔다.
어느덧 그의 품에서 내려온 레오가 유유히 그를 뒤따르며 말했다.
‘과정 자체는 짜증이 났지만 결과는 마음에 드는 걸. 저런 인간은 언젠가 벌을 받아도 싸다고 생각했어.’
“저걸로 벌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아주 곤란하지.”
율리안은 베이츠를 바라봤다. 그는 제플린을 구출하려 애를 쓰는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의 기사단의 으름장에 베이츠도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율리안은 데본셔 백작저를 한 번 휙 훑어봤다.
새 단장을 한 저택은 그의 기억보다 훨씬 더 화려해져 있었다. 어차피 이것 또한 자신의 연금술사가 만든 것이었다.
율리안은 제플린이 아직 정산하지 않은 돈을 셈해보았다.
“곧 파산하겠군.”
그는 덫에 걸린 먹잇감 같은 제플린을 탐스럽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로비에 이르렀을 때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베이츠를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오늘 밤 열 시. 동쪽 입구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는 없어.”
베이츠가 움찔하며 그를 바라봤다.
말을 마친 율리안은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베이츠는 삭막한 눈을 들었다.
혼란에 빠진 고용인들이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그 사이로 새하얗게 질린 알리시아가 서 있었다.
여전히 푸르죽죽한 색을 한 그녀의 눈을 베이츠가 집요하게 응시했다.
* * *
율리안이 떠난 뒤 레베카는 조용히 도서관을 향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제플린은 처형이 되거나, 운이 좋다면 막대한 보석금을 주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레베카는 솔직히 말해 제플린이 운이 좋기를 바랐다.
그가 불명예스럽게 단두대에 목을 내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어딘가 아쉬운 끝이었다.
아마 보석금을 내고 나면 제플린은 파산할 게 분명했다.
빈털터리가 된 그를 마음껏 희롱하다가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레베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렇게 잔인한 상상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녀는 율리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제플린이 죽어버리기 전까지 그건 불가능했다.
그가 어떤 변수를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제플린은 언제나 예측불허한 일을 벌이곤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으나 레베카는 지금은 일단 율리안을 믿어보기로 했다.
도서관의 문을 열자 오래된 책 냄새가 풍겨왔다.
달큼한 초콜릿 같은 냄새에 레베카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레베카는 책장에 다가가 미리 골라둔 책 몇 권을 꺼내 들었다.
데프리아 여신과 관련된 설화를 엮은 책이었다.
창가 근처의 소파에 자리를 잡은 레베카는 정신없이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알고 있던 이야기도 있었고 처음 보는 이야기도 있었다.
빠르게 책을 훑던 레베카의 눈길이 ‘빛의 장미’란 단어에서 멈췄다.
그녀는 설화를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인간을 굽어살피려 강림한 데프리아 여신은 어느 소년의 몸에 깃들었다.
연약한 소년의 몸은 여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길가에 쓰러진 소년을 발견한 한 농부가 그를 집으로 데려가 정성껏 치료했다.
농부가 없는 날엔 정신이 온전치 못한 그의 외동딸이 소년을 간호했다. 부녀의 지극한 간호에도 소년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지독한 흉년이 들었다. 땅은 메말랐고 버석한 모래만이 날렸다.
그럼에도 농부는 소년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남은 식량이 동나버렸고 농부는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온전치 못한 딸아이는 불행한 삶을 살 게 뻔하니 신의 품으로 이만 보내줘야겠습니다.’
농부는 찢어지는 마음으로 딸아이의 살과 피를 취했다. 딸의 살과 피를 마신 소년은 기력을 차렸고 데프리아 여신이 깨어났다.
농부의 정성에 감복한 여신은 천상에서만 피어난다는 ‘빛의 장미’를 농부에게 주었다. 숭고한 희생 끝에 얻을 수 있는 생명을 피어나게 한다는 꽃이었다.
농부는 ‘빛의 장미’로 죽은 딸을 되살려냈다. 여신은 소년의 몸을 빌어 인간을 살폈다. 그리고 승천하기 전 농부의 집을 다시 찾아 그에게 막대한 부와 행운을 안겨 주었다. >
옛날이야기가 그렇듯 허무맹랑하고 잔인한 내용이었다.
여기서 나온 ‘빛의 장미’가 그 빛의 장미와 관련이 있을까.
레베카는 곰곰이 생각하며 뒷장을 넘겼다.
그곳엔 빛의 장미를 그린 삽화가 있었다.
투명한 장미꽃잎을 쓸어보는 찰나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느닷없는 사람의 목소리에 레베카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유스타프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그냥 들어왔습니다.”
레베카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신가요.”
“저번에 부탁하신 물건의 정체를 알아 왔습니다.”
“그래요? 빨리 처리해주셨군요.”
“제가 또 유능하지 않습니까. 여튼 그건 눈동자의 색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물약이었습니다. 실명이라는 무서운 부작용 때문에 유통이 금지된 것이지요.”
“실명이요……?”
레베카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응접실을 방문한 사람 중에 그런 걸 쓸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알리시아…….’
제 눈을 버려서라도 그 자리가 얻고 싶었던 걸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알리시아는 원한다면 그곳을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차라리 알리시아가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더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레베카는 그녀가 출산하던 날을 떠올렸다.
고통을 호소하는 알리시아에게 크게 주의를 기울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다 레베카를 훑기 바빴다. 그레이스는 그녀에게 차를 권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딸에 집착하던 제플린마저 알리시아를 등지고 자신에게 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그 곳에 남아 있어야 했을까.
레베카는 착잡한 기분을 억누르며 유스타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문양이 낯이 익다고 하셨나요?”
“예. 제게 주신 안약의 출처와 관련 있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암시장에 대해 아시나요?”
“암시장이요?”
이어서 말하려던 유스타프가 입을 닫고는 조금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레베카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암시장이 불법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죄를 물을 만큼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에요.”
유스타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역시 누구와는 달리 레베카 님께선 바다 같은 아량을 가지고 계시군요. 이전에 음지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구하느라 종종 암시장에 들렀습니다. 물론! 지금은 가지 않지만요. 어쨌든 그때 알게 된 자가 있는데, 그가 이런 장미 문양의 안대를 쓰고 있었어요.”
“안대요?”
“예. 아마 이름이 이고르였을 거예요. 보통 시약을 만들 때 서명을 남기듯이 특정 향을 입히고는 합니다. 이 안약에서 포도 향이 나는 걸 보니 분명 이고르가 속한 상단일 거예요.”
“흠…….”
레베카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장미는 흔히들 쓰는 문양이었다.
장미 문양을 새긴 안대를 쓰고 있다고 해도 별 이상할 점은 없었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 많고 많은 장미 중에 이 그림을 보고 그를 콕 집어낼 정도라면 아주 똑같은 장미라는 의미였다.
‘일말의 단서라도 놓쳐선 안 돼.’
율리안과 함께 하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는 다짐한 듯 비장하게 고개를 들어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그 사람에게 절 데려가 줄 수 있나요?”
“예? 암시장을요? 거긴 험한 곳입니다. 귀부인은 눈에 띄어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칸나를 데려가도 안 될까요?”
“칸나 양이라면…….”
유스타프가 잠시 생각에 빠지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을 것 같네요. 칸나 양은 공작님과 어깨를 견줄 만한 실력을 갖췄으니 제 목숨도 구해줄 것 같습니다.”
“그럼 암시장에 같이 가주시는 거죠?”
“그렇긴 한데 공작님도 동행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 편이 좀 더 든든하기도 하고…….”
“안 돼요.”
레베카의 강경한 태도에 유스타프가 눈을 살짝 떴다.
“이건 율리안에게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해요.”
“예? 왜요? 두 분 금실이 꽤 좋아 보였는데 벌써부터 비밀이 생기신 겁니까?”
“그, 그게 깜짝 선물이라서 그래요. 그가 예전부터 찾던 것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찾으신 물건이라니 그게 뭡니까? 제가 아는 거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게 사적인 거라…… 자세하게 알려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레베카느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닫혔다.
유스타프는 고집스럽게 닫힌 그녀의 입술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예, 알겠습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그……. 잭이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